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곧 다과가 준비되었다. 엘리엇이 슬슬 답답해하며 몸을 흔들어서, 공왕은 아이를 내려 주었다.
엘리엇은 달려가 클레어의 무릎에 한 번 올라갔다가 도로 기어 내려갔다. 클레어는 엘리엇의 손에 쿠키를 쥐여 주었다.
엘리엇은 금세 얌전해졌다. 델포드 영주관에 있을 때, 클레어를 따라 서재에 들어올 때마다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배운 탓이다.
클레어가 종종 미안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늘 마음이 쓰렸다.
얌전히 쿠키를 베어 무는 엘리엇을 보고 공왕이 눈이 주름 사이로 사라지도록 웃었다. 이 만남을 반대했던 무어 공작도 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클레어는 공왕이 해후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무어 공작에게 말했다.
“진작 한번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고작해야 남작가의 딸이라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어요.”
“공왕 전하께서는 괘념치 않으십니다. 제 마음에는 아렌 왕가의 옛 영광이 아직 찬란히 남아 있어서 안타깝지만, 공왕 전하께서는 이제 아렌인을 통솔하기에는 연세가 많으시지요.”
헨리에타 왕녀가 살아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녀가 황후가 되었다가 죽고, 아렌 왕가에는 이제 직계 자손이 없었다.
클레어가 부드럽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방계에 불과한 데다가, 나 또한 자식이 없으니까요.”
무어 공작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아렌 숙녀들의 데뷔 파티조차 황실의 역할이 되었으니, 이제 황실 아래 모든 가문은 작위가 높은 귀족에 불과하지요.”
“아렌 왕가가 그저 작위 높은 귀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면, 저희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셨을 거예요.”
클레어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클레어 자신에게 아렌 왕가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은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그것은 로멜 황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데뷔탕트 파티를 퍼스트레이디가 열어 주는 대신에 아카데미 졸업 파티로 대신한 것은 오히려 공적이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님도, 이웃 영지의 귀족들도,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아렌 왕가에 대한 향수 이상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무어 공작은 그녀의 말 속에 숨은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반발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 웃음은 클레어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고, 허무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자 가루가 묻은 엘리엇의 손을 털어 준 아렌 공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처럼 눈을 달게 적시는 일도 많지 않은 법이니까. 하지만 남작은 아직 어리니, 그렇게 옛 아렌에 대한 집착은 없겠지?”
“부끄럽지만, 아렌인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게 딱 좋아. 옛날에 사로잡혀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법이지. 그래도 내 아직 가진 것을 다 잃진 않았으니, 동향 어른이다 생각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의지하게.”
“네.”
클레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야기다운 이야기는 별달리 하지도 않았는데, 금세 지루해진 엘리엇이 몸을 비비 꼬았다. 아렌 공왕이 웃었다.
“심심하냐?”
“심심해요.”
“오래된 장난감이 몇 개 굴러다니기에 너 주려고 가져왔는데, 가지련?”
“장난감이요?”
엘리엇이 눈을 빛냈다. 공왕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주고 싶어서 일부러 주머니에 넣어 온 것이었다.
그가 꺼낸 것은 나무로 만든 말 두 마리였다. 낡아서 닳았지만, 본래 새김이 섬세하고 화려한 채색이 있었을 것 같았다.
“와!”
엘리엇은 신나서 소리치더니 공왕이 후회하기라도 할까 봐 염려한 듯 얼른 그것을 잡았다. 클레어가 엄하게 말했다.
“인사해야지.”
“아! 고맙습니다!”
엘리엇이 얼른 인사하고 장난감을 받아 갔다.
클레어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난감이 모자란 환경은 아니었을 텐데. 물욕이 있는 건 아무래도 자신을 닮아서 그런가 싶었다.
“다그닥 다그닥! 푸슝!”
엘리엇이 입으로 말 달리는 소리를 흉내 내며 소파 팔걸이를 나무 말로 두드렸다. 클레어가 말리려는 것을 공왕이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 거실은 아이들 놀이방으로 쓰던 곳이라, 가구도 그리 귀한 게 아니라네.”
“그렇군요.”
듣고 보니 탁자도, 소파도 흠이 곳곳에 있다. 아이들이 놀거나 장난치며 망가뜨린 흔적이다.
공왕궁에서 예산이나 사람이 없어 이대로 두었을 리는 없으니, 아마 추억 때문에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아이를 키워 보지 않은 5년 전이었다면 몰랐을 마음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야 또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존재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엘리엇의 친부가 점차 구체적인 형상을 띠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동생의 남자 친구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상이 구체성을 띠자 죽은 동생에 대해서도, 이제 자신의 아이인 엘리엇에 대해서도, 또 그와 닮았지만 다르다는 에리히에 대해서도 조금씩 더 잘 이해하게 된 느낌이었다.
‘이미 모르는 부분이 없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에리히도 이곳에서 벽지 하나쯤은 찢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클레어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추억이 깃든 물건이면 귀한 것일 텐데, 엘리엇에게 선물해 주셔서요.”
“귀하긴. 이제 물려받을 사람조차 없어서 그냥 집에 두었던 것들인데. 마음에 들어 하니 내가 오히려 좋군. 창고에서 썩어 가는 것 중에 엘리엇이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가면 좋을 텐데.”
“지금은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요. 한꺼번에 많이 받아 봐야 다 가지고 놀지도 못하고…….”
“아닌데! 나 다 갖고 놀 수 있는데!”
“너 이모 몰래 아저씨한테 졸라서 잔뜩 선물 받은 게 엊그제인데.”
“헤헤.”
엘리엇이 헤헤 웃고 재빨리 도망갔다.
그 모습을 보고 공왕도, 무어 공작도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어는 짐짓 엘리엇을 꾸짖는 체했지만, 엘리엇이 아예 테라스 쪽으로 도망 나가자 태도를 바꾸었다.
“제가 전에 어떤 연세 있는 분에게 듣자니, 한꺼번에 큰 걸 선물해 봐야 아이는 금세 잊어버리니 작은 걸 자꾸 들고 만나러 가야 손주에게 환영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클레어의 말에 공왕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게 엘리엇을 자주 만나러 와도 좋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안색과 다른 말을 했다.
“함부로 그러는 것은 좋지 않아.”
“동향 어르신 노릇을 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클레어는 작게 웃었다.
“제가 엘리엇을 시골에서 퍽 분방하게 키워서,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거든요. 귀엽다고 생각하신다면, 자주 만나 잘 가르쳐 주세요.”
공왕이 뭐라고도 말할 수 없는 표정을 했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과거에 겪은 여러 일과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클레어는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염려하시는 일에 대해 저도, 에리히도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로 공왕 전하와도, 다른 아렌 귀족들과도 특별히 인연을 만들지 않고, 몸가짐 조심하며 숨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자신이 아렌 귀족이라는 점이 변하는 건 아니다.
엘리엇만이 문제는 아니다. 자신이 에리히의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아이가 더 없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마르고트 황후는, 아렌 남작 출신의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가만두고 볼까?
에리히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각오는 세우고 있었다.
단지, 어떤 전략을 가지고 대응하느냐가 문제였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벌벌 떨며 숨는 것은 성격에 안 맞아서요. 공왕 전하께 저희 아이를 황제가 되게 밀어 달라고 부탁드리진 않을 테니까 염려 마세요.”
염려할 사람과 받을 사람을 바꾼 클레어의 말에 아렌 공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얼마만의 일인지 몰랐다. 그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아렌이라는 상징이 무겁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고맙네.”
공왕이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뜻을 알아들었기에, 클레어는 황급히 공왕보다 더 몸을 낮추고 대답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 감사하시는 일은 흔치 않으니, 그냥 받아들이세요.”
무어 공작도 퍽 풀어진 낯빛으로 말했다.
테라스 앞에서 엘리엇이 팡팡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모! 나 밖에 나가도 돼?”
“내가 따라가겠네. 편하게 있게.”
아렌 공왕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클레어는 고개만 숙여 보이고 호로록 차를 마셨다.
무어 공작이 온화하게 말했다.
“나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요. 공왕 전하께서 저처럼 좋은 얼굴을 하시는 게 몇 년 만의 일이랍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사실은 사과를 해야 하는 문제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엘리엇과 공왕이 자리를 떠나고 나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무어 공작도, 클레어도 생각이 많은 타입인 탓이다.
무어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긴히 할 이야기라는 게 무엇이지요?”
상대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다. 먼저 용건을 꺼내거나 묻는 것조차도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는 일이었으나, 무어 공작은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자기 쪽에서 먼저 물었다.
클레어는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가 이렇게 여쭙는 것을 무례하다고 느끼실지도 모르지만, 혹, 최근 몇 년 사이에 공왕 전하와 무어 공작님을 방문하는 사람이 급격히 줄지 않았습니까?”
무어 공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