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20. 결혼식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결혼식은 예정된 날짜에 거행되었다.
성황청 예배당을 빌리고 초대장을 발송하는 일로 급히 인원을 늘려야 할 정도로 비서실이 굴려졌지만, 결과물은 훌륭했다.
성황청 본당과 정원이 전면 개방되었다. 연하늘색 실크 장막들이 정원 곳곳에 내려앉듯 둘러쳐져 휴식처를 만들고, 간단한 푸드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다.
예배당 안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고, 피로연장에 모든 이를 초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간단히 대접하기로 한 것이다.
두 가문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비교적 신분이 낮은 가신들이 정원에 가득 모여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까지 초대해 주시다니, 역시 델포드 남작님은 인품이 다르셔요. 아 참, 이제 남작님이 아니라 공작 부인이시지?”
“그걸 허락하신 공작님은 어떻고요. 모든 걸 다 남작님 뜻대로 해 주시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엄밀히는 고용주나 거래처 대표일 뿐이지만, 마치 제 가족이 공작 부인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뻐했다.
중요한 예배를 볼 때만 열리는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마차장에서 내려 걸어와야 했지만, 제임스는 달랐다. 그는 신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으므로 성황청 정문을 지나 본당 앞뜰까지 마차로 올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이 누군가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흠.”
제임스는 마차에서 내리며 헛기침을 했다. 관심 가득한 시선이 쏠려 오는 것이 부담스러운 마음이 아주 조금 섞인 짜릿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암, 우리 가문이 그냥 그렇게 시시한 남작가로 끝날 핏줄은 아니지.’
저 멀리 조상을 따져 보면, 능력만으로 아렌의 재상을 역임한 백작가의 혈통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혈통의 후손이니까 말이다.
그의 옆에서 찰스가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아버지, 몸가짐을 조심하시지 않으면 클레어가 나중에 뭐라고 할 거예요.”
“어허, 뭘? 오늘은 델포드와 클라우제너의 결혼식이고, 우리가 델포드 가문의 대표가 아니냐.”
안타까운 것이라고는, 자신이 클레어를 에스코트해서 식장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부모가 없으니, 마땅히 가문의 큰 어른인 자신의 역할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리스가 처음 방문했을 때 한 소리 들은 뒤로, 그런 잔소리를 쉽게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레이는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곁에 서 있던 슐츠 법무 차관이 말했다.
“콧대가 높아질 만하지. 델포드 남작가 같은 곳이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인척이 되었으니. 그것도 방계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제임스 경이 성품이 나쁜 분은 아닙니다만, 경솔한 구석이 있다 보니 조금 걱정됩니다.”
“가주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겠는가?”
“그것도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
슐츠 차관이 지나가는 시종의 트레이에서 샴페인 잔을 두 개 집어 들어 그중 하나를 그레이에게 건넸다.
“자네는 이제 자네 걱정을 해야지.”
“제 걱정…… 말씀입니까?”
“그래. 이제 델포드 남작가와 클라우제너 공작가는 합쳐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가문의 법률 고문으로서의 역할은 대부분 저쪽으로 넘어가겠지. 위빙 상단 정도의 규모라면 상단 변호사로서도 꽤 보람이 있겠지만, 자네가 거기서 그칠 사람은 아니니까.”
“슐츠 선생님.”
“델포드 가문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자네라면 물론 클라우제너의 쟁쟁한 변호단에 들어가도 부족하지 않겠지만, 그건 사실 자네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슐츠가 열변을 토했다.
“그것보다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기대에 보답하는 길이란 말이야. 지금의 남작님도 그러라고 자네를 풀어 주신 게 아닌가?”
“글쎄요. 아직은 정계에 뛰어들기에는 연륜이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는 평온하게 말했다.
“당분간은 사무소를 지키고 싶습니다. 선생님도 그걸 바라시니 제게 맡겨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델포드 남작가가 그냥 남작가일 때 이야기였지. 그랬다면 자네를 팍팍 밀어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도 잘해 주십니다.”
“하지만, 클라우제너의 법률 고문들은 자네를 배척할 걸세. 그러느니 차라리 나랑 같이 에른스트의 후원을 받게나.”
슐츠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남작님에게도 더 나아. 자네를 매개로 에른스트 공작가와 따로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으니까. 자네 마음만 확실하고, 윗분이 신뢰를 깨지만 않는다면, 배신이 아니야.”
“예, 압니다. 그냥 아직은 사무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근거지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그럼 에른스트 소공작님께 일단 인사만 드리러 가는 건 어떤가? 마침 오늘 결혼식에 참석하셨다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레이는 모호한 웃음을 띠었다.
슐츠가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 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가문도, 세력도 없이 오로지 능력만 가지고 올라간 평민이라, 자신을 끌어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에른스트 공작가가 상대라면 조금 애매했다. 몇 달 전까지라면 슐츠의 뜻을 그저 고맙게 생각했겠으나, 이제는 난처했다.
에른스트 공작가는 황후의 친정이었기 때문이다. 클레어가 황후와 적대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시된 이 시점에서 에른스트의 후원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인사 정도라면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둘은 샴페인 잔을 든 채로 정원에 나와 있는 다른 손님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노이만 의장도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그는 그레이와도 면식이 있었다.
약혼 파티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일을 치르면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슐츠 경, 클라우제너의 유력한 미래를 훔쳐 가려고 그러는 거요?”
“미래를 훔치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솔직히 클라우제너에서 내부 경쟁 때문에…….”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신분 높은 하객들이 속속 도착했다.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 오셨군. 인사드리러 갈 건데, 같이 가겠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자네도 같이 가세.”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클레어가 입장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슐츠의 말에도 옳은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야 언젠가 클레어가 필요로 할 때 기댈 수 있는 위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괜히 씁쓸해진 입안을 혀로 쓸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권력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이었다면, 클레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오페라 극장의 벽을 뜯어내고, 특별 조사단을 위협하며 보고서 전부를 제출시키기는커녕 기껏해야 법 조항을 들먹이며 상대와 신경전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에리히와 맞먹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피후원자, 충실한 가신인 것만이 아니라 의지가 될 수 있는 남자로 있고 싶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기 전이었다.
“와아아……!!”
멀리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초대장을 받지 못한 클라우제너의 하급 고용인들과 위빙 상단의 종업원, 그 밖에 결혼식을 그저 구경하러 온 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노이만 의장이 미소를 지었다.
“만세라도 부를 것 같군.”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의 위엄이 대단합니다.”
슐츠가 그렇게 말했다. 그레이는 마음속으로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빙 상단이 좋은 의미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클레어가 지난 몇 달 동안 여론을 이용해 이 결혼을 세기의 로맨스로 만들지 못했다면, 이건 그저 고위 귀족의 결혼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환호하고 있다.
그럴 만하다고 납득하고, 그 사실이 클레어를 위해 기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빈 것 같았다.
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마차가 성황청 정문 앞에 섰다. 에리히가 먼저 내렸다.
우아하게 성장한 신랑의 모습에 정원에 황홀한 한숨이 가득 차올랐다. 완벽하게 조각된 대리석상에 검푸른 비단과 황금을 입힌 듯했다.
그는 제게 쏟아지는 찬탄을 알지도 못하는 듯이 무심하게 돌아서서 안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곧바로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드레스의 긴 트레인이 부피가 제법 커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탓이었다.
“클레어.”
“좀 잡아 줘요.”
시녀가 옷자락을 정리하기 전에 에리히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려 훌쩍 땅에 내려놓았다.
“앗.”
긴 드레스 자락 안에서 구두가 반쯤 벗겨졌다. 클레어는 난처해져서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왜?”
“잠깐 있어 봐요. 구두가 새것이라 뻣뻣해서…….”
클레어는 그의 손을 잡은 채 발을 꼼지락거리며 구두를 다시 신었다.
사람들은 정확히 무엇 때문에 거기 멈춰 섰는지는 몰랐지만, 끌어안거나 키스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상적이고 다정한 모습에 탄성을 흘렸다.
“됐어요.”
클레어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리히가 손을 잡아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신문에서 그렇게 떠들어 댄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가 고운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틀어 올린 붉은 머리칼은 새하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물거품처럼 풍성한 흰색이었다. 등허리부터 시작된 트레인에 자잘한 보석을 달고, 조금씩 푸른빛이 돌게 하여 그 끝부분에서는 맑은 바다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연푸르게 반짝거렸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환영과 기쁨의 함성이 정원을 가득 메웠다.
그레이는 그 뒷모습이 예배당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들어가야지.”
슐츠가 그렇게 말하고 팔을 잡아서야 그는 자신이 잠시 넋을 잃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예’ 하고 대답하는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는 그 사파이어 반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것을 영원히 처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