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꺄악!”
깜짝 놀라 이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그 손을 힘껏 뿌리쳤다. 뿌리쳐진 상대도 놀란 듯 당황하여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
이리스는 신음했다. 상대는 아는 얼굴이었다.
“애빙던 백작님?”
면식이 있는 귀족이었다. 아주 친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최근에 오페라에 취미를 붙였는지 종종 극장에 오는 사람이었다.
슈나이더 백작가의 살롱에도 꽤 자주 드나들었다.
하지만 이리스는 잠시 눈을 의심했다.
애빙던 백작은 통통한 장년 남자였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있는 것은 살이 홀쭉 빠져 뼈만 남은 병자였다.
안색은 시커멓고 입술은 허옇게 부르텄다. 손발이 쉴 새 없이 떨리고 눈은 이상한 안광을 뿌리며 동공을 굴렸다. 식은땀에 젖은 이마가 번들거렸다.
“살롱은…….”
“네?”
“살롱은 언제 열립니까?”
“제, 살롱이요?”
이리스는 당황하며 물었다.
슈나이더 백작은 예술을 애호하는 사람이고, 백작가에는 당연히 살롱이 있었다. 이리스도 종종 살롱에서 노래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열리는 살롱이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꽤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애빙던 백작이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서 살롱에 대해 묻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이리스는 그가 살롱에 자주 오는 손님이라는 것조차 잘 몰랐다. 엄마가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저희 집 사정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어요? 살롱 같은 걸 열 형편이 아니에요.”
“그러면, 진정제는……!”
애빙던 백작이 그녀의 두 팔을 움켜쥐며 고함쳤다. 이리스는 겁을 집어먹었으나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약점이 된다. 틀림없다. 엄마가 그 살롱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애빙던 백작의 꼴을 보면 분명히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리스는 평소처럼 구해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 부드럽게 애빙던 백작의 손등을 쓸었다. 그녀의 다정한 태도는 언제나 쓸모 있었고, 이번에도 통했다.
애빙던 백작은 끔찍한 안색으로도 동요를 내비치며 얌전해졌다. 이리스는 마음속으로 거지에게 친절한 공주 역할을 떠올리며 그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살롱은 당분간 열기 어렵겠지만, 백작님이 중요한 일로 찾으신다고 엄마께 전해 드릴게요.”
“진정제……도, 꼭 전해 주십시오.”
“네. 꼭 전해 드릴게요. 아마 엄마가 구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애빙던 백작은 순순히 납득하고 물러섰다. 그는 몹시 고통받고 있었으나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까지는 아니었다.
“꼭…… 꼭, 연락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리스 양.”
여기에서 이리스에게 미움을 받아 살롱에 다시 가지 못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이리스의 살롱에서만 나누어지는 진정제가 없으면 그는 온전한 판단을 할 수도 없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게 금단 증상이라는 자각도 없었다. 진정제만 있으면 된다. 그것만 있으면, 제대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운영을 중단한 오페라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슈나이더 백작 부인을 정식으로 방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부인의 외도가 발각된 사실로 백작가가 뒤숭숭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경호원들이 백작저를 둘러싸고 지키고 있었다.
자칫하면 델포드 남작 납치 미수에 연루된다. 그 두려움만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남아 있었다.
한편, 그가 물러난 뒤에도 이리스의 가슴은 계속 쿵쾅쿵쾅 뛰었다.
‘엄마한테, 이것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만날 수가 없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이리스는 백작 부인을 딱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해서였다. 진실이 모두 밝혀지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오페라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벽과 바닥이 뜯긴 1층은 을씨년스러웠다. 위층에서 쾅쾅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남은 뒤 통로를 드러내기 위해 에리히가 명령한 일이다.
범죄의 온상이었던 곳이니 자발적으로 내놓은 건축 도면과 출입구는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특별 조사단에 대한 위력 시위였다.
아마 이 극장은 회생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리스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뒤집어 입었다. 그러자 저렴하고 평범한 회색 망토처럼 보였다. 1인 2역을 할 때 입었던 무대 의상이었다.
그녀는 그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오페라 극장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토마스가 숨어 있는 곳은 오페라 극장에서 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등잔 밑이 어두우리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이리스는 뒷골목을 살금살금 걸었다. 들킬 일은 없다. 그녀가 오페라 극장을 방문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문을 닫게 되었으니, 지배인을 위로한다는 핑계도 있었다. 집에도 그렇게 말하고 나왔고, 용건을 끝마치면 실제로도 지배인의 사무실에 들러 이야기를 나눌 작정이었다.
하지만 불안감 때문에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걸음이 불안정했다.
‘애빙던 백작 때문이야. 괜히 불안해져서 그래.’
그녀는 품에 숨긴 것을 한번 확인했다.
그것은 ‘진정제’다. 그녀는 카탸의 약상자가 어떤 순서로 정리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가장 강한 것이 어느 것인지 아는 것은 아주 용이한 일이었다.
콩콩.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긴장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저, 이리스예요.”
이리스는 애써 목구멍에서 소리를 쥐어짜 냈다. 자신이 존댓말을 한다고? 오페라 극장의 일꾼이었던 자에게?
그렇지만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문이 삐걱 열렸다. 안에서 피운 담배 때문에 매캐한 연기가 새어 나오고, 토마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리스…… 네가 여긴 왜……?”
기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아빠!]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렇게 부르면 냄새나는 손이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기뻤던 때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기억나는 것은 싫은 냄새뿐이었으나, 이리스는 자신이 기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혐오감이 솟구쳤다.
이 남자가 그녀의 친부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되었다.
아버지가 슈나이더 백작보다 더 멋진, 더 대단한 사람인 것은 상상해 본 적 있지만, 이따위 하천한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일 수는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리스는 줄곧 망설이고 있었다. 친부를 만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테판의 수작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망설임이 사라졌다. 이런 남자 때문에 손에 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슈나이더 백작 영애였고, 그래야만 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리스는 애틋한 얼굴로 그의 팔에 매달렸다. 원래 연기력이 있었기에, 진심으로 보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
토마스의 표정이 흔들렸다. 남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망치고, 일가를 파탄 내 팔아 치우는 일을 손쉽게 해 온 남자에게도 딸에 대한 애정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리스를 은신처 안으로 들였다. 이리스는 미소까지 짓고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이 화재에 휩싸인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의 일이었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붉어진 하늘과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길목에서 신문팔이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호외요, 호외!”
“또 불이 났대요!”
공왕저에서 돌아오던 클레어는 마차를 잠깐 멈추고 호위에게 말했다.
“한 장 부탁할게요.”
“예, 남작님.”
호위가 내려서 신문을 사 왔다.
이 시간의 호외라면 대개 사건 사고였기에 클레어는 곧바로 신문을 폈다.
오페라 극장에서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서 오늘 또 방화가 있었다고 했다. 커다란 창고가 딸린 빈 가게였고, 시신이 한 구 실려 나왔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이게 우연일 수 있을까?’
화재는 언제 어디서든 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하필이면 그 인근에서.
창고에 있던 물건이 무엇인지,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확인해 봐야겠다.
어제는 토마스 보르얀스의 조직원 몇몇이 구치소에서 살해되었다. 범인은 싸우다가 욱해서 그랬다고 자백했지만, 구치소에 칼이 어떻게 반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대가 이렇게 쉽게 사람을 죽여서 치우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만일에 그자가 추측대로 진짜로 황후라면 더더욱.
클레어는 잠든 엘리엇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고개를 숙여 그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신의 아이는 자신이 꼭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