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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2/263)

73화

에리히는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아.”

“그림은 아무런 증명도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애통할 뿐이라고요.”

“우웅.”

그때 엘리엇이 잠투정하며 끙끙댔다. 클레어가 입을 다물었다.

에리히가 엘리엇을 어색하게 토닥였다. 엘리엇이 입을 달싹거리더니 곧 다시 잠들었다.

엘리엇은 다정한 아이다. 에리히의 마음에도 그것이 전해지는 것 같아 클레어는 그게 기뻤다.

그녀는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슈나이더 백작가는 그냥 놔둘게요.”

“그럴 필요 없어. 백작 부인은 처벌을 받아야 하고, 이리스도 일부 책임을 져야 해.”

“조금이라도 온건한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요. 조사 결과도 나오려면 멀었고.”

“어떻게 해도 백작이 상처받지 않을 방법은 없어. 하려던 대로 해. 백작 쪽은 내가 신경 쓰도록 하지.”

“당신이 신경 안 쓰게 해 주려고 한 말인데.”

“그러면 그냥 내일 당장 이혼시키고 이리스도 끌어내지.”

“뭐라고요?”

에리히가 맞닿아 있던 클레어의 손을 끌어당겨 손끝에 입술을 댔다.

“네게 패악을 떨었다며.”

“그걸로 남을 이혼시킬 수는 없어요.”

“왜 못 하겠어.”

에리히는 의문형이 아닌 어조로 말했다. 클레어는 그의 입술에 닿아 있던 손을 뻗어 잘생긴 코를 꽉 꼬집었다.

“이러니까 내가 당신을 싫어했지.”

그녀가 돌아눕자 에리히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물리적인 화해를 시도할 수는 없었다. 엘리엇이 에리히의 가슴 쪽에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잠투정하는 아이를 어색하게 달래는 소리를 들으며 클레어는 킬킬 웃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다.

19. 핏줄

마사가 엘리엇의 몸차림을 단정하게 고쳤다.

클레어는 평소에 엘리엇에게 활동하기 편하고 질긴 옷을 입혔다. 하지만 오늘만은 하얀 리넨 셔츠와 벨벳 리본 타이, 잘 만들어진 모직 정장을 입혔다.

머리에 페도라를 씌우자 작은 신사가 나타났다. 그 귀여움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정작 엘리엇 본인은 불만으로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마사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오늘은 주인님이랑 같이 외출하실 거잖아요.”

“또 일일 거야. 분명해.”

이모는 델포드에 있을 때도 늘 바빴지만, 수도에 온 뒤로는 더 바빴다.

바빠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다. 하지만 4살짜리 아이가 그걸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겠는가.

클레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가고 싶어.”

엘리엇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마사가 방글방글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공작님은 못 보는데요?”

“같이 가자구 할 거야!”

“파벨도요.”

“파벨은 내가 어디 가든 같이 가 준댔어!”

엘리엇은 의기양양했다. 마사가 웃음을 숨기려는 듯 입을 손으로 가리고 알려 주었다.

“해적선이랑 산적성은 못 가져가실 거예요. 분수대도 그렇고요.”

“아, 안 돼!”

엘리엇이 소리쳤다. 생각만 해도 서러운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파벨이 남몰래 가슴을 부여잡았다.

‘우리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에리히의 어린 시절 무뚝뚝함을 생각해 보면, 그 피 어디에서 이런 사랑스러운 도련님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곧 준비를 마친 클레어가 엘리엇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오늘은 평소보다 신경 쓴 차림새였다. 머메이드라인의 실크 스커트는 묵직하면서도 우아했고, 깃털 꽂힌 하얀 모자가 적갈색 머리칼과 대비되어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레이스로 만들어진 장식용 양산까지 손에 걸친 채 들어오자, 이모를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쁘다고 생각하는 엘리엇이 토라진 것도 잊고 우와 하고 입을 벌렸다.

첫 번째는 물론 엄마다. 그러나 초상화로밖에 보지 못했기에, 제일 예쁠 거라는 생각만 있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는 잘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엘리엇, 어디 보자. 아주 잘 어울리네.”

“앗.”

예쁘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엇은 인상을 쓰고 다시 토라졌다. 팔짱을 끼고 팩 고개를 돌리는 얼굴을 보고 클레어가 ‘어머’ 하고 소리를 냈다.

“왜 삐쳤어?”

“흥!”

“어제 이모 계속 집에 있었는데? 엘리엇, 이모가 집에서 일하는 거에는 화 안 내는 거 아니었어?”

“흥!!”

들으라는 듯이 엘리엇이 더 큰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

마사가 웃었다.

“이 집이 너무 넓고 지키는 사람도 많아서, 도련님이 주인님 서재에 놀러 가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

“너 물놀이 하느라 이모한테 안 오는 거였잖아.”

그것도 그랬다.

놀 거리가 적은 델포드 영주관에 비해 클라우제너 공작저는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하루가 홀랑 가 버렸다.

게다가 에리히가 들이게 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저택 정원에 설치되면서 활동 범위가 늘어났다. 클레어의 서재에서 창틀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떼쓰지 않아도 시간이 금방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이것은 이것.

이모가 놀아 주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혼식 끝나면 많이 놀아 줄게.”

“싫어! 지금!”

“이모랑 아저씨랑 결혼하는 거 싫어?”

“우웅.”

저번 달이었으면 확실하게 싫다는 말이 나왔겠지만, 이제 엘리엇은 고민하게 되었다.

아빠가 생기는 것은 좋지만, 이모가 엄마가 되면 원래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마사는 원래 엄마도 엄마고 이모도 엄마가 되는 거라고 했지만, 이모가 없어지는 건 그것대로 싫었다.

“천천히 고민해. 자, 가자.”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엇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엇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래서 입술을 한 치나 내민 채 고개를 돌리고, 그러면서 두 손으로 클레어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아저씨 같은 신사가 되려면 멀었네.”

“내가 뭐.”

“훌륭한 신사분이시면 숙녀를 에스코트해 주셔야지요?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니라?”

엘리엇이 움찔거렸다. 그건 어깨가 들썩일 만한 이야기였다. 이모한테 신사라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델포드에서는 본보기가 될 만한 남자 어른이 없었다. 오촌 아저씨인 찰스는 소심하고, 작은할아버지인 제임스는 멋있지 않았다.

가끔 방문하는 그레이는 어려웠고, 로저는 친구 같았다.

에리히는 멋진 어른이었다. 엘리엇은 그를 동경했다. 멋있고, 키도 크고, 부하도 많고, 이모랑 싸워서도 자주 이겼다.

그리고 어린애인 자신에게도 항상 진지하게 말해 주고, 막 웃지 않았다.

신사라는 말을 듣자 에리히처럼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으흠.”

엘리엇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폈다. 그리고 오연한 표정을 했다.

‘얘 좀 봐.’

클레어는 어이없음 반, 웃음 반으로 배 속을 끓였다. 터뜨리지는 않았다. 웃으면 놀리는 게 된다.

아무튼, 교육적으로 좋아 보이긴 했다. 그러고 보니 에리히의 가정교사에게 엘리엇을 맡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결혼식이 끝나면 찾아봐야겠다.

엘리엇이 내미는 작은 손을 잡고 클레어는 저택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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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 로멜과 아렌이 합병한 이래 아렌 귀족들은 항상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양국은 동등한 위치에서 군주의 결혼에 의해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수도는 로멜의 수도였으며, 자연스럽게 황궁에 영향을 미치는 중앙 귀족들의 다수가 로멜 귀족이었다.

결혼 자체도 그랬다. 아렌의 세레니티 여왕은 현군이었으나 그 위엄이 로멜의 프리드리히 대제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결혼은 대개 남자 쪽을 중심으로 기울었다. 딸이 가문을 상속하기 위해 데릴사위로 결혼 계약서를 쓰는 경우에도, 여자의 아버지가 가주로서 자리에 버티고 있지 않으면 외부인들은 대개 남편 쪽을 가문의 대표로 여겼다.

황실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 경우 로멜이 일방적으로 아렌을 지배하려 들 수 있다는 문제까지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제와 세레니티 여왕은 그것을 염려하여 로멜-아렌 계승법을 만들고, 황실 직계 자손들의 이름을 아렌식으로 짓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방법을 강구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 뒤로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경제력 격차에 따라 로멜로 기울어지는 경향도 현저했다.

법적인 대등함은 실제 세력의 균형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렌 귀족은 자신들을 로멜 귀족에 비해 반 단계 낮은 위치에 있다고 느꼈고, 실제로 사회적인 인식도 그랬다.

아렌 귀족들이 연대하여 로멜 귀족에게 저항하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클레어는 개인주의자인 데다가 귀족 제도에 냉소적이었다.

저항은 귀족이 할 게 아니라 평민들이 해야 했다. 많이 쳐 줘도 중산 계급이 하든가. 작위 귀족은 그것만으로도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다.

고향에서야 이웃 영지와 친분을 갖고 교류했지만, 지연이라면 모를까, ‘아렌 귀족’이라는 계급에 소속감을 가진 것이 아니다.

에리히에게는 자신을 지칭해 고작 아렌 귀족 따위가 어쩌고 하면서 대꾸하곤 했지만, 그건 로멜 귀족의 시선을 비꼰 것이지 진심으로 자신이 낮은 위치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인생 계획에 아렌 공왕을 알현할 예정은 없었다.

하지만 일개 남작이면 모를까,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라면 처신이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

마차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클레어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아렌 왕가가 수도에서 억압되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프리드리히 대제가 특별히 신경 썼다는 궁전 부지는 넓었다. 경비병들은 마차를 세우는 대신에 그냥 문을 열어서 통과시켰다.

“와, 이모, 지금 봤어요? 창을 들고 있었어요!”

엘리엇이 신기한 듯 외쳤다.

“옷 구겨져, 엘리엇.”

“멋있다.”

엘리엇이 듣지도 않고 황홀해했다. 내일부터는 기사 놀이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뭔들 해적놀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마차가 궁전 정문 앞에서 멈췄다. 시종이 열어 주는 문으로 내리다가 클레어는 당황했다.

정문까지 아렌 공왕이 나와 있었다.

“공왕 전하.”

클레어는 황급히 가슴에 한쪽 손을 얹고 무릎을 구부려 인사를 올렸다.

뒤따라 시종의 도움을 받아 내린 엘리엇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듯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앗, 울보 할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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