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아우구스타가 보고했다.
“토마스 보르얀스와 서로 살해한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카탸가 보르얀스의 술병에 독을 탔고, 보르얀스는 홧김에 카탸를 죽인 후 술을 마시고 독살당한 것이지요.”
“사망 날짜에 차이가 있지 않나?”
“보르얀스의 시체를 공개하지 않고 보관 중이었습니다. 어차피 불을 질러 처리했으니, 부패 정도까지 구별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황후가 안경을 끼고 빛바랜 문서를 넘겨보면서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걸로 딸의 존속살인죄는 없는 거야. 고통 없이 보내 줬겠지?”
“예.”
“공적을 세웠으니까,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이리스도 어느 정도는 돌봐 줘. 슈나이더 백작이 기른 정을 팽개칠 위인은 못 되겠지만.”
“신경 쓰겠습니다.”
이것으로 오페라 극장의 사건은 종결지을 수 있다. 살아 있는 관련자는 모두 잔챙이에 불과하다.
“그보다 아우구스타, 이건 진짜로 좀 신경 쓰이는 일인데.”
그녀가 문서에서 고개를 들고 안경을 코 아래쪽으로 내리며 아우구스타를 바라보았다.
“제러드에게 애인이 있었던 건 짐작했던 일이지만 말이야.”
“예.”
“이걸 보면, 서명을 받았던 것 같아. 두 명에게. 마빈 슈나이더가 그중 하나였군.”
“두 명이요?”
아우구스타가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두 명에게 서명을 받는 것은 증인이 필요한 서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사업상의 서류일 리는 없다. 제러드 황태자는 당시에 겨우 스무 살이었고, 특별히 따로 운영하는 조직이나 사업이 없었다.
정치적인 계약이라면 기밀을 지킬, 신뢰할 만한 법률 고문의 서명을 증인으로 추가했을 것이다. 서기관 따위의 서명이 아니라.
“두 명에게 서명 받는 서류라면 유언장 아니면 결혼 계약서지. 스무 살짜리가 어느 쪽을 썼을지는 명백한 사실 아닌가?”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입니다. 장난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결혼 계약서가 너무 나간 이야기라면, 약혼은 어떨까? 문서로 남기는 경우도 있으니까.”
황후가 흥미로워하는 태도로 기록 중 한 줄을 읽었다.
“그 이름은 아렌의 전통 있는 귀족 가문으로서, 비록 신분은 매우 낮지만 계승법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대였다.”
아우구스타는 그것을 유심히 들었으나, 황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황후가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남방 아렌, 신분이 낮으나 전통 있는 가문으로 로멜-아렌 계승법상 아무 문제가 없는 상대. 최근에 이런 표현을 여러 차례 들어 보았는데.”
그제야 아우구스타가 숨을 들이켰다.
“클레어 델포드의 죽은 여동생은 출산 당시에 몇 살이었지?”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그게 5년 정도 전이지. 제러드가 죽은 해에는 스무 살이었겠군.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테지.”
“예.”
“제러드는 아카데미에 자주 드나들었지. 아렌 공왕이 시장에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나?”
“들었습니다.”
“좋아. 이제 좀 말이 되는군.”
황후가 안경을 벗고 나른하게 쿠션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에리히도, 남작도, 아이를 지나치게 숨기고 있어. 그 아이가 진짜 에리히의 아이라면, 장남으로서 클라우제너 공작가를 상속하게 될 텐데.”
“예.”
“이번 일도 그래. 어째서 하필 슈나이더 백작가의 딸 이야기를 결혼식 피로연에서 터뜨렸을까? 다이아몬드 때문에?”
황후는 고작 그런 일로 자신의 존재감을 죽인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으로 나서는 첫 번째 날이다. 더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러는 대신 대형 스캔들을 터뜨려 결혼식 이야기 자체를 묻어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결혼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아이의 입적 이야기지. 그걸 묻어 버리려고 한 일이라면, 솜씨가 무척 좋군.”
황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황후의 말처럼, 하루도 지나지 않아 클라우제너 공작의 결혼식은 완전히 화제에서 사라졌다.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조차도 슈나이더 백작가에 대해 소곤거리다가, 예의상 머물러야 할 시간을 채우고 흩어졌을 정도다.
신분 차이 나는 연애, 삼각관계, 불륜, 납치, 마약. 그 모든 게 다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생의 비밀만큼은 아니었다. 특히나, 혈통으로 규정되는 귀족의 아이가 바뀐 문제다.
지금까지 신문지상을 장식해 온 각종 스캔들에서 시선을 돌리고 우아하게 무시해 온 귀족들조차도 이 일에 반응했다.
“그러게 신원도 불분명한 가수 따위와 결혼했을 때부터 그럴 줄 알았지.”
“제 자식도 아닌 것을 애써 키운 셈이 됐군.”
“그나마 딸이라 슈나이더 백작가의 혈통이 어지럽혀지지는 않았어.”
“슈나이더 백작가 입장에서는 그렇죠. 하지만 만일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낳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지금까지 혼처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뭐예요?”
“이거 클라우제너 공작께서 현명하셨군.”
평민들 쪽의 반응은 혈통보다는 좀 더 개인에 치우쳐져 있었다.
“상냥하다 어쩐다 그런 평판이었지만, 저는 처음부터 좀 그랬어요. 그분이 웃으며 용서하고 지나간 뒤에 그 가문의 비서니 가정교사니 하는 사람이 와서 꼭 처벌은 할 대로 하고.”
“대체 자기네 아가씨가 뭐라고 하녀들까지 콧대 높아서 난리였잖아요.”
“엄격할 곳에서는 엄격해야 하는데, 오히려 좀 아무한테나 웃음 흘리고 다니는 게 품위 없는 느낌이 있더라니, 역시나 진짜 귀족이 아니었군.”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백작 부인이 어마어마한 요부로구먼. 친구가 죽은 걸 틈타 친구 딸과 제 딸을 바꿔서, 그걸 빌미로 백작가 안주인 자리를 차고앉다니.”
“그러고서 옛날 애인도 계속 만났다면서요. 옛날 애인도 아니지. 그쯤 되면 그쪽이 본남편이고 백작이 첩이지.”
“허어, 그러고 보니 그 옛날 애인이라는 게 실은 레이디 이리스의 친부 아닌가?”
“레이디는 무슨. 귀족 아니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떠들어 댔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불륜 상대와 동반 자살도 아니고 서로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자 비난은 더더욱 극심해졌다.
이제 오페라 극장에 숨어 있던 범죄조직에 대해서도 대부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 사건이 끌려 나오는 것은 오로지 백작 부인의 외도 상대가 악당이라는 사실이 언급될 때뿐이었다.
17년 전에 슈나이더 백작의 청탁으로, 처음부터 그의 아이를 임신한 애인이 카탸였던 것처럼 꾸몄던 신문들 역시 한꺼번에 옛이야기를 풀어 버렸기에, 이야깃거리가 모자랄 일은 없었다.
슈나이더 백작가는 참혹하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장남 로베르트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버렸고, 차남 아르민의 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백작은 카탸의 시신을 거두었으나 장례식을 정식으로 치르지는 않았다. 이리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시키고, 가묘가 아니라 교회 묘지 구석에 매장했다.
그다음에야 리나가 들어올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녀를 위해 새로 거처가 꾸며졌다. 해가 잘 드는 방에 아름다운 가구와 천으로 거실과 침실을 꾸미고, 커다란 드레스룸을 만들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보낸 선물 상자가 저택 로비를 메울 지경이었다. 옷가지와 양산 같은 소품만이 아니라 보석도 있었다.
빌헬름이 직접 다이아몬드 장신구 수십 상자를 들고 방문했다. 이리스가 목에 걸었을 때, 백작가의 가산으로는 살 수도 없다고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물건들이었다.
“아, 그냥 필요할 때 제가 공작저로 가지러 가도 괜찮은데요.”
“공작 부인의 뜻이십니다. 축하 선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너무 큰 액수라서…….”
“투자에는 손이 큰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리나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보관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슈나이더 백작가의 보안에 문제가 없다면, 몇 개는 잘 보이는 곳에 장식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았어요.”
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이제부터 지내 봐야 알겠죠. 빌헬름 님도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하고, 클레어 님께도 감사해요.”
빌헬름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백작은 잘못하면 깨지는 유리를 보듯이 리나를 조심스럽고 사랑스럽게 대했다. 집에 남아 있는 두 아들도 그랬다.
아침 식탁에서 백작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무엇이든 불편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려무나. 음악실도 하나 따로 만드는 것이 좋을까? 이제 곧 다가올 봉헌 축일의 독창을 생각하면, 혼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이 좋을 수도 있으니…….”
슈나이더 백작가의 음악실이 지금까지 이리스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었다.
둘이 한 공간을 나누어 쓰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겠다 싶어 염려했다. 그렇다고 이리스에게 나가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는 이리스를 내치지는 못했다.
카탸에게 아무리 화가 나고 용서할 수 없어도, 이리스는 17년 동안 자기 손으로 키운 딸이었다.
[카탸가 잘못한 거지, 그 애가 무슨 죄겠니? 제 엄마 손 잡고 와서 나를 아빠로 알았다는 것밖엔.]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들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혼 소송을 앞둔 로베르트는 퍽 싸늘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치는 게 옳습니다.]
[그것도 이리스가 한 짓은 아니지 않니. 전부 카탸가 제 욕심에 벌인 짓이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딱 잘라서 잘잘못을 가리겠습니까? 이리스의 친어미가 한 짓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