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네가 어떻게 알았어? 토마스는 숨어 있었을 텐데.”
“스테판, 이…….”
카탸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이리스는 떠듬떠듬 말했다. 그러자 카타갸 길게 탄식했다.
“아! 결국 황후가 널 망치려고……!”
이리스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울먹이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녀가 물수건을 들고 와 있었다.
카탸는 문을 살짝 열고 물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하녀에게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스를 달래서 보낼 테니,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
“네? 아, 네. 마님.”
외도 의혹 전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므로 하녀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의심하지는 않았다.
카탸는 물수건으로 이리스의 얼굴을 정성껏 닦아 주며 속삭였다.
“전부 엄마한테 맡기고, 너는 침실로 돌아가.”
“엄마.”
이리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토마스 일도, 리나 일도.”
카탸는 이리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단단히 일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백작님한테 울면서 매달려. 정이 많은 사람이니, 그 사람 너 못 버려. 넌 백작님 딸이야. 알았어?”
이리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방울이 솟았지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해한 것 같았다.
카탸는 다시 한번 이리스의 얼굴을 닦아 주고, 문을 열었다.
하녀가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스는 주춤주춤 나가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봤지만, 카탸는 냉정하게 문을 닫았다.
이왕이면 둘이 싸워서 이리스가 쫓겨났다고 하녀가 생각할 정도로.
그다음 그녀는 혼자서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마빈 슈나이더가 죽은 날 남긴 기록이 있다. 마빈은 황태자궁의 서기관이었으니, 이것은 곧 황태자의 마지막 날 기록이기도 했다.
그리고 황후가 줄곧 찾고 있던 것이다.
‘황후에게서 몸을 지킬 카드로 쓰려고 했었지만…….’
그녀는 비밀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후가 배신하여 생기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토마스가 알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카탸의 입에서 나간 말로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 비밀을 아는 자는 세상에 오로지 세 사람, 자신과 토마스, 그리고 황후뿐이다. 아우구스타나 스테판은 황후의 손발에 불과하니까.
설마 클라우제너에서 알아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황후는 그것을 알아낸 순간 이리스를 이용해 자신을 협박한 것이다.
전부터 요구하던 것을 가져오라고.
‘황후를 믿을 수는 없어. 하지만 클라우제너와 원한이 생긴 이상 다른 방법이 없어……!’
이리스를 살릴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
카탸는 이를 악물고 비밀통로를 통해 밤거리로 나섰다.
잠들었던 슈나이더 백작이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오후가 다 되어서의 일이다.
그는 자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곧바로 클라우제너 공작저로 향했다.
저택은 아주 고요했다. 공작 부부는 이미 신혼여행을 떠난 후라고 했다.
“나는 에리히 공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리나 양을 만나러 온 걸세.”
주인을 대신하여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막시밀리안에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막시밀리안은 철벽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무조건 리나 양의 마음을 가장 우선시하라는 게 공작 부인의 말씀이셨습니다.”
“내 방문 의사는 전해 준 건가? 말만 전해 주게. 잠깐 얼굴 보고 이야기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 줘.”
“백작님, 리나 양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 말을 슈나이더 백작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댁에 돌아가 얼굴을 씻고, 가족과도 이야기하고, 좀 더 정돈된 마음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지금 그런 상태로 만나셔도 좋은 대화가 되지 않을 겁니다.”
슈나이더 백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는 시뻘겋고, 얼굴도 초췌했다. 하루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듯한 얼굴에 막시밀리안이 그를 동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한 가지만 알려 주게.”
슈나이더 백작이 간절히 말했다.
“에리히 공은…… 이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리나 양이 이곳에 온 것은 오페라 극장 일이 있었던 다음 날의 일입니다. 제가 찾아서 데려왔으니 확실합니다.”
막시밀리안이 말을 이었다.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의 일입니다. 애당초 백작님과의 관계 때문에 저택에서 보호한 것이 아니라, 리나 양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갈 곳이 없다니?”
“극장에서 잡일 하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공작 부인을 구해 주었고, 그래서 공작 부인께서 은혜를 갚기 위해 저택에 모신 겁니다.”
“하녀……였다고?”
“여섯 살 때부터 극단의 잡역부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슈나이더 백작은 충격을 받아 휘청거렸다.
제 딸이 잡역부로 살아왔단 말인가?
그럴 거라고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평민이라도 유복하게 살았을 거라고 믿었다.
에반젤린은 성공한 가수였다. 유산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가. 어쩌다가.”
“돌아가십시오, 백작님. 마음이 정돈되면, 리나 양 쪽에서 먼저 소식을 전해 드리도록 말해 보겠습니다.”
“고맙, 고맙네.”
슈나이더 백작은 휘청거리면서 돌아섰다.
집에 돌아오자 불온한 공기가 퍼져 있었다.
“아버지, 늦으셨습니다.”
장남 로베르트가 현관까지 그를 마중 나왔다.
슈나이더 백작은 별일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실 쪽으로 향했다.
“카탸는?”
물어봐야 했다.
정말로 날 배신했느냐고. 아니, 배신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만일에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카탸는 처음부터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물어봐야 했다. 내 연인을 죽이고 내 딸을 버렸는지.
이리스는 누구의 딸인지.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지만, 17년이나 같이 살았던 아내다.
로베르트가 말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카탸 부인이 행방불명입니다. 어젯밤에 우는 이리스를 달래 준 게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아, 이리스.”
백작은 탄식했다. 이리스를 잊고 있었다. 어젯밤에 자신의 팔에 매달려 제발 돌아가자고 애원하던 것까지는 기억났는데.
그 애 얼굴을 어찌 봐야 좋을까.
“아버지, 제가 오늘 아침에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지금은 아무 말 말거라. 그 애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니? 여기 올 때 그 애는 여섯 살이었어.”
“아버지,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저희 가문을 욕되게 한 일입니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는 좀 쉬고 싶구나.”
슈나이더 백작은 힘겹게 말하고 침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빠.”
그때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슈나이더 백작은 걸음을 멈췄다.
“다녀, 다녀오셨어요?”
이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이리스는 연약하고 눈물 많은 아이였으니까.
전 같으면 달래 줬을 것이다.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이리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17년 기른 딸도 딸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리스를 어르고 눈물을 닦아 주고 안아 주고 지켜 주는 동안, 그의 딸은, 에반젤린이 낳은 그의 진짜 딸은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을 것이다.
고작해야 여섯 살 때부터. 극단의 잡역부로.
그걸 생각하면, 슈나이더 백작은 도저히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빠!”
이리스가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그 전에 로베르트가 막았다.
“아버지가 피곤하시다고 하는구나, 이리스.”
“오빠!”
이리스가 울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백작의 걸음을 두 번째로 멈춘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집사가 다급히 달려왔다.
“주인님, 경시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슈나이더 백작은 초췌하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집사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얼굴의 집사가 한 걸음 물러서자 그를 뒤따라온 손님이 한 발을 내디뎠다.
“특별 조사단에 파견되어 있는 바우스 경위입니다.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슈나이더 백작님.”
그가 모자를 들어 인사하고 말했다.
“백작 부인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뭐요?”
지칠 대로 지친 슈나이더 백작보다 로베르트가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바우스 경위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망 시각은 오늘 아침 7시로 추정됩니다. 수배자 토마스 보르얀스의 은신처에서, 치정싸움 중 살해된 것으로 보입니다.”
슈나이더 백작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돌아본 시선 끝에서 이리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이리스!”
그는 놀라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