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5/263)

86화

“그만해라, 이리스.”

슈나이더 백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리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선고했다.

“나는 너희 둘이…… 친자매처럼 지내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만, 그래도 서로 외면하면서라도 한 식구로서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안 되겠구나.”

“아빠……!”

“이리스, 너는 영지로 내려가거라.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말이 많이 돌고 있으니 듣지 말고, 한동안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쉬는 게 좋겠다.”

“절…… 버리시는 거예요?”

이리스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졌다.

슈나이더 백작은 그 얼굴을 외면했다. 로베르트가 대신 이리스의 앞을 가로막듯이 하며 말했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거라. 내가 바래다주마.”

“진짜로 절 버리시는 거네요. 아빠도, 오빠도. 제가 아빠 딸이 아니니까.”

이리스는 울며 흐느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슈나이더 영지의 오래된 저택으로 출발한 것은 바로 그날 낮 중이었다.

배웅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리스는 백작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싶어 마차에 타기 전에 몇 번이나 저택 창문을 올려다보았으나, 하필 해가 내리쬐어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마차는 한 대뿐이었다. 피서를 갈 때도 항상 짐마차가 두 대씩은 따라왔는데 말이다.

[짐을 정리해서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지로 연락 주십시오, 작은 아가씨.]

집사는 그렇게 말했다.

작은 아가씨라는 말이 또 서러워 이리스는 한참 울었다. 슈나이더 백작가의 아가씨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래야 되는데.

쫓겨나듯이 이렇게 가방 하나만 들고 마차에 타게 되다니.

‘엄마, 미안해요. 엄마.’

이리스는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울먹였다.

엄마가 꼭 붙어 있으라고 했는데, 자신은 그것도 하지 못했다.

마차는 기차역에 멈춰 섰다. 마부가 차표를 사 오겠다며 사라지고, 그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감시역으로 따라온 하녀도 소다수를 사 오겠다고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누군가가 마차 문을 열고 훌쩍 올라탔다.

“헉……!”

멍하게 정신을 반쯤 놓고 있던 이리스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올라탄 것은 스테판이었다.

“스테판!”

이리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스테판이 장난스러운 태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얼굴이 엉망이군요, 이리스 양. 화장도 하지 않았고.”

“또…… 또, 무슨 용건이야?”

이리스는 벌벌 떨면서 마차 구석으로 웅크려 들었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의 인과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토마스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엄마가 그렇게 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라면 어떻게든 해 줬을 것이다.

스테판이 말했다.

“그냥, 한번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리스 양에게 재기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보르얀스한테 한 짓도 그렇고, 가끔은 굉장히 대범한 일도 할 줄 아니까.”

“그런 게, 왜 궁금해?”

“능력이 있다면, 죽여 둘까 해서요.”

스테판이 태연하게 말했다.

지난번에 그가 마차에 올라탔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이리스는 혐오감과 황당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리스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가까이 알고 있었다. 살인이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도.

그녀는 겁을 집어먹었다.

“염려 마십시오. 이리스 양이 그저 어린애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벌레 다리 떼듯 손쉽게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 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자는 스스로 재기할 수 없다.

아리따운 용모와 목소리는 이미 클레어 델포드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놨으니, 내버려 두어도 될 것이다.

스테판은 마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이리스가 그의 옷자락을 황급히 잡았다.

“왜, 왜 그랬어?”

“뭘 말입니까?”

“네가 한 짓이잖아? 내가 아버지를 죽이게 만들어서, 엄마가 그 책임을 지게 만들어서, 그래서……!”

“자기가 죽이고서, 내게 책임을 돌리는 겁니까?”

“목적이 있어서 나한테 주소를 알려 줬던 거잖아……!”

스테판이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그렇긴 하죠. 글쎄요, 목적이 뭘까요? 지금 원하는 결과를 얻어서 제가 이렇게 조용히 꺼지려는 게 아닐까요?”

“리나 때문에……?”

이리스가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스테판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22. 북부로 가는 길

덜컹덜컹!

기차가 흔들렸다. 거의 창틀에 매달려 있다시피 했던 엘리엇이 뒤로 홱 넘어갈 뻔했다.

“앗!”

“조심해야지.”

그 전에 에리히의 손이 엘리엇의 동그란 뒤통수를 받쳤다. 엘리엇이 헤헤 웃었다.

“고맙습니다.”

“발을 바닥에 대고.”

“그치만! 그러면 꼭대기밖에 안 보여요!”

엘리엇이 두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클레어는 엘리엇이 가리키는 방향을 내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이 멀리 보였는데, 벌써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점토로 만든 산을 칼로 탁 베어 낸 듯 날카로운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고, 기차는 능선을 돌며 그 사이를 빠져나가듯 달렸다.

남부의 지평선을 보고 자라 온 엘리엇에게는 신기하고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사실 클레어에게도 좀 그랬다.

생각보다 제대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길이 잘 뚫려 있네요. 옛날에는 클라우제너도 엄청 벽지 취급이었죠?”

“수백 년 전의 일이야. 로텐부르크 인근의 영지를 얻은 뒤로는 아무래도 그쪽이 중심 지역이 되었지.”

“클라우제너의 철광이 옛날부터 유명했다지만, 산지가 이래서는 실어 나르는 것도 큰일이었겠죠.”

“터널을 뚫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여러 가지가 변했지.”

“아저씨, 아저씨. 철광이면 그거죠? 쾅쾅! 푸슈우욱!”

엘리엇이 망치질 소리와 담금질을 흉내 냈다. 클레어가 웃었다. 엘리엇은 전통식 대장간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맞아.”

“그런데 엘리엇, 약속은?”

에리히가 엄숙한 목소리로 엘리엇을 불렀다. 그가 무슨 주의를 줄지 알아챈 엘리엇이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가리고 빨개져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표정을 풀지 않고 엘리엇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엘리엇이 도움을 청하듯이 클레어를 바라보았지만, 클레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쳐다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에리히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도 약속을 지켜야 했다.

“아, 아빠!”

불러 놓고 엘리엇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엘리엇이 보지도 않고 문밖으로 뛰쳐나가려는데, VIP 객실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앗!”

“아.”

엘리엇이 뒤로 튕겨 나가 넘어졌다.

“흐아아앙!”

엉덩방아를 찧은 엘리엇이 울음을 터뜨렸다. 상대가 황급히 몸을 구부리며 엘리엇을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뒤에서 이제 익숙해진 손이 뻗어 와 엘리엇을 훌쩍 안아 들었다.

“으흐윽, 으아앙.”

“어디 보자. 다친 곳은 없는데.”

에리히가 엘리엇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클레어가 꾸짖었다.

“앞을 보지 않고 달려가면 안 돼, 엘리엇.”

“이 앞에 서 있었던 제 잘못입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요한 크로지크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에리히는 언짢은 기분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신혼여행을 가는데 어째서 이런 혹이 붙는 건가.

물론 이 기차 전체가 클라우제너 가문 전용은 아니었다. 그의 소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에리히는 어딜 가든 공간을 독점하려는 성향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기차 같은 것은 귀중한 공용 자원이다. 짐과 사람을 많이 끌고 다니는 성향도 아니라 그냥 차량 한 칸 정도를 전용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놈이 탈 줄 알았다면, 객실 칸을 전부 비우게 했을 것이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클레어가 물었다. 요한이 에리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난번 역에 소식이 와 있었습니다.”

“아, 고마워. 이렇게 빠르게?”

“기차역에는 전서구가 있으니까.”

에리히가 말했다. 그리고 요한을 향해 말했다.

“경은 우연히 귀향하는 길에 우리와 같은 기차에 탄 것으로 아는데.”

“아, 예. 그렇습니다.”

“한 사람에게 인사를 받으면 다른 승객들의 인사도 모두 받아 줘야 해. 물러가게.”

“너무 그러지 말아요. 내 용건 때문에 온 건데.”

클레어가 쪽지를 훑어 읽으며 역성을 들어 주었으나 요한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실례했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물러갔다. 애초부터 객실 문을 못 열고 그 앞에 서 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에리히에게 확실히 눈도장이 찍혔기 때문이다. 나쁜 방향으로.

‘루이자 님 옆에 있을 때는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겠더니.’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직접적인 견제를 받은 적은 없지만, 괜히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견제할 건 자신이 아닐 텐데. 많이 있지 않은가. 자신은 전 약혼자도, 정부 지망자도 아니다.

클레어는 그의 외모를 높이 평가했으나, 가치 환산을 매력이 아니라 돈으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황후와 비슷했다. 써먹을 수 있겠다는 것 이상의 생각이 없었으니까.

황후와 달리 실제로 써먹으려 들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것이 고마워야 마땅할 텐데, 어쩐지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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