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6/263)

87화

요한이 가고 나자 클레어가 쪽지를 곱게 반으로 접어 책에 끼워 놓았다. 도착하고 나면 숙소에서 화로에 집어넣을 작정이었다.

“무슨 소식인데 그렇게 급해?”

“딱히 급한 소식은 아니에요.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죽었다는군요.”

“……그렇군.”

“자세한 정황은 제대로 된 연락을 받아 봐야 알겠지만, 아마 황후가…….”

클레어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엘리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엇이 에리히의 뺨을 밀듯이 두 손으로 잡고 물었다.

“있잖아요, 누가 죽었어요?”

“아빠가 아는 사람 이야기야.”

“그렇구나.”

엘리엇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늘 들어왔기 때문에, 그게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늘나라에서 분명히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예요!”

아이에게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에리히는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클레어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 일에 깊이 관여한 만큼 이런저런 고민도 많을 것 같아, 에리히는 엘리엇을 안은 채 복도로 나왔다.

“우리 어디 가요?”

“바람 쐬러.”

엘리엇의 얼굴이 기쁨으로 반짝 물들었다. 에리히가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리히는 차량 연결부 문 쪽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가 물러나 문을 열었다.

강풍이 복도로 쏟아지며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치, 나한텐 안 열어 줬는데.”

엘리엇이 종알거렸다. 에리히는 아이를 안은 채 밖으로 나와 승강대에 섰다.

“너 혼자 나오기는 너무 위험하지.”

“와아아아!!”

엘리엇은 이미 에리히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환호하는 아이의 뺨이 찬 바람에 사과색으로 물들었다. 소리가 바람 때문에 떨리듯이 울리는 게 재미있는지 엘리엇이 연거푸 고함을 질렀다.

“산이 달려와요! 와아아!!”

양옆으로 산이 높아, 마치 산 속으로 뛰어들어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리히는 팔을 휘두르는 엘리엇을 좀 더 단단히 안았다가 높이 들어 올려 주었다. 산 그림자가 엘리엇과 그를 훑듯이 스쳐, 어두워졌다가 다시 빛 속으로 뛰쳐나가듯 환해졌다.

그때마다 엘리엇이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에리히를 돌아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이거 다 아빠 거예요? 진짜로? 진짜?”

사재와는 약간 의미가 다르지만, 이미 클라우제너 영지의 경계선을 넘었으므로, 눈에 닿는 산과 땅은 물론 기차까지 전부 그의 것이긴 했다.

에리히는 그런 것을 자랑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토지도, 재산도, 가업도, 모두 손발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엇이 눈을 반짝거리며 환호하는 것은 어른들이 말하는 자부심이나 찬사와는 다른 의미이다.

아마 그가 놀랄 만큼 큰 바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엘리엇은 똑같은 얼굴로 감탄할 것이다.

그것이 어쩐지 흐뭇해서 에리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진짜로.”

“와, 대단해! 진짜 대단해요!!”

엘리엇이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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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때 클레어는 두 번째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칼에 흑갈색 눈동자를 가진 우아한 용모의 남자였다. 키가 크고 피부가 창백했으나 결코 허약해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차량 앞뒤로 호위가 지키고 있는 걸로 아는데, 무척 태만한 모양이에요. 어떻게 들어오셨지요, 루덴도르프 공자?”

“부인께서 주신 초대장을 가지고 있는데, 당연히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클레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차 전세 내자고 할걸.’

에리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도 이런 식으로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편지를 받고 사흘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매불망하던 레이디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덴도르프 후작의 장남, 헤르만은 빙긋 웃으며 클레어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클레어는 그를 노려보았다.

“한번 만나 뵙자고 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일의 이야기를 한 것이지 신혼여행을 가는 기차 안에서 뵙자고 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보안을 지킬 수 있는 때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랬다. 요한이 굳이 같은 기차를 탄 것도 그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부친의 명령을 받아 다이아몬드 광산을 시찰하러 가는 길이었다.

실상은 클레어를 따라온 것이지만 말이다. 루덴도르프와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헤르만이 오해한 것도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클레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오해할 만하다는 것과 용납할 수 있는 일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었다.

“결혼한 지 사흘밖에 안 되는 새신부를, 굳이 남편이 없는 사이에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작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걸 알고 넘어온 것은 아닙니다. 일부러 그럴 능력도 없고요.”

그러면서 헤르만이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간단히 이야기하죠. 호르스트 경을 밀어낼 기회가 있다면, 잡으시겠어요?”

“…….”

헤르만이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루덴도르프 후작가는 로멜의 고위 귀족 중에서도 그렇게 유력한 세력은 아니었다. 사실 후작가라는 이름이 붙은 많은 가문들이 그랬다.

한때는 황실의 견제를 받을 만한 고위 귀족이었으나, 대부분은 결국 고꾸라졌다. 후작이라는 작위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클라우제너나 에른스트처럼 혈통이 보장하는 권력이 드높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벗어던지고 구태를 벗어 내며 앞장서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방식으로 힘을 획득하지도 못했다.

그대로 있었다면, 벨프 후작가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을 하다가 몰락하거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소 규모의 지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선대 후작의 장녀 아우구스타가 황후의 시녀가 되지 않았다면.

‘로멜 귀족의 혈통을 중요시하는…… 적어도 그런 것처럼 행세해서 로멜 귀족의 지지를 모으고 있는 황후에게는 딱 적절한 가문이었지.’

아우구스타 본인의 유능함이 가장 중요하긴 했을 테지만, 황후가 루덴도르프 후작가를 밀어주고 있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루덴도르프 후작가는 재기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가문의 이익이 꼭 가문 구성원에게도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헤르만은 장남인데도 후계자 자리를 잃었다. 어려서 잃은 모친이 아렌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로멜 귀족 출신의 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호르스트에게 모든 권리를 주었다.

현재 헤르만은 사실상 가문 내에서 붕 뜬 존재였다. 루덴도르프 후작 부부는 스물아홉이나 된 장남의 혼처조차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클레어가 호르스트를 밀어낼 용의가 있느냐고 물은 것은 그런 배경에서 한 말이다.

헤르만의 손이 허공을 훑었다. 예술가의 손처럼 하얗고 긴, 아름다운 손이었다.

“아렌인치고는 무척 직설적이시군요.”

“확실하게 줄 수 있는 이익이 있는 상황이에요. 아쉬운 것은 공자 쪽이고요. 공자가 거절한다면 그냥 그뿐이에요.”

굳이 빙빙 돌려 가며 상대의 비위를 맞춰 설득할 필요가 없다. 헤르만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협상하며 맞출 마음도 없었다.

그냥 거래하기 적절한 상대였을 뿐이지, 이쪽에서 아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은 헤르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아쉽다는 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어쩌면 저는 그냥 욕심 없이, 부유한 집안의 한량으로 동생에게 용돈이나 타 쓰면서 살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용돈 타 쓰면서 한가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수도에 머물면서 유력자들과 친분을 쌓지 않아요. 제가 바로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 잘 알죠.”

헤르만이 크게 웃었다. 클레어는 또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그가 자신의 말을 웃어넘겼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 그런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 게 맞아요.”

“예.”

클레어는 다시 맞다고 대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았다. 대신 한쪽 눈썹만 치켜들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대답은 뭔가요?”

“제가 절박한 상황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시면서 놀리시는군요.”

“한량으로 살고 싶으시다더니.”

헤르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헛된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인께서 편지에 쓰신 것처럼, 욕심과 미움은 풀어낼 수 있어도, 억울함은 그렇지가 않더군요.”

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달려온 것은 그 말 때문이었다.

헤르만은 자신이 부족하지 않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레어에게 말한 것처럼 부유한 집의 부족한 것 없는 한량으로 편안히 살아왔다. 하지만 열여섯 살까지 그는 가문의 후계자였고, 하루아침에 그것을 빼앗겼으니까.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아마도, 루덴도르프 후작가에서 억울함을 느끼고 있는 건 공자만이 아닐 거예요.”

클레어는 찬찬히 말했다. 그리고 헤르만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제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하지만 이미 겪어 봐서 아시겠지만, 본디 억울함이라는 건 절대적으로 가진 게 없을 때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황후 폐하께서 던져 주신 어업 항구에 만족하고 있나요?”

헤르만은 숨을 훅 들이켰다.

그렇지가 않았다. 가족인 만큼 헤르만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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