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드레스 몇 벌치의 천이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풍성한 치맛자락이 살랑거리며 에리히의 허벅지를 간질였다.
“머리 그만 굴려. 딴 놈 생각도 그만하고.”
“리나 양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괜찮을까, 하고.”
“나한테 집중하라는 소리야. 딴 남자 놈은 당연히 논외고.”
등을 훑어 내린 손이 허리까지 내려와 고정용 리본을 풀었다. 매끄럽게 천이 밑으로 떨어지고 목덜미가 드러났다. 에리히가 거기에 입술을 묻었다.
“하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끌어안은 손이 클레어를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치맛자락이 무릎 밑에서 뭉쳤다. 커다란 손이 클레어의 다리 안쪽을 안마하듯 정중한 동작으로 쓸어내리더니 발을 들어 올렸다.
“씻어야 해요.”
“발에 물집이 잡혔군.”
“구두가 새거여서 그렇다니까요.”
“사람을 써.”
“구두 길들이는 역할로요? 아.”
복숭아뼈에 키스 당하며 클레어는 짧게 신음했다.
“왜 이렇게 새삼스럽게 굴어요.”
“넌 오늘이 첫날밤이라는 자각도 없나?”
“그게 새삼스러운 거죠. 어차피, 으음.”
에리히는 클레어의 입술을 막기로 결정했다.
한참 만족스러울 만큼 키스하고 나서 내려다본다. 풍성한 흰 천 속에 이제 아내가 된 여자가 파묻히듯 누워 있었다.
새하얀 꽃다발 속에 붉은 꽃이 한 송이 피어 있다. 부케를 든 신부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부케 같았다.
에리히는 자신이 맡고 있는 향기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새삼스럽다니까.”
클레어가 발갛게 변한 얼굴로 말했다. 말은 새삼스럽다 어쩐다 하면서도, 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라 드러난 곳이 촉촉했다.
에리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셔츠를 벗어서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살짝 밑으로 흘러 내려갔던 클레어의 시선이 열에 달아오른 채 옆으로 떨어졌다.
“그, 새삼스럽긴 한데.”
“왜?”
“아니에요.”
몸 안에서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부글부글 끓었다.
한때 에리히는 그것을 울화라고 생각했다. 정욕이 무엇인지 이미 아는 나이인데도 그랬다. 단순한 쾌감과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으니까.
박살 날 때까지 온몸으로 그녀에게 부딪치고, 뭉개지도록 짓누르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씹어 삼키고 싶었다.
그때도. 그때부터도.
“헉.”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그것을 알아챈 듯이 클레어가 숨을 몰아쉬었다. 허벅지에 올려놓은 손이 재촉하듯 그의 골반까지 올라왔다.
“서두르지 마.”
“씻겠다는 걸 안 보내 준 게 누구예요?”
“애초부터 너도 급하니까 드레스룸도 안 들르고 침실까지 들어왔을 텐데.”
“음, 그건 아니에요.”
클레어는 부정했지만,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온종일 초조감에 시달렸다. 사실 에리히가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몸 안쪽이 불편한 듯한, 다리가 둥실거리고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금도 물을 먹은 솜인 양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그러나 온몸의 신경은 그 어느 때보다 그에게 집중해 있었다.
에리히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위로 몸을 구부렸다. 중력에 잡아당겨지는 듯이 침대에 파묻힌 채 클레어는 그를 끌어당겼다.
“하아. 에리히.”
줄곧 열려 있던 입술 안으로 에리히가 밀고 들어왔다.
몸 안까지 그가 전달하는 열덩어리로 온통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클레어는 두 팔로 그의 등에 매달렸다.
그날 밤에 이리스는 혼자 귀가했다.
오열하느라 제정신이 아닌 슈나이더 백작을 파벨이 휴게실로 안내하면서, 따라 들어가려는 그녀를 막았다.
[혼자 계시게 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파벨 경, 제가 딸이에요!]
이리스는 충격받아 그렇게 외쳤으나, 파벨은 난처한 얼굴을 한 채 고개만 저었다.
피로연은 미묘한 분위기인 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계속 술을 마시고 즐기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바로 자리를 뜨기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신랑 신부는 물론 사교계의 중요한 인물이 하나도 참석하지 않은 피로연이다. 일찌감치 돌아간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
사실 빨리 돌아가 이 소문을 퍼뜨리려는 자도 있을 게 분명했다.
이리스는 연회장에서 사람들이 없는 복도로 살짝 빠져나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아가씨! 걱정했어요.”
“별일 없으셨죠? 역시 가시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기다리던 하녀들이 한마디씩 염려를 던졌다. 이리스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창백하게 질렸다.
‘이 하녀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렇게 말해 줄까?’
겁이 났다. 이럴 때 의지할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실에 계실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 당분간은 만나지 않으시는 편이…….”
이리스는 말리는 소리를 듣지 않고 곧바로 내실로 향했다.
카탸는 백작 부인의 침실에 혼자 있었다.
그녀야말로 여러 가지로 미묘한 입장이었다. 슈나이더 백작은 그녀에게 외도 의혹에 대해서 추궁하지 않았다.
[난 당신을 믿소.]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특별히 행동을 제재하지 않았으나, 카탸는 그것을 신뢰라고 믿기 어려웠다.
아마도 백작의 마음속에는 이미 의심이 싹텄을 것이다. 추궁하지 않는 것은,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을 감싸 줬기 때문일 것이다.
‘공작이 경고했을 때 나를 비호했으니, 이제 와서 내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외도라니, 다소 억울했다.
토마스와 잤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달래기 위해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아닌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굳이 뭔가를 증명하려다가는, 오히려 토마스가 다른 이름으로 백작저에 오갔던 증거가 나올 뿐이다.
‘골치 아파. 차라리 어디 멀리 떠날까.’
일이 전부 틀어졌으니 그것도 괜찮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특별 조사단이 외도 의혹을 사실로 만들면 이리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멀리 떠나는 게 낫다. 백작에게 자신이 이리스의 친모가 아니라고 공표하도록 하고, 사라지면 된다. 그러면 이리스는 백작의 금지옥엽 고명딸로서 좋은 혼처로 시집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의 자리는 글렀다. 그러면 그냥 적당히 슈나이더 백작가와 격이 맞는 곳도 괜찮다.
자신이 직접 챙기는 것보다는 못할 것이나, 백작은 딸을 위해 좋은 곳을 선택할 것이다.
오로지 걱정되는 건 스테판 하인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그것뿐이었다.
‘그놈의 소식까지만 확인하고.’
카탸가 막 편지 한 통을 썼을 때였다.
바깥이 조금 소란해지더니 이리스가 바깥바람을 끌고 들어왔다. 화사한 자태인데도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지는 밤공기가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다.
“엄마!”
“이리스.”
카탸는 당황했다.
“내가 당분간은…….”
“엄마……!”
이리스가 울먹이며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카탸는 당황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엄마, 어떡해요? 아빠가 알아 버렸어요.”
“무얼?”
“내가 가짜라는 거요.”
그 말에 질겁해서 카탸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하녀 하나가 복도에서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뭘 알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카탸는 이리스를 안은 채 자연스럽게 명령했다.
“너, 가서 물수건을 만들어 오렴.”
“아, 네! 마님!”
안을 훔쳐보던 하녀가 황급히 사라졌다. 카탸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리스의 뺨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가짜라니? 누가 그런 소릴 해?”
“나 엄마의 친딸이잖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어? 너, 엄마가 다른 남자 만났다는 소문 듣고 그러나 본데, 아니야. 그건 너랑 상관없는 이야기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걸. 그 애가 있었어요.”
“그 애……?”
“리나.”
이리스가 작게 속삭였다.
“리나 걔. 엄마, 걔가 공작저에 있었어. 그 여자가 걔를 데리고 있었어.”
카탸는 숨을 들이켰다. 이리스가 ‘그 여자’라고 부르는 건 클레어 델포드뿐이었다.
“너, 기억하니?”
이리스가 잠깐 망설였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했다.
“걔 얼굴을 보고 기억나 버렸어. 전부. 알기 싫은 것까지.”
“너…….”
흐느끼는 이리스를 잡고 카탸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토마스를 죽인 것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 엄마. 진짜로 그러고 싶지 않았어.”
“맙소사. 왜 그랬어? 엄마한테 이야기하지, 왜 그랬어? 네가 안 그래도, 엄마가 전부 처리할 건데……!”
“어쩔 수 없었어. 그런 남자가 내 아빠라니, 말도 안 되잖아.”
이리스가 울먹거리는 걸 넘어서서 아예 호읍하기 시작했다.
카탸는 다급히 이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이리스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일을 저질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