소설리스트

71화 (70/263)

71화

이리스는 숨이 넘어갈 듯이 놀랐다.

“스테판!”

마차에 올라탄 것은 윤이 흐르는 진한 초콜릿색 머리와 요염한 눈매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다.

이리스는 물론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같은 무대에 선 일도 있다.

친하지는 않았다. 주역 무용수와 주역 가수 사이라고 해도 신분의 차이가 엄연히 있었으니까.

지금 여기에 스테판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리스는 당황해서 마부를 외쳐 불렀지만, 응답은 없었다.

스테판이 딸깍 소리가 나도록 마차 문을 닫았다.

“잠깐 재워 두었으니 부르셔도 소용없습니다. 마차도 한적한 곳에 세웠고요.”

“이게 무슨 짓이야?”

이리스는 표독하게 소리쳤다. 스테판이 입꼬리를 비틀고 웃었다.

“아, 뭔가 시원하군요. 이리스 님의 그런 얼굴을 봐서.”

“뭐?”

“대신 화내 줄 사람이 있을 때는 항상 청순한 얼굴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리적으로, 무대 아래서까지 연기하는 사람에게는 구역질이 나서.”

“너……!”

이리스가 곧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분노를 머금고 그를 노려보았다.

스테판은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받아넘겼다.

“저한테 화내실 때가 아닐 텐데요. 백작 부인의 입장이 난처하고, 슈나이더 백작가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고, 무엇보다도 이리스 님 자신이 위험하고.”

“그게, 무슨 소리야?”

“다녀오셨으니, 이미 아실 텐데.”

스테판이 가볍게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켜 보였다. 지금 떠나온 클라우제너 공작가가 있는 쪽이었다.

“예뻤죠? 너무 미인으로 자라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겨 놓느라 고생했죠. 멀리 보내는 건 윗분께서 원하시지 않고, 그렇다고 어디 깊이 처박아 두고 눈을 떼면 백작 부인께서 순식간에 해치우실 테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 뭐가 목적이야?”

“목적은 제게 있지 않습니다. 개가 목적을 가지고 주인을 따르는 건 아니니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리스는 파랗게 질린 채 할딱거렸다.

“주인이라니? 네 스폰서 말이야?”

“……백작 부인께서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도록 키우신 거 같군요.”

스테판이 급격히 이리스에게서 흥미를 잃은 태도로 쪽지 한 장만 내밀었다.

“토마스 보르얀스가 숨어 있는 장소입니다. 직접 쓰시든, 백작 부인에게 가져다드리든 하십시오.”

“뭐?!”

이리스는 무심코 내밀어진 것에 손을 뻗다가, 토마스 보르얀스라는 이름에 화들짝 놀라 손을 치웠다. 쪽지가 마차 바닥에 떨어졌다.

“쓰시지 않아도 상관없고.”

스테판이 짧게 말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이리스는 기겁해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대체 목적이 뭐야? 어디서 왔어? 너도 경시청 구치소에 있던 거 아니야?”

“제가 갇혀 있는 걸 원치 않는 분이 계셔서요.”

“그, 그게 네 주인이야? 그 사람의 목적은 뭔데?”

“…….”

스테판이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글쎄요. 이리스 님을 살려 두는 게 아닐까요? 인질은 죽어 버리면 쓸모가 없어지니까.”

“인질이라니?!”

그가 훌쩍 내리면서 문을 닫았다. 뒤에서 이리스가 다시 “스테판!”이라고 외쳐 불렀지만 무시하고, 그는 마부석에 신호했다.

기절한 마부 대신 말고삐를 잡고 있던 남자가 경쾌하게 말을 몰았다.

스테판은 마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돌아섰다.

이거면 판은 전부 깔렸다.

황후의 목적이 성취되든 아니든 알 바 아니지만, 자신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리나는 걱정할 것 없다. 클라우제너와 델포드 남작이 리나를 위태로운 자리에 놔둘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스테판 씨.”

골목 한쪽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테판은 시니컬한 표정을 지우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황후의 시녀가 부드럽게 그에게 인사했다.

“어떤가요?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그 물건’을 찾아오겠다고 하던가요?”

“그러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아우구스타 님께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백작 부인이 찾지 못한 것을 영애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부인보다는 영애가 백작의 서랍에 더 접근하기 쉬우니까요.”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혹시 안 되더라도 레나테 님이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스테판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구부리며 시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말했다. 시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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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귀족원에 나갔던 에리히는 저녁 늦게 귀가했다.

카탸 쪽에서 연잎 궐련을 받아 피운 자가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스테판 하인즈 쪽은 정말로 상당한 숫자가 걱정하며 에리히를 떠보려 했다.

그것을 상대하려다 보니 늦어진 것이다.

연잎 궐련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발생시킨 온갖 추문을 그자가 쥐고 있는 건 확실했다.

“처음에는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약점을 쥐기 위해 부리는 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에리히는 그렇게 말하면서 거실에서 코트와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미 자리옷을 입고 침대에 들어갈 태세를 갖춘 클레어가 욕실까지 따라 들어갔다.

에리히가 칸막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클레어의 몸을 발가락부터 얼굴까지 찬찬히 훑어 올렸다.

“굳이 욕조로 들어오겠다면 막진 않겠어. 그런 취미가 있는 줄 미처 몰랐군.”

“아니, 특별히 그런 취향이라서가 아니었다고요!”

클레어는 항변했다. 에리히가 그녀의 어깨에 늘어진 머리칼을 가볍게 쥐었다.

“맞춰 주지 못할 취향도 아닌데, 사양할 것 없어.”

“사양 아니거든요. 밖에서 먼지 끌고 들어온 사람이랑 같이 들어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클레어는 두리번거렸다.

애초부터 그녀가 진짜로 그런 목적으로 따라 들어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에리히는 손가락만 딸각 울려 사람을 불렀다.

“의자를 가져와. 뭐 그리 급한 이야기가 있는 거야?”

“딱히 이야기가 급하다기보단 그냥…….”

“그냥?”

칸막이 너머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욕실은 넓고 층고도 높아서 전혀 습하지도, 덥지도 않았다. 그래도 클레어는 괜스레 얼굴이 빨개져서 손부채질을 하면서 허공을 노려보았다.

하인이 드레스룸에 있던 작은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클레어는 거기 앉아서 라임이 들어 있는 찬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아무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봐요. 내 이야기도 스테판 하인즈와 연관이 있는 거라서.”

“흠.”

에리히가 짧게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뭐, 대단한 건 없어. 그자는 여러 귀족들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있었어.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비밀을 털어놓거나 했던 모양이야.”

“술을 마시면 입이 가벼워지듯이?”

“비슷해. 아무튼, 나도 나지만, 특별 조사단을 통해서 하원에 그런 이야기가 넘어갈까 봐 초조해하더군.”

“그러게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돼.”

“죄보다는 체면의 문제지.”

나른해진 에리히의 목소리가 칸막이를 넘어왔다.

“그리고 네 생각에 근거가 하나 붙었어.”

“무슨 생각이요?”

“슈나이더 백작 부인에 관해 질문해 오는 자 대다수가 아렌 귀족이더군.”

“그런…….”

“물론 아렌 귀족만 있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슈나이더 백작가의 교제 관계를 생각했을 때, 8할 이상이 아렌 귀족이라는 건 이상한 일이지.”

“스테판 하인즈 쪽은 어때요? 만일에 그쪽의 주거래 대상이 로멜 귀족이라면, 당신 말처럼 그냥 조직을 둘로 나눠 관리하고 있었던 것뿐일 수도 있어요.”

“그쪽은 뒤섞여 있기도 하지만, 양상 자체도 완전히 달라.”

“그렇군요…….”

잘박거리고 다시 물소리가 났다. 잠깐 뾰족해졌던 클레어의 집중력이 도로 흐트러졌다.

“넌 어때? 오늘은 집에서 리나 그레이스를 꼬실 거라더니.”

“이리스 양이 왔었어요.”

“뭐?”

에리히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클레어는 소리를 듣고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이리스 양 자신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춰 준 셈이에요.”

레비 순보의 기자가 쫓던 죽은 프리마 돈나의 유령.

이리스가 자기 딸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토마스에게 이죽거리던 남자의 말.

리나가 그 용모에도 불구하고 숨기듯 무대 뒤에서 키워진 이유와 그녀의 주인이었던 스테판 하인즈가 황후의 사람이었다는 것.

토마스 보르얀스가, 단지 자신이 스테판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슈나이더 백작 부인과 이리스를 위협하게 되리라고 믿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나를 미리 해치지 못했던 이유.

그걸 전부 합쳐 보면 그럴듯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황후가 이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에 슈나이더 백작 부인을 쓰기로 한 건지, 그러기로 마음먹고 나서 비상선을 치기 위해 확보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요.”

사실 레비 순보의 기자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유령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니, 죽은 프리마 돈나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게 합리적이다.

하필 같은 장소에, 하필 같은 얼굴인데,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도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비밀이 있고, 그걸 지켜야 할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그럴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황후가 개입했는지, 아니면 스테판이 알아서 처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리나 양은 전혀 몰랐고, 이리스 양도 극장에서 리나 양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잘 숨긴 셈이죠.”

클레어는 자기가 억측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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