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7/263)

88화

에리히가 차량 안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신나서 소리를 질러 대던 엘리엇이 켁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사가 타고 있는 객실의 문을 두드렸다. 마음의 깊이와 별개로, 아이 보는 일에는 이 차량의 그 누구보다도 마사가 믿음직했다.

“마사, 콜록.”

“아이구. 도련님 소리 지르시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라니.”

마사가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이 가득 든 바구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주석잔에 생강물을 담아 엘리엇의 입에 대어 주었다.

“으, 시러…….”

“목 아플 때 좋은 거예요. 아이, 한 모금만 더.”

“시러어어…….”

불평하면서도 엘리엇은 주는 대로 꼴깍꼴깍 잘도 받아 마셨다.

“잘하셨어요. 자!”

한 컵을 다 마시고 나자 꿀에 절인 레몬이 나왔다. 그걸 입에 물고 엘리엇은 바로 조용해졌다.

에리히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사가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은 제가 볼 테니, 주인님께 가 보세요.”

“나 조려어.”

엘리엇이 입에 레몬을 문 채 웅얼거리다가 떨어뜨렸다. 마사가 엘리엇을 안고 등을 두드렸다.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객실에서 나오다가 복도에서 헤르만과 마주쳤다.

“……루덴도르프 경.”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헤르만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에리히는 문득 눈을 들어 복도 끝에 서 있는 호위를 한번 보고, 헤르만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운행 중인 열차의 차량을 넘어 내 아내를 만나러 오는 걸,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각하를 단독으로 뵐 수 있는 기회가 저 같은 자에게 흔히 오는 것이 아니라서 틈을 노렸는데, 때가 좋지 않아 공작 부인께만 인사를 드렸습니다.”

에리히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것치고는, 내게는 할 말이 없어서 꽁무니를 빼려는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인사를 드렸으니 이만 만족하고 물러갈까 합니다.”

헤르만이 싱글거렸다.

“북부를 여행할 예정이시라면, 루덴도르프에도 꼭 들러 주십시오. 공작 부인께서도 북해가 궁금하다고 하시더군요.”

에리히는 이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헤르만은 침착하게 미소한 채 다시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객실 문을 열자 클레어가 객실 의자에 상반신을 옆으로 쓰러뜨리고 누워 있었다.

“날파리가 많더군.”

“미리 변명하는 건데, 내가 부른 거 절대 아니에요.”

“또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한 게 아니라?”

에리히는 허리에 손을 얹고 클레어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시작하려던 건 아니에요. 신혼 휴가는 나한테도 귀중하다고요.”

편지를 보내 놓고 여행 가서 놀고 있으면, 저쪽에서도 생각할 거 다 하고, 정리할 것도 하고, 정치적 고려라든가 기타 등등도 하고, 그다음 기차를 타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남이 신혼여행 가는데 같은 열차를 타서, 도착도 하기 전에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네가 불평할 계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하게 해 줘요. 남편이 직장 불평도 안 들어 주면 결혼을 왜 해?”

클레어는 투덜거리면서 에리히의 베스트 밑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허리춤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옆에 앉힌 다음 털썩 쓰러져 탄탄한 허벅지를 베었다.

“어이가 없군.”

“뭐래. 인장 반지 끼워 주면서 죽도록 일하라던 사람이.”

“죽도록 일하라고 하지는 않았어.”

“하면 죽을 만큼의 양이 있는 걸 알면서 누워 있었잖아요.”

에리히는 피식 웃었다.

“잘 쉬긴 했지. 네 뜻대로.”

“아, 진짜.”

클레어가 불평했다.

에리히의 손이 그녀의 눈가를 덮었다. 안 그래도 창으로 들어오는 해가 점점 길어지던 참이라 클레어는 금세 편안해졌다.

“엘리엇은요?”

“마사에게 안겨서 잠들었어.”

“소리 지르는 게 여기까지 들리더라고요.”

가끔은 그런 기회가 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엘리엇이 너무 착한 아이인 게 클레어에게는 가끔 마음 아팠다.

클레어가 이번에는 에리히의 손을 끌어당겨 그것을 베개처럼 베었다.

“그래서, 루덴도르프를 어쩔 작정이야?”

“지금 거기에 어업항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항구가 있잖아요?”

“그렇지.”

“항구 건설을 위해서 자재를 실어 오는 것도 대부분 바다로 올 거고.”

“비중이 꽤 높겠지. 아마 자재는 클라우제너에서 보내는 게 더 많을 테지만, 식량이나 다른 필수품은 남부에서 가져오는 게 더 쌀 테니.”

철도도 놓고 있지만, 아직 미완성이었다.

“선주 연합과 보험이 있겠죠. 루덴도르프에는 아직 잘 형성되지 않았어도, 적어도 보내는 쪽에서는.”

“그렇겠지.”

“그리고 내 경험에 따르면, 경제관념이 없는 사람은 비상금을 위기 대비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쌈짓돈이라고 생각하죠. 그런 사람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보여 주면, 순식간에 주머니를 털어요.”

에리히의 손가락이 클레어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가 뺨을 더듬었다.

“후작에게 보험업을 권할 셈인가? 횡령할 것을 기대하면서? 후작령의 항구에 들어오는 선주들에게 의무 가입을 시키면 볼 만한 꼴이 되겠군.”

“더군다나 귀족이잖아요. 평민의 위기 대비 따위 알 바겠어요? 아무 일도 없으면, 큰돈이 그냥 자기 금고에 잠들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다가 진짜로 사고가 터지면, 그 선원에게는 네 사재로 보상할 생각인가?”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서면 곤란하니까, 재보험을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빅토리아 대공 전하를 모셔 볼까 했지만, 편지가 오가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클레어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에리히의 손이 입술을 가볍게 꼬집듯이 만졌다.

“수도 상황이 궁금하네요.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죽었다면, 황후 쪽 방침도 뭔가 달라졌을 텐데.”

“클라우제너에 도착하면 더 자세한 소식을 알 수 있을 거야. 전보가 있으니까.”

“아 참, 클라우제너에는 전신이 있죠.”

클레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질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부럽네. 진짜 부럽네. 나는 그렇게 미친 듯이 로비를 퍼부었어도 안 해 주던데.”

“전략 자원 중심으로 설비한 거야.”

“아, 전략 자원 중에 제일 중요한 건 식량 아니에요? 왜 밀 농장 무시해.”

“델포드의 밀 농장을 밀어 버린 건 너잖나.”

“어쨌든 남쪽 끝인데, 전신 안 주잖아요.”

북쪽에도 에른스트와 클라우제너에만 설비된 것이었으나, 차별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에리히는 그냥 고개만 저었다.

클레어가 투덜거렸다.

“최초의 고속도로는 무조건 내 거야. 아, 근데 아스팔트로 도로 포장하면 또 클라우제너가 이득이네.”

무슨 짓을 해도 유전 주인을 이길 수가 없다. 클레어는 과장된 자세로 널브러졌다.

“이제 클라우제너가 네 것이라는 걸 좀 인정하지?”

“알 게 뭐예요? 내 명의가 아닌 건 내 재산이 아니죠.”

“그럼 로비를 다시 해 보는 걸 추천하고 싶군.”

클레어가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에리히의 손을 치워 내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와줄래요?”

“적절한 로비 상대가 누구인지 아직도 이해 못 한 건가?”

에리히가 희미하게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클레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자존심이 상하는데.”

“하원 의원들에게 돈을 뿌리며 로비를 하는 것보다 나한테 부탁하는 게 더 자존심 상하나?”

“으음.”

그것도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클레어는 일어서서 에리히의 앞에 섰다. 그리고 검지로 그의 턱을 치켜들었다. 에리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쥐었다.

“부탁하는 것보다, 빌게 하고 싶은데?”

“누가 누구한테 빌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에리히가 한 손을 뻗어서 객실 문에 달린 커튼을 내렸다.

덜컹덜컹 차량이 흔들렸다. 잠시 긴장감 어린 침묵이 돌았다.

클레어가 몸을 구부려서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닿기 전에 에리히의 입술은 이미 열려 있었다.

손을 잡히기 전에 클레어는 그의 목깃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크라바트가 느슨해지도록 벌리고 목젖 위를 그었다.

다시 차량이 덜컹거리는 바람에 흔들려서, 그녀는 무릎으로 에리히의 다리 사이를 짚고 버텼다.

“클레어.”

무릎만 맞닿은 채로 입술 사이에서 부르는 이름이 울림을 만들었다. 에리히가 초조한 듯 눈을 살짝 찡그렸다.

클레어는 그의 머리칼 사이로 두 손가락을 집어넣어 흐트러뜨리며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잘생긴 콧날 위에 입술을 눌렀다.

“아직도 고민 중인가?”

“빌 생각이면 고민 따윈 안 하죠.”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에리히가 짧게 신음했다. 클레어가 그의 두 뺨을 잡아당기듯 하며 말했다.

“부탁해 보세요.”

“…….”

“아내에게 사랑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에요?”

클레어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에리히는 뺨을 감싼 클레어의 손을 쳐 내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자존심이 상해서, 긴장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작은 공방전 끝에 클레어가 결국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에리히는 그녀의 머리를 풀어 헤쳐 뒤통수부터 제 쪽으로 끌어 내리며 부드러운 입술을 깊게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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