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79/263)

80화

21. 친딸

이리스는 피로연장에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저것 보세요.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왔어요.”

“정말로 염치가 없군요. 미친 거 아닐까요?”

“아니, 그래도 이리스 양이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외도를 했다고 해서 이리스 양이 책임질 것도 아니고.”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해 보세요.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공작 부인을 납치하려고 했었다고요. 그게 이리스 양 때문이 아니면 무엇 때문이겠어요?”

“슈나이더 백작가가 생각이 있으면 지금은 아무 말 말고 조용히 집에서 근신해야죠.”

“지금 납치 사건 같은 게 문제예요? 공작님과 슈나이더 백작 영애 사이에 있었던 불측한 소문을 생각해 보라고요.”

“설령 그 소문이 진짜라서 억울한 입장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아니죠. 신부 마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곳에 찾아와요?”

“진짜로 뻔뻔하네요. 그나마 결혼식장에는 나타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리스는 다 알고 있었고, 갈 곳 없는 울분으로 몸이 발발 떨렸다.

물 한 모금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 지금 근신해 봤자 어차피 저런 말이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그러는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 버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에리히는 남에게 무심한 사람이고, 클레어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람을 모욕하는 타입은 아닌 걸로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빅토리아 대공이나 아렌 공왕 같은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 자신을 쫓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일단 만나야 해.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설득도 해야 해.’

겉으로라도 화해한다면, 클레어도 대놓고 자신을 몰아내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불쌍해 보여야 한다. 설령 그 금발머리 하녀가 누구인지 클레어가 알아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방식이 다를 것이다.

이 파도가 지나갈 때까지는 어떻게든 굴욕을 참아야 했다. 이리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춤 한 곡 추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결혼한 신랑 신부는 당도하지 않았다.

파벨이 대리인으로 나와서 모든 이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 피로해하시기도 하고, 공작님께서 워낙 기다리시던 일이라 두 분은 신방에 일찍 들기로 하셨습니다.”

그가 장난스레 눈가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아시잖습니까? 5년이나 기다리신 거.”

“어머, 너무하시네. 이미 같은 집에서 생활한 지 오래되셨는데, 신부가 아무리 예뻐도 오늘은 참고 손님맞이를 하셔야지.”

슈페 자작 부인이 까르르 웃으며 사람들이 다 듣도록 말했다. 파벨이 그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또 원래 즐거운 일이라는 게 아예 모르는 것보다 알고 나서 참는 게 더 힘든 일 아닙니까? 침대나 무너뜨리지 않으시면 다행입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둘러 말했어도 공작 부부를 두고 할 말은 아니었으나, 결혼식 피로연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허용 범위였다.

“대신 클라우제너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하객 여러분을 대접해 드릴 겁니다. 부디 밤새도록 축하하며 즐겨 주십시오.”

파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들이 사람의 키만큼 큰 크리스털 타워를 카트에 실어 밀고 나왔다.

“와!”

황금색 술이 분수대처럼 솟았다. 술에 섞인 황금 가루들이 타워를 빛나게 했다.

거품 가득한 샴페인 잔이 무차별로 나누어졌다.

파벨이 잔을 들어 올렸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축배를 기원하겠습니다. 부디 클라우제너에 영광을. 공작 부부께 행복을.”

“클라우제너에 영광을. 공작 부부께 행복을.”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소망하자면, 부인을 꼭 닮은 어여쁘고 똘똘한 아가씨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같이 기원드립시다.”

누군가가 웃으면서 소리쳤다. 덕분에 세 번째 건배사가 외쳐졌다.

“부인을 꼭 닮은 아가씨가 잉태되시길!”

즐거운 웃음소리가 연회장 안에 울렸다.

파벨이 물러나고, 관현악단이 춤곡을 세 곡 연이어 연주했다.

‘돌아갈까?’

이리스는 입술을 깨문 채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그녀도 아무에게도 말을 걸 수 없었다.

오늘 계획은 엉망이다. 그냥 돌아가야겠다고 그녀가 피곤하게 생각했을 때였다.

시종들이 서둘러 움직이며 가스등의 조도를 조절했다. 곧 환하고 작은 무대가 생겨났다. 이리스의 살롱에서도 자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어머, 무슨 일이지?”

“공연이라도 있는가 본데요?”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연회에서 여흥으로 공연이 열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리스는 불길함으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살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작은 술렁거림이 피로연장을 뒤덮었다.

막시밀리안이 청초하고 아름다운 숙녀 하나를 에스코트하여 나타났다.

그가 여자를 동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일인데, 여자가 몹시도 아름다웠다.

조그맣고 하얀 얼굴은 요정처럼 오밀조밀 사랑스러운 이목구비였고, 날씬한 몸에는 장식 없이 매끈한 라인의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대신 목걸이라기보다 스카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다이아몬드 장식으로 목부터 어깨를 덮었다.

귀에 달린 샹들리에 귀걸이가 반짝거리면서 불빛을 반사했다. 꿀빛 금발에도 다이아몬드로 만든 별을 장식했다.

“헉.”

이리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 여자가……!’

이럴 수는 없었다. 클레어는 자신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손을 쓸 작정인 건가?

설마. 아닐 것이다. 증거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냥 예쁘니까 화제몰이용으로 내보낸 것이리라.

지금은 빨리 피하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으나 이리스는 쉽게 발길을 떼지 못했다.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가볍게 지휘봉을 내리그었다.

전주는 익숙한 곡조였다. 음색 고운 목소리가 흐르는 듯한 편안한 목소리로 달빛 아래 손을 마주 잡은 연인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이리스는 숨 막히는 기분으로 그 노래를 들었다.

음색이 독특하면서도 몹시 아름다워 귀에 쏙 박혀 들었다. 고음까지 편안하게 올라가는 목소리였다. 조금만 연습하면 순식간에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만한.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브라보!”

한 곡이 끝나자마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여자가 곱게 웃으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주위에 인사를 했다.

몇몇 귀부인이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저 숙녀분, 누구죠?”

“막시밀리안 경이 에스코트하는 것을 보면 클라우제너나 델포드의 친척일 것 같은데.”

“저런 미인을 어떻게 여태까지 감쪽같이 숨겨 놨었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리스는 달아나려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피로연장 저편에서 초췌한 중년 남자가 비틀비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빠?!’

슈나이더 백작은 반쯤 넋을 놓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백작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공연히 안 좋은 말이나 듣게 될 테고, 또 신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일 테니, 아무도 참석하지 말라고 백작 자신이 말했는데.

지금은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리스는 이대로 놔두면 큰일 날 거라고 생각하고 얼른 가서 백작의 팔짱을 끼었다.

“아빠!”

“…….”

“여기는 왜 오셨어요? 아, 저 때문에 오셨구나. 저 진짜 사고 치러 온 거 아니에요.”

이리스는 다급함을 숨기고 억지로 경쾌하게 말했다.

“에리히 님과 공작 부인께서는 피로연에 참석하지 않으신다더라고요. 그러니까 저희는 돌아가요, 아빠.”

“……이리스.”

백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로와 고통, 의심이 짙게 묻은 얼굴이었다.

“아빠.”

“…….”

너는 먼저 돌아가라거나, 그런 말조차 하지 않고 백작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게 했다.

그리고 무대로 다가갔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시야가 흔들리고, 몸도 그랬다.

“슈나이더 백작.”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는 사람 하나가 백작의 팔을 잡으려 했다.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려고 했지만, 백작은 듣고 있지 않았다.

목소리만이 아니다. 얼굴도 같았다. 자태 역시.

달빛 아래 춤추는 정령처럼 저 노래를 부르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 영혼을 먼저 빼앗기고, 그다음 심장을 내주었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제가 그녀에 비해 늙고 추한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발밑에 무릎 꿇고 비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배 속에 제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기쁨이 아니었다.

[내가 그대의 앞길을 가로막았군.]

품에 안고 싶었지만, 아내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늙은 남자의 부인이 될 사람이 아니라 날개를 달고 온갖 빛이 부서지는 곳에서 노래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떠나 버렸다.

아이가 싫었던 게 아니다. 기뻤다. 그보다 황홀한 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저 안타까웠을 뿐이다. 하지만 그 뜻을 온전히 전달하기도 전에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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