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23. 눈이 내리는 도시
기착지마다 훌쩍훌쩍 시간을 건너뛰듯 가을이 깊어지더니, 목표였던 바덴 성에 도착할 무렵부터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내리고 있다.
“오오아아아……!”
엘리엇이 창문에 달라붙어 입을 오므렸다 크게 벌렸다 하면서 김을 서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거기에 눈사람을 그렸다.
“이모! 이모! 나 눈싸움!”
“으음.”
벽난로 앞에 토끼털 모포를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앉아 있던 클레어는 신음했다.
“이모오!”
“싫어. 엘리엇이 약속 지킬 때까지 여기서 한 걸음도 안 움직일 거야.”
결혼식이 끝나고, 입적한 직후에 엘리엇에게 이제 엄마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아이가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입적 관련 서류를 엘리엇이 있는 자리에서 같이 썼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엘리엇이 어디까지 이해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모가 엄마가 된다는 말에 부끄럼을 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지금, 엘리엇은 에리히를 제법 자주 아빠라고 불렀다. 오히려 아빠가 생겨서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클레어를 부르는 말은 좀처럼 고치지 못했다. 늘 이모라고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클레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강요가 목적이 아니라 진짜로 움직이기 싫어서였다.
그러자 엘리엇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클레어의 앞에 거만한 자세로 섰다.
“그렇게 게으르게 있으면 안 돼! 음, 음……. 게으른 건 햄스터야!”
“나 참.”
에리히의 흉내를 내는 얼굴이 똑 닮아서 클레어는 황당하게 웃었다. 제 딴에는 열심히 지적할 말을 생각해 낸 것이겠지만,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물론 공작가 도련님의 오만함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클레어는 모포를 두른 채 슬금슬금 엘리엇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단숨에 모포를 펼쳐서 엘리엇을 모포 안으로 끌어 들인 뒤 꼭 부둥켜안았다.
“잡아먹었다! 다시 한번 햄스터라고 말해 보시지!”
“아하하!”
엘리엇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클레어는 보들보들하고 따끈따끈한 아이를 끌어안고 극락처럼 난로 앞에서 굴렀다. 물론 엘리엇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낑낑대며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다.
“나 눈싸움!!”
“너 낮잠 자기 전에도 눈싸움했잖아.”
“그럼 눈사람 만들래!”
그렇게 말해 놓고, 엘리엇이 머뭇머뭇 고운 분홍색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
클레어는 눈을 깜박깜박했다.
처음부터 엘리엇에게 친엄마의 존재를 지울 생각이 없었고, 추억 이야기를 늘 해 주며 키운 것은 클레어 자신이었다. 엘리엇이 이모라고 부르는 것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이 파괴력은 심장을 단박에 무너뜨렸다.
“이게 누구 새끼야? 내 새끼야?”
클레어는 빨개져서 도망가려는 엘리엇을 끌어안고 마구 뺨을 비볐다. 엘리엇이 숨 막힌다고 바동거렸다.
에리히가 주석잔 두 개를 들고 거실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엘리엇을 괴롭히지 말고 놔 줘.”
“귀여운 걸 어떡해요.”
“흐아아!”
엘리엇이 울상이 되었다가 클레어가 손을 풀어 주자 재빨리 모포 밖으로 달아나 에리히의 다리 뒤로 숨었다.
에리히는 클레어에게 잔을 건네주며 물었다.
“그렇게 추운가?”
“아뇨. 이러고 있으면 딱 기분 좋은 온도잖아요.”
모포를 뒤집어쓰고 불 앞에 달라붙어 본 적이 없는 에리히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모가, 약속 안 지켜.”
엘리엇이 하소연하며 에리히의 소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에리히가 무표정인 채 고개를 숙여 엘리엇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엘리엇이 눈을 반짝 빛내며 외쳤다.
“진짜?”
“가서 마사에게 이야기해라.”
“네!”
엘리엇이 신나서 도도도 뛰어나갔다.
클레어는 의심스럽게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에리히는 여전히 표정 없는 채였다.
“무슨 소릴 한 거예요? 설마, 또 뭐 사 준다고 한 거 아니죠?”
“아니야.”
에리히가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 여유 있는 태도로 앉아서 잔을 홀짝거렸다.
클레어는 역시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받은 잔에 입술을 댔다. 따끈따끈한 뱅쇼였다.
“으음.”
“왜?”
“수상한데.”
“뭐가?”
“그냥, 이것저것 다.”
“네 삿된 마음을 남한테 투영하지 마.”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곧 엘리엇이 동글동글해진 모습으로 아장아장 돌아왔다.
오리털을 넣어 누빈 민소매 코트 위에 털외투를 입고, 그 위에 머플러를 둘렀다. 발에는 두꺼운 부츠를 신고, 머리에도 털모자를 귀까지 푹 씌웠다.
밖에 나갈 만반의 준비를 갖춘 차림새였다.
“아…….”
역시 눈사람을 만들러 가야 하는 운명인가. 혹시 에리히가 놀아 주기로 한 건가. 그래도 자신도 나가야 할 것이다.
클레어가 미처 체념을 마치기 전에 에리히가 일어서서 그녀를 모포째로 안아 올렸다.
“꺅!”
예상치 못한 기습이라 클레어는 당황하며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에리히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엘리엇이 타박타박 발로 리듬을 탔다.
“이히힛.”
“잠깐! 내려 줘요! 알았어, 눈사람 만들러 갈 거야. 만들 거니까!”
“엄마 껀 여기!”
엘리엇이 신나서 팔을 쭉 뻗었다. 에리히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엘리엇이 클레어의 목에 얼기설기 머플러를 두를 수 있도록 몸을 굽혀 주었다.
그다음은 모자와 두꺼운 신발이었다.
“놔줘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약속을 어기면 눈사람이 되는 거야!”
“뭐?”
에리히는 거실에서 방 하나만 건너가면 있는 유리방으로 들어갔다.
에리히의 조모가 한때 이곳에서 거주했고, 그때 온실로 만든 공간이다. 그러나 바덴 성 자체가 오래 비어 있었던 탓에 온실도 치워 버렸다. 굳이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는데 유지하기에는 비싼 시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주인 내외가 방문하기로 결정했을 때, 성의 관리인은 이 온실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냈다. 어린 도련님의 안전한 놀이터다.
어제부터 열어 놓은 천창으로 들어온 눈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폭신하게 쌓여 있었다.
에리히가 그대로 클레어를 살짝 눈밭에 던져 넣었다.
“꺅!”
깜짝 놀라 클레어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푹 빠진 눈밭에 사람의 모양이 생겼다.
“나도! 나도!”
에리히가 엘리엇을 안아 올려 가볍게 클레어의 옆에 던져 주었다. 엘리엇이 ‘부부앙!’ 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서 클레어의 옆에 떨어졌다.
엘리엇이 팔다리를 파닥거렸다. 눈밭에 조그만 요정의 흔적이 남았다.
클레어는 눈투성이가 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둘이 뭘 작당하나 했더니, 이거였어요?”
“약속을 어기고 눈사람을 만들어 주지 않았으니, 눈사람이 되어서 보상하는 게 옳지.”
그 말에 엘리엇이 즐거운 듯이 까르르 웃었다.
“요즘 계속 나만 따돌리고 둘이서만 즐겁게 놀고 있지 않아요?”
“네가 안 움직이는 게 문제 아닌가?”
“둘이 친해지라고 그런 거죠.”
“방금 나와 엘리엇이 널 따돌렸다고 말하지 않았나?”
할 말이 없어져서 클레어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리히가 잘 놀아 주니까 좀 소홀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 순도 높은 남방인이에요. 눈 장난은 좀 봐줘요.”
“추운가?”
고작 셔츠와 베스트에 슬랙스 차림인 에리히가 놀란 듯이 물었다. 반면, 클레어는 두툼한 솜옷에 오리털을 넣어 누빈 민소매 코트까지 걸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그렇게 추운 장소는 아니었다. 산에 바람이 부딪쳐 눈이 내리는 곳이지, 그렇게 엄청나게 얼어붙는 동장군의 나라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 장소는 원래 온실로 쓰이던 곳이라 바람도 별로 들지 않았다.
“감기 걸릴 정도는 아니에요.”
클레어는 두 손을 내밀었다. 에리히가 그녀를 일으켜 주기 위해 그 손을 잡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클레어는 몸무게를 실어 가며 그를 힘껏 잡아당겼다.
“…….”
에리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이었지만, 클레어는 그의 얼굴에서 더 힘내 보라는 오만을 읽을 수 있었다.
“이익!”
어금니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당겼지만, 오히려 그녀의 몸이 눈밭에서 쑥 끌려 올라왔다.
“하. 진짜. 좀 속아 주지.”
“욕조에 같이 들어가는 걸 노리고 한 짓이라면, 지금이라도 기꺼이.”
“누가 그런 소릴 해요!”
클레어는 그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엘리엇이 온 얼굴에 눈을 묻히고 발간 뺨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이모! 이모, 나 눈사람!”
“알았다, 알았어.”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고 엘리엇과 함께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눈사람을 세 개나 만들고, 거기에 각각 엄마 눈사람, 아빠 눈사람, 아기 눈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야 만족했다.
그리고 엄마 눈사람에게는 클레어의 머플러를, 아기 눈사람에게는 자기 모자를 씌웠다.
“우웅.”
그리고 따로 풀어 낼 수 있는 게 없는 에리히를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무얼 달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리히는 베스트의 단추를 떼어 엘리엇의 손에 쥐여 주었다.
“히히.”
엘리엇이 신나게 웃고 달려가 아빠 눈사람의 몸에 단추를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