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엘리엇!”
클레어는 황급히 엘리엇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렌 공왕의 뒤에 도열해 있던 시종과 호위들은 창백하게 질렸다.
아렌 공왕이 이제 나이 들고, 또 딸과 외손자를 연이어 잃으면서 기운이 많이 빠지긴 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드는 사람이 없었던 엄중한 권력자였다.
지금도 엄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종들은 감히 그의 앞을 가로질러 걷지 않았고, 발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이렇게 무엄하게 굴다니. 다들 앞일을 걱정하며 눈을 질끈 감는데, 아렌 공왕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아가. 할애비가 기억나니?”
“주스 가게에서 엄청 울었던 할아버지! 이제 괜찮아요? 아픈 건 다 나았어요?”
“그래.”
아렌 공왕이 손을 뻗었다. 엘리엇은 한번 낯을 익힌 사람이라고 망설이지도 않고 활짝 웃으면서 공왕의 손을 잡았다.
공왕은 무심코 엘리엇을 훌쩍 안아 올렸다. 그러고 나서야 남의 아이에게 너무 허물없이 굴었나 싶어 후회했지만, 보드라운 아이의 뺨에 뽀뽀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흔쾌히 방문해 주어서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아렌 공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클레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에게 알현을 청한 일이 없었다. 아렌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공왕을 알현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적어도 에리히의 청혼을 받아들인 직후에는 만나러 오는 게 보통이었으리라. 그녀에게 부친과 조부가 이미 없고, 대귀족 친척도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아렌 왕가를 제외하면 아렌의 그 어떤 가문도 클라우제너와 마주 앉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러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클라우제너 공작은 지금까지 황궁 정치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델포드 남작도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아서 전하를 알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요.]
무어 공작도 염려스럽게 말했다.
황궁 정치는 하원 의원을 후원하거나 정책에 의견을 내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황좌를 둘러싼 암투는 은밀하고 지독했으며, 아렌을 배척하고 지배하는 것은 고고한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클라우제너는 그런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새 시대의 산업에 핵심적인 에너지와 자원을 쥐고 있는 이상 다른 땅을 탐낼 필요가 없었고, 그 어떤 권력도 클라우제너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렌 귀족과 결혼하여 후계자에게 아렌의 피를 섞는 이상, 보다 더 확실하게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암투에 휘말릴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을 겁니다. 클라우제너 공작은 방계 황족이기도 하니까요.]
[……알아.]
[자칫하면 아렌 귀족들이 세를 모아 그 아이를 밀어주려는 형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는 몇 번이나 아이의 꿈을 꾸었다. 아니, 아무리 닮았어도, 엘리엇은 제러드가 아니고, 제러드의 아이도 아닌데.
그 꿈조차도 자신이 늙어서 망령된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다시 만나 보면 제러드보다는 에리히를 훨씬 닮았으리라. 자신이 너무 늙어 판단력이 흐려지고, 그리움에 눈이 먼 탓에 착각을 일으켰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리워했다. 추억 속에만 남은 아이의 그림자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클레어는 그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저희 아이를 귀엽게 여겨 주시는 건데요. 무엇을 염려하시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것도 저희가 원래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고맙네.”
공왕이 진심으로 말했다. 그가 연이어 두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는 것에 시종들이 숨을 삼켰다.
그가 웃으면서 엘리엇에게 시선을 주고 말했다.
“요 강아지가 자꾸만 생각이 나서 꼭 한 번 다시 만나 보고 싶었거든.”
“강아지 아니에요.”
엘리엇이 항의했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아무 일도 없이 똑 사이좋은 조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클레어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들을 것이 아니라 사죄를 해야 마땅했다.
지난번에 소다수집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었다.
대를 잇는다거나 황위 계승권이라거나……. 그런 건 의미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영원히 델포드의 아이로만 있으면 된다고 여겼다.
마치 자기 혼자만 엘리엇의 혈육인 것처럼.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굳이 이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서 혈통에 따르는 권리 같은 것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아렌 공왕이 진심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딸이 죽은 것은 25년 전의 일이고, 손자를 잃은 것은 5년 전의 일이니, 이제 감정이 정돈되어 말랐을 법한데도.
진짜로 제러드의 아이라는 건 알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그날 밤에 클레어는 에리히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게 피가 당긴다는 걸까요?]
[공왕 전하께서는 제러드를 정말 많이 사랑하셨지.]
[그러니까요.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주 사랑이 지극하다고들 해도, 직접 기른 정도 없고, 자식이 낳아 기르는 걸 본 것도 아닌데 뭐 그리 귀엽겠나 했거든요.]
클레어는 에리히의 무릎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 에리히가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넌 엘리엇이 태어나는 걸 직접 봤으니까, 비슷한 경험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지.]
[당신도 그랬어요? 자기 아이라고 생각하니까 막 사랑스럽고?]
[엘리엇은 그냥도 예쁜 아이야.]
에리히는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하고서 말을 덧붙였다.
[아마 너도 동생이 소식 모르는 곳에서 죽었는데, 꼭 빼닮은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면 만만치 않게 울었을걸.]
[모르겠네요. 안 된다는 걸 낳더니, 키워 달라고 하고 가 버려서.]
그때 결정했었다. 위험을 감수하게 되더라도 끊어서는 안 되는 인연이라고. 진실은 밝힐 수 없어도, 만나게 해 주는 게 옳았다.
지금 아렌 공왕이 엘리엇을 추어올려 다시 안는 것을 보면서 클레어는 그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들어가지. 무어 공작도 자네를 만나 보고 싶다고 했는데, 곤란하지 않다면 다과를 함께 하지.”
“일부러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왕은 이채롭게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위빙 상단의 상단주라 하였으니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도, 무어 공작의 이름을 들으면서도 전혀 기가 죽거나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당당하고 품위 있는 태도였다.
‘하긴, 클라우제너의 여주인 될 사람이 그렇게 가볍지는 않겠지.’
엘리엇이 신기한 듯이 고사리손으로 공왕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클레어는 엄하게 말했다.
“엘리엇, 무례를 범하면 안 돼. 죄송합니다. 저희 집에 수염 기르는 사람이 없다 보니…….”
“괜찮네. 수염이 신기하니?”
“할아버지 수염이 엄청 많아요. 하얘서 산타 같아.”
“산타?”
“저희 집에서 해 주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 이야기예요.”
클레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엘리엇이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옛날이야기 아냐! 나한테 선물 주는데!”
“그렇구나. 무얼 받았는데?”
“케이크하고, 목마하고, 칼하고……. 저는 착한 어린이니까요.”
엘리엇이 당당하게 말했다. 공왕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쩜 이리 귀여울까.
다시 봐도 역시 이 아이는 제러드를 닮았다. 첫인상과 똑같았다.
에리히와 제러드가 닮긴 했어도 쌍둥이는 아니다. 그리고 엘리엇은 아무리 봐도 제러드를 더 닮은 것 같다. 이목구비의 생김생김은 둘째 치고 표정이나 웃는 인상 같은 것이 말이다.
물론 아이가 아비보다도 친척을, 그것도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사람을 닮았다고 그 부모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공왕은 그 부분을 빼고 말했다.
“핏줄이라는 게 참 놀랍지. 어찌 이리 닮았을까?”
“다감한 성미는 아마 저희 집 성격을 물려받은 걸 거예요.”
공왕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클레어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에리히가 아이를 제 자식이라고 주장하기 전까지, 클레어는 엘리엇이 여동생을 쏙 빼닮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렇구나.”
아렌 공왕은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인지, 엘리엇을 안고 있기 때문인지, 다정하고 감정 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왕은 두 사람을 바깥 응접실로 안내하는 대신 내실에 딸린 거실로 데려갔다.
따스하게 햇살이 들고, 내원 쪽으로 테라스가 열린 널찍한 공간이었다.
엄격한 얼굴의 중년 여인이 한발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무어 공작 각하. 델포드의 클레어입니다.”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 불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안 그래도 긴히 말씀 올려야 할 일이 있어서 한번 뵙고자 했었습니다.”
클레어가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