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4/263)

85화

[지금까지 났던 사교계의 헛된 소문만으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인데, 이리스는 실제로 공작 부인께 감히 할 수 없는 폭언을 하고 손까지 휘두른 적이 있습니다.]

로베르트는 냉엄하게 제안했다.

[당장 집에서 쫓아내라고까지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만, 폐적하고 어디 멀리 보내기라도 해야죠.]

아르민도 그것에 동의했다.

[설마 리나와 한집에서 살게 하시려고요? 아버지는 이제 리나 생각을 하셔야지요.]

[리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왜 없겠니. 하지만 이리스도 내 딸이다.]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 이리스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못내 괴로운 듯 이리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전 같으면 늘 챙겨 주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다정하게 웃고, 팔짱을 끼고 조르면 무엇이라도 들어주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은 리나의 것이었다. 그는 겨우 되찾은 딸이 자신을 불편하게 여길까 봐 염려하면서도 조금씩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리나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음악실을 두 개나 만드는 것은 낭비일 것 같아요. 사용할 시간이 겹치면, 제가 클라우제너로 가면 돼요. 공작 부인께서 아무 때나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어요.”

“말도 안 된다, 리나.”

로베르트가 물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이 집은 네 집이야. 네가 자리를 피해 주다니, 말도 안 된다.”

“전 클라우제너가 더 편해요. 이곳보다 아직 그곳에 있었던 날이 더 기니까요.”

리나는 로베르트의 말에도 별달리 기뻐하지 않았다. 백작이 말했다.

“그래. 네가 편한 대로 하려무나. 우리 집이 더 집처럼 느껴지도록, 아빠가 노력하마.”

“고맙습니다, 백작님.”

그런 대화가 오가는 식탁에서 이리스는 조용히 먼저 일어섰다. 아무도 잡지 않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복도에서 하녀장이 다른 하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녀장이 말했다.

“곤란해, 밀리.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겠다니.”

“저는 슈나이더 백작가 아가씨의 하녀가 되려고 이 집에 온 거지, 사기꾼 가짜를 모시려던 게 아니에요.”

“마음은 이해해. 밖에서 하도 난리니, 힘들 거야. 나도 그렇고. 하지만 그만둬도 절차라는 게 있잖아.”

“그러면 차라리 세탁실로 보내 주세요.”

“너처럼 말하는 애가 지금 하나둘이 아니야. 곤란해.”

“요한나는 주방으로 보내 주셨잖아요.”

“이렇게 하자. 새 사람 구할 때까지만 있어. 그러면 접객 하녀 자리로 옮겨 줄게. 집사님이 급료를 10퍼센트씩 더 준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밀리라는 하녀가 완강하게 말했다.

“하녀장님 처지는 이해해요. 집사님도 난처하실 테고, 주인님이 정말 마음 아프실 것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저보다도 못한 여자애한테 굽실거릴 순 없잖아요?”

“밀리!”

“제가 틀린 말 했나요? 귀족도 아니잖아요.”

“양녀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어미가 속여서 데리고 들어온 남의 씨앗이 양녀랑 어떻게 같아요? 게다가 보나 마나 더러운 사생아일 텐데요.”

사실 밀리 하나가 아니었다. 이리스의 하녀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일을 그만둬 버렸다.

하녀장은 당황하며 갑자기 이러면 소개장을 써 줄 수 없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잡을 수가 없었다.

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두 사람이 집사를 보러 가겠다고 자리를 옮길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비참했다. 이렇게 하녀들이 사라져 버려서, 늘 신선한 꽃이 가득하던 그녀의 방은 이제 청소조차 잘 되지 않은 곳이 여기저기 있었다.

뒤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남의 대화를 훔쳐 듣는 취미가 있으셨군요.”

이리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리나였다.

이리스는 왼손으로 오른손 소맷자락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이라도 쥐고 싶었지만, 그런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리나가 그 손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천천히 말했다.

“의외네요, 이리스 님.”

“뭐가…… 뭐가 말이야?”

“제 뺨을 때리실 줄 알았거든요. 클레어 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클레어의 이름에 반응하는 것처럼 이리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홱 고개를 들었다.

리나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울지도 않으시고.”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눈물이 많은 분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이리스 님은 아름답게 우는 분이시잖아요. 무대에서도 여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해서 곧잘 우셨고.”

“…….”

“서운한 일이 있으셔도 눈물을 잘 흘리셨죠. 전 수도의 오페라 극장에서 일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리스 님이 우시는 걸 몇 번이나 본 적 있어요.”

리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울어서 이득이 생기지 않으면 울지 않으시나 봐요.”

“내가……!”

이리스는 언성을 높이려 했지만, 울분이 목구멍까지 꽉 차서 그러지 못했다.

“미운 여자하고만 있을 때는 소리도 지르시고, 화도 내시고. 천사 같은 이리스 님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이 이상 나한테서 뭘 뺏고 싶은 거야?”

이리스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항의했다. 리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리스 님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아버지요? 그건 이리스 님이 제게서 도둑질하셨던 거잖아요.”

“아빠는…… 아빠는,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해!”

“클라우제너 공작님은 본래부터 클레어 님의 것이었어요. 이리스 님이야말로 그걸 훔치려다가 사달을 낸 거잖아요.”

이리스의 안색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클레어를 만나기 전까지, 리나는 공작이 진짜로 이리스의 연인인 줄만 알았다.

오페라 극장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공작에게서 꽃과 선물이 오곤 했으니까.

“나, 난, 그런 적…….”

“없으시다고요? 아, 하긴. 꽃과 선물을 공작님이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으시죠. 행복한 얼굴로 꽃다발을 안고 공작님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리나는 얼어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도 거짓말이에요. 모르셨어요?”

그런 사람일 줄,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과거에 리나는 이리스를 동경하고 있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걸 가진 사람, 자신이 꿈꾸던 모든 걸 가진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용모가 아니라, 사랑받으며 사는 삶이.

꿈을 죽이고 현실을 되새기며 하루하루 애써 살아 나가는 게 아니라, 고운 구두를 신고 구름 위를 춤추며 걷는 듯이 사는 그 삶이 아름다워 사람까지도 천사가 될 수 있는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 삶이 제 것을 훔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훔친 삶으로 하는 일이 클레어를 해치는 일이었다.

이리스가 클레어의 뺨을 때렸을 때 리나는 진짜로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아는 레이디 이리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화내지 않고, 잘 웃고, 하녀들에게도 상냥했다. 사람들이 천사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클레어 님을 위해서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그냥 놔두면, 그녀와 공작에 대해서 또 무슨 소문을 퍼뜨릴 줄 누가 알겠는가?

리나는 그래서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대신 슈나이더 백작가에 들어왔다. 이리스가 클레어에게 수작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백작에 대한 정은 놀랄 만큼 없었다. 언젠가는 정이 들고 가족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이리스가 횡포를 부리도록 놔둔 아버지였다고 생각하면 좋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둑.”

“아니야!”

이리스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도둑은 너잖아! 내 아빠고, 내 오빤데! 네가 훔쳐 갔어! 내 자리도! 내 사람들도!”

“제가 돌려받은 건 슈나이더 백작 영애라는 자리뿐이에요. 이리스 님에게는 그게 아니면 남는 게 없나 봐요.”

“바닥 청소나 하면서 살던 주제에! 내가 진짜야!! 내가 숙녀고, 내가 이리스 슈나이더야!”

그녀가 울부짖으며 리나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힘없는 귀부인의 손아귀 힘 따위, 수월하게 뿌리칠 수 있었지만 리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이리스와 달리 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리스를 발견했으니, 뒤따라 나올 백작도 그녀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랬다.

“리나!”

아르민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바닥을 구르는 둘을 떼어 놓았다. 백작도 경악하여 달려왔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냐, 이리스!”

“리나, 괜찮니? 세상에, 목에 자국 남은 것 좀 봐.”

“이리스! 너 감히!”

백작과 두 아들이 리나를 감쌌다.

이리스는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울먹거리면서 애처롭게 세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 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리나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그리고 목을 가볍게 감싸 쥐고 말했다.

“전 괜찮아요.”

“괜찮다니! 너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았니? 어디 상처 좀 보자.”

“이리스!”

“왜,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이리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 질렀다.

“걔가 절 도둑이라고 불렀는데요! 아빠, 아빠는 제 편이어야 하잖아요! 언제나 이리스 편이라고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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