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레비 순보가 아무리 팩트 체크를 주장한다고 한들, 그들은 흥밋거리를 제일 중요하게 여겨 유령을 추적하는 신문사다.
애인의 자식을 제 자식처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스테판 하인즈가 리나를 그저 가스라이팅 했을 수도 있다.
토마스 보르얀스가 겁이 많고 신중하지 못해서, 자신이 스테판을 만나는 것을 알고는 지레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리나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굳이 해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리스는 리나를 보고 주저앉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클레어는 리나에게 농담 삼아 네가 너무 예쁘니까 놀라서 주저앉은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 얼굴을 알고 있었던 거겠죠. 리나 양의 얼굴은 몰라도, 죽은 프리마 돈나의 얼굴은 알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백작은 이리스에게 친모의 존재와 얼굴을 숨길 사람은 아니야. 아마 자신이 진심으로 네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말해 주었겠지.”
이제는 ‘친모가 맞다면’이라는 조건이 붙겠지만 말이다.
클레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아이러니하네요. 일부러 친모라고 하고 결혼과 동시에 입적했는데, 소문 때문에 어려운 결정을 했어야 했을 거고.”
아이에게 친모가 따로 있다는 걸 알려 주면서도 충분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클레어는 이모면서도 늘 그런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친모는 백작 부인 쪽이고 오히려 자기 딸이 아닌 셈이잖아요.”
“좀 의아하긴 하군. 이리스는 자기가 백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닮은 사람을 봤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테니.”
“백작가에 들어올 때 여섯 살이었다면서요. 뭔가 기억하는 게 있을 수도 있겠죠.”
환경이 통째로 바뀐 데다가 부모가 추억을 재구성해 주지 않는다면 잊어버리는 것이 많을 나이였지만, 기억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백작의 심경을 상상도 할 수 없군.”
에리히의 말은 짤막했지만, 들어 있는 감정은 깊었다. 클레어는 그 말을 두 번째 들었다.
클레어는 잠깐 망설였지만, 칸막이 너머라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을 핑계 삼아 물었다.
“슈나이더 백작에게 정이 많은 것 같아요.”
“정이라기보다는, 의무감을 느끼긴 하지.”
“의무감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슈나이더 백작이 많이 울었어. 아마 빈소에 흘려진 눈물 태반이 백작의 눈물이었을걸.”
에리히가 말했다.
로멜 귀족의 장례식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하천한 일로 여겨지니, 장례식장에 머무르는 것은 슬픔과 비탄이 아니라 엄숙함과 장엄함이었다.
루이자조차도 눈가만 빨갛게 붉히고 용감하게 견디고 있는 미망인 노릇을 했다. 집에서는 까무러칠 정도로 울었지만.
에리히는 그녀의 눈물보다 아마 슈나이더 백작이 소리 없이 관 앞에서 흘린 눈물이 더 진실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낯설긴 했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군. 아버지는 고독하셨을 거라서.”
“에리히…….”
“백작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니까. 뭐, 아버지가 보살펴 주라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에리히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러나 클레어는, 아마 고독했던 것은 부친이 아니라 에리히 자신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느낀 건 의무감이 아니라 고마움이라고 생각해요. 우정이거나.”
“…….”
역시나 로멜 귀족께서는 그런 단어를 긍정하진 않으셨다. 하지만 부정이 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클레어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선대 공작님은 외롭지 않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님과의 결혼 생활도 행복했던 것 같고, 당신도 있었고, 그렇게 울어 주는 친구도 있고.”
“그렇긴 하지.”
클레어는 아주 잠깐 동안, 전생과 현생의 자신을 생각했다.
두 번 모두 닮은꼴이었다. 친척들이 있었고, 부모님의 친구와 지인들이 슬퍼해 주었다.
자신의 친구들도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많이 울지는 않았다. 슬픔이 대수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별것 없이 살다 간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도, 그 인생이 무거웠다. 자신의 삶 위에 죽은 이의 삶이 얹어지는 기분이라 클레어는 등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가끔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엘리사에게도.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신들은 그러지 않았느냐고. 부모님이 어차피 내 삶의 무게를 같이 짐 져 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으로 온전히 끝났을 터인데 왜 이토록 죽음이 무겁냐고.
그녀는 두 번째 생에서는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로멜의 영향이 이미 남부까지 내려오고 있었기에 뒤에서 손가락질당하는 대신 고결하고 품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용감함, 슬픔, 비탄. 장례를 그런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가 침묵하는 사이에 에리히는 몸을 전부 씻고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너무 조용해서 일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클레어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음, 아뇨. 생각 좀.”
에리히의 손이 그녀의 팔걸이를 잡았다. 몸 아래에 갇힌 듯이 되어 클레어는 몸을 움츠렸다.
비누 냄새와 물 냄새가 그의 체향과 섞여 클레어에게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차갑게 식어서 그녀의 뺨에 떨어졌다.
“모든 일을 한꺼번에 끝낼 수는 없어. 차근차근 해.”
“그게 아니라요.”
한순간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클레어는 본래대로라면 할지 말지 열흘은 망설였을 말을 입 밖에 냈다.
“편지, 썼었어요.”
“무슨 편지?”
“선대 공작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요. 델포드에도 귀족원에서 보낸 부고가 왔었으니까.”
“받지 못했어.”
에리히가 미간을 찡그렸다. 클레어는 비로소 말 꺼낸 것을 후회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시골구석의 남작이 보낸 편지였는데요, 뭐. 비서진이 처리했겠죠. 그냥 그 말 해 주고 싶었어요.”
클레어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연락할 생각 한 번도 안 한 거 아니었다고.”
에리히가 가만히 그녀의 등을 쓸어안았다. 가슴 안에서 뭔가가 물처럼 녹아 흘렀으나 그는 그것의 이름을 몰랐다.
“그때, 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
대답 앞에 망설임이 긴 것은 그가 스스로 인정하지 않아도 그때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에게는 다른 가족도 없고, 의지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으니, 그녀가 엘리사를 끌어안고 이겨 내 온 시간 동안 그는 혼자였을 것이다.
클레어가 웃자 가벼운 키스가 내려왔다. 그다음은 무릎 아래로 손이 들어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체력이 남는 모양이지?”
“음, 곤란한데요. 당신 방에서 엘리엇이 자고 있어서.”
침실 문 앞에서 에리히의 발이 멈췄다. 클레어의 손이 놀리듯이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물기를 훑었다.
짧고 격렬한 갈등이 있었다. 에리히는 발길을 돌렸다.
“잠깐, 어디로 가려고요?”
“네 대답은 이미 확인했어.”
클레어는 재빨리 손을 조신하게 그의 어깨에 감았지만, 소용없었다.
어차피 침실이 많다고 안심했는데, 도착한 곳까지 다섯 걸음이었다. 에리히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잠깐, 에리히.”
“염려 마. 금방 끝나.”
그거 여자에게 무례한 소리 아닌가 생각했지만, 사실이었다.
욕조에 달구어진 손이 식기도 전에 클레어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그다음 클레어는 침대로 안겨 갔다기보다 실려 갔다.
그리고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서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잠든 엘리엇의 옆에 눕혀졌다.
“그런데 엘리엇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당신을 기다리다 잠든 거죠, 뭐. 내 생각엔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당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는 게 빠를걸요?”
그건 좀 기쁜 이야기였다.
에리히는 사람을 불러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하는 대신 자신도 그 옆에 누웠다.
촛불 빛을 반사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반짝임의 파편을 흩뿌렸다. 클레어의 시선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보면서 에리히가 경고했다.
“일 늘리지 마.”
“안 해요. 결혼식 때까지는 진짜 쉴 거라고요. 그냥 예쁘다 싶어서요.”
에리히가 코웃음을 쳤다.
“내일도 일정 있잖아?”
“그건 결혼식 준비 중 하나죠. 아렌 귀족이 클라우제너 공작과 결혼하면서 공왕 전하께 인사 한번 드리지 않을 수는 없고.”
잠든 엘리엇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면서 클레어가 말했다.
“전에도 인사 가려고 했었는데 이래저래 늦어졌네요.”
“음…….”
에리히의 손이 올라간 아이의 상의를 끌어 내려 배를 덮었다.
그 손을 지켜보며 클레어가 말했다.
“결혼 같은 건 인생 계획에 단 한 번도 없었는데.”
“…….”
“그런 얼굴 하지 말아 줄래요? 원래 세웠던 건 결혼 계획이 아니라 가문 경영 계획이었으니까.”
셔우드 놈도 과연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은 현명하지 않았으므로 에리히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현명하지 않은 생각도 하나 더 스쳤지만, 그것도 참았다.
“가족 관계를 늘리는 게 싫었거든요. 책임이 늘어나는 거 같아서. 무엇이든, 거래 관계나 계약 관계인 게 제일 확실하죠.”
그것은 이번 생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전생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도 하는군요. 사람 인생 모를 일이에요. 아니, 근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신이 여기서 제일 어색한 존재라고요.”
“내가 뭘?”
“애 배를 쓰다듬고 있는 에리히 클라우제너라니. 이거.”
사진도 없고, 영상도 없고, 남길 수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