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0/263)

81화

그렇게 잃은 아이를 다시 찾은 게 얼마나 기뻤던가.

그녀의 분신에게라도 모든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남이 뭐라고 하든, 평판이 어떻든, 세상이 무엇을 최고로 치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가장 재능 있는 일,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바랐다.

딸이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기뻤던가. 자신이 망가뜨린 천사가 되살아난 것 같아서.

하지만.

하지만.

지금껏 부정해 온 모든 문장들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카탸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다. 오페라 극장에는 연인의 유령이 있다.

그로부터 소리들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아주 조그만 소리로만, 절대로 백작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는 말들. 그 자신의 뱃속 밑바닥에서 속삭이던 의심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뭔가를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냥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지 않은가.

이리스의 빈자리에 들어온 새로운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우연히 닮았을 뿐이리라.

그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남들이 모두 예배당을 빠져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머릿속에서 옛일을 떠올렸다.

앉은 채로 잠들어 꿈을 꾼 것 같았다.

예배당을 정리하는 사제가 깨워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에반젤린은 2년 전에 병으로 죽었어요. 제게 꼭 아이를 백작님께 데려다주라고 부탁하더군요.]

[왜 2년이나 걸렸소?]

[저는 가난한 여자예요. 이곳까지 올 여비를 모으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제 딸도 있었고요. 에반젤린이 불쌍해서 이리스를 거두기는 했지만, 일자리를 던져 버리고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어요.]

카탸는 딸을 잃었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비로소 이리스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잃은 딸이 되찾은 제 딸처럼 느껴졌었다.

그녀는 딸을 잃었고, 그는 딸의 엄마를 잃었다. 그러니 서로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있으리라고 여겼고, 17년 동안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알아야 했다.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피로연장으로 왔다.

그리고 이 짤막한 공연과 마주친 것이다.

그는 이리스가 잡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손을 쳐냈다. 이리스가 그 손을 내려다보고, 슈나이더 백작을 바라보고, “아빠!”라고 외치며 다시 붙잡았다.

수많은 눈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슈나이더 백작과 무대 위의 가희를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이 가로막지 않았기에 백작은 아무런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작은 무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미 오열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영애의 이름을, 물어도…….”

“제 이름은 리나예요.”

“부모님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어요.”

리나가 음색만큼이나 차분하고 고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각오가 끝난 듯 침착한 태도였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살해되셨다고 들었어요. 할머니가 절 업고 달아났다고 해요. 하지만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고 어머니의 이름도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그레이스 부인…….”

“알고 계시는군요. 네. 그게 제 할머니 성함이에요.”

슈나이더 백작이 헐떡거렸다. 그레이스 부인은 연인의 집을 보살펴 주던 가정부였다. 그녀가 사라질 때에 함께 사라졌었다.

“에반젤린.”

슈나이더 백작은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게, 영애의, 어머니 이름일 거야.”

“아…….”

슈나이더 백작은 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눈동자도 꼭 같았다.

“내, 딸…….”

그가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내 딸이야, 내 딸…….”

그는 힘이 다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치 빌 듯이 여자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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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초대했던 손님들이 드디어 자리를 떴다.

아무리 이런저런 핑계로 피로연에 나가지 않았다지만, 황실의 두 대공과 아렌 공왕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빅토리아 대공은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지에서부터 수도까지 먼 길을 와 주었다. 기차가 연결되었다지만, 연로한 분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피로연장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공작저의 식탁에서 소규모로 만찬을 거행했다. ‘전하들’과 마주 앉아 식사할 기회를 얻은 제임스가 기뻐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엘리엇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입적 전까지 공적인 장소에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친척들한테까지 그럴 순 없었으니까.

빅토리아 대공이 피로를 호소하고, 베티나 공녀가 음흉하게 웃으며 신혼부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모를 끌고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내실로 돌아오자 달이 높은 한밤중이었다.

클레어는 거실부터 아무렇게나 구두를 벗어 던지며 한탄했다.

“힘들어서 뒤질 것 같아요.”

“비속어 쓰지 마.”

“뒤질 거 같은데 뒤질 거 같다고 하지 뭐라고 해요?”

“버릇되면 엘리엇이 배운다.”

“물 좀 줘요. 그리고 안아 줘요.”

에리히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뒤집어 한 잔 가득 따른 다음 자기가 마셨다.

“아, 진짜!”

두 번째 불평을 하기 전에 그의 입술이 내려와 클레어의 입술을 적셨다. 물기가 조금씩 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왔다.

“미지근해지잖아요.”

클레어는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기꺼이 그의 입안에서 수분을 훔쳐 냈다.

에리히가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중력을 조금 거스르자 발이 편해졌다.

“구두를 좀 편하게 만들지 그랬어?”

“무슨 말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 세트로 갖춰야 하는데, 구두만 덜 예쁘게 만들 순 없죠.”

클레어는 그렇게 말해 놓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스며든 생각이 무언지 알아채고 에리히가 말했다.

“피로연은 한창 중일 거야.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을 해도 소용없어.”

“내가 백작에게 너무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잖아. 후회할 것 없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니까요.”

“목적도, 수단도, 사실은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진 건 리나 양이고, 그에 비하면 백작조차도 중요하지 않지.”

“그건 그러네요.”

클레어는 자신이 이 일을 이기심으로 결정한 것일까 봐 스스로 조심스러웠다.

리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클레어 님이 단순히 돈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리나 양…….]

[전 아주 어릴 때부터 극장에서 일해 온 사람이에요. 스타의 이름을 잊히게 할 수 있는 건 새로운 스타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레이디 이리스라는 이름에 딸린 가치도 잘 알고 있노라고 리나는 말했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저지른 짓을 완전히 치워 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명성을 모조리 제거해야 했다. 이리스는 더 이상 성황청의 소프라노 솔리스트여서도, 프리마 돈나여서도 안 된다.

그게 남아 있으면 언젠가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게 꼭 리나 양을 이용하는 방법이 아니어도 돼요.]

[하지만 클레어 님은 이리스 양의 모든 걸 빼앗아서 제게 주고 싶으신 거죠.]

리나는 클레어의 생각보다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보통은 그걸 은혜를 베푼다고 해요.]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아요.]

[저는 가수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클레어 님. 그런 사람이 남의 화제가 되는 걸 싫어하리라고 생각하세요?]

리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클레어 님의 다이아몬드 모델이 되려면 어차피 유명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으음…….]

[그리고 왜 저라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요? 원래 그 자리는 제 자리였던 거잖아요.]

[리나 양…….]

[백작 영애라는 지위도 그렇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노래하며 사는 삶도 원래 제 것이었던 거죠.]

그래서 클레어는 오늘의 일을 만들었다.

뭘 복잡하게 할 필요도 없었다. 무대를 만들어 리나에게 노래를 시키고, 그걸 슈나이더 백작에게 목격시키는 것으로 족하다.

만일에 백작이 친딸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었다. 리나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에 유명인이 될 기회를 얻을 테니까.

피로연에 참석하지 않고 일찌감치 집에 돌아온 것은 리나의 제안이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남작님이 결혼식에서 주인공이 되셔야 하는데, 제 구질구질한 일 때문에 번거로워지실까 봐서예요.]

[난 주인공보다 그 뒤에서 금은보화를 움켜쥐고 휘두르는 악독한 대상인 노릇이 더 좋아요.]

진심이었는데, 리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이 웃었다.

솔직히 결혼식 같은 거, 힘들기만 하고 별로 의미도 없었다.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상황이었고, 결혼 계약서 작성도 끝났다.

예쁜 드레스를 입는 것도 벌써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던 일이다. 실효성도 없는 성전에 서명하는 것밖에…….

사르륵.

드레스의 등에 달린 리본이 풀어져 나갔다. 에리히의 손이 드러난 등을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서 가만히 짚었다.

“음.”

별것도 아닌 접촉인데 클레어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피곤한 탓인지 몸의 반응에 신경이 예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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