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89/263)

90화

바덴 성의 성주 대리인 구스타프 슈바르츠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계단을 올랐다.

이곳은 클라우제너 본성에서도, 교통의 요충지인 잘츠기터와도 거리가 있었다. 한때는 작은 남작령의 성으로 기능했으나 지금은 이미 외진 곳의 오래된 건물에 불과했다.

딱히 볼만한 것도 없고, 주요 시설도 없었다. 클라우제너 전역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산업 발전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온천이 있다. 바덴 성의 예산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부부의 여행지로서는 좋은 곳이지. 암.’

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사실 에리히가 갑작스럽게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넣었을 때는 놀랐었다.

솔직히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지로 삼을 만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좀 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장소로 가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는 가 본 적이 없지만, 저기 어디 남쪽 해안가에는 사방에 과일이 가득 달린 나무가 있어 그 자리에서 조개와 가재를 구워 와인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긴다고 들었다.

북쪽 도시를 택하더라도, 잘츠기터만 하더라도 모피와 보석이 가득하고 즐길 거리가 많을 텐데 말이다.

‘클라우제너로 와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소탈한 여주인이셔.’

물론 클레어는 온천물에 몸 담그고 뒹구는 것을 낙원으로 여겼다. 삼시 세끼 밥이 맛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래서 애초의 계획을 틀어 에리히가 온천을 말하자마자 반색했다.

[혹시 거기 광천수도 있을까요? 아니, 없으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뜨거운 거 말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클레어는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거기서 3년만 쉬어요.]

에리히 입장에서 말하자면, 누가 또 방해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고 싶었다.

잘츠기터에 머물러 있으면 클라우제너의 모든 가신은 물론이고 외부인까지 몰려들어 북적거릴 것이 아닌가.

그들을 상대하는 것도, 고귀한 자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였다. 접견하고 어려움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정도가 있다. 적어도 요한 크로지크나 루덴도르프 후작가의 아들놈이 찾아오는 일은 막아야 했다.

그는 비서진에게도, 잘츠기터 시장에게도, 구스타프에게도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지 말라고 엄중하게 말했다.

물론 그런다고 진짜로 숨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구스타프는 책상 위로 쏟아지는 편지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중에 공작 부부가 꼭 직접 봐야 할 것만 골라서 가지고 가는 중이었다.

“송이송이 하얀 눈을……. 앗! 성주 아저씨다!”

사과처럼 익은 뺨을 한 엘리엇이 바닥의 석재를 하나씩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가 구스타프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도련님. 눈싸움은 재밌게 하셨습니까?”

“눈사람 만들었어요! 이만큼!”

엘리엇이 두 팔을 벌리고 신나게 말했다. 구스타프는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클라우제너의 가신치고 엘리엇에게 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스타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에리히가 이 나이 또래일 때를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각별히 어른스럽고 기품 넘치던 소년도 그 나름대로 귀여웠으나, 이 사랑스러운 도련님은 요정처럼 어여뻤다.

에리히가 다 자란 상태로 차가운 벽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을 거라고 착각하는 젊은 가신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춥진 않으셨고요?”

“하나도 안 추웠어요! 있잖아요, 아저씨, 엄마가 저녁밥은 연탄구이랬는데 그게 뭐예요?”

“오, 안 그래도 여쭈러 가려고 했는데 벌써 결정하셨군요.”

역시 소박한 분이다. 이곳에서는 석탄류가 몹시 저렴했으므로, 화로를 앞에 두고 간단히 무얼 구워 먹는 건 흔한 일이었고, 그만큼 저렴했다.

하지만 에리히의 식탁에 그런 음식이 올라갈 일은 없었다. 하물며 직접 굽는 일 같은 건 더더욱.

“소시지랑 아주 맛있는 고기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소시지!”

엘리엇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구스타프는 그 귀여움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면 전 공작님께 가 보겠습니다. 전해 드려야 할 편지가 있어서요.”

“네! 아, 아저씨!”

막 자리를 뜨려는 구스타프를 엘리엇이 황급히 불러 세웠다. 그리고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무얼, 말씀입니까?”

“내가 엄마라고 부른 거요.”

그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짤따란 다리로 열심히 달려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보모가 구스타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엘리엇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입가에도 구스타프와 비슷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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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아, 이게 사는 거지…….”

클레어는 늘어진 채 길게 쾌감 가득한 신음을 토해 냈다.

차가운 날씨, 열린 천창으로 한 송이씩 떨어지는 눈을 얼굴로 받으며 몸은 목까지 뜨끈뜨끈한 온천물에 담그고 있다가 나와서, 뽀송뽀송한 순면 가운을 걸치고 차가운 탄산수를 마시는 것.

그녀가 후끈후끈 달아오른 뺨을 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에리히가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나는 네가 클라우제너로 오자고 했을 때, 분명히 일하러 오는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누가 신혼여행지에서 일을 해요?”

“겸사겸사라고 생각했지. 델포드와 위빙 상단의 공장이 남쪽에 몰려 있는 걸 생각하면, 연락망을 생각했을 때 아무래도 여기까지 올 기회는 드물지 않겠나?”

“오려면 못 올 것까진 없죠. 편지 속달 비용이 좀 들긴 하겠지만. 근데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일?”

“다이아몬드 광산 시찰.”

“음. 그건 제 일이 아니라 요한 경에게 맡겼죠. 이미 궤도에 올랐으니, 케이시와 크로지크 백작이 알아서 잘할 거예요.”

“북부의 포목상 순회.”

“으음, 여기까지 왔으니 직영점이랑 도매상들에게는 한 번씩 얼굴 보여 주고 가야겠죠?”

“투자처 물색.”

“안 해요. 이 지역에선 뭘 발굴해도 전부 당신 몫이잖아요.”

“이런, 클레어. 네가 여기서 발명가들을 쓸어 간 걸 알고 있는데.”

널브러져 있던 클레어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에리히에게 다가가 그 손에 들려 있던 차가운 술잔을 빼앗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난 우리가 그때 인연 끊은 사이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있었어요?”

“내 영지에서 하는 일을…….”

말이 끝나기 전에 클레어의 손이 그의 뺨을 가볍게 만지며 턱을 들어 올려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맞닿기 직전에 에리히가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클레어가 킥 웃으며 내뱉는 숨결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당신도 은근 여우 같은 면이 있다니까.”

하지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에리히 쪽에서 입술을 겹쳤다.

그의 손이 클레어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깜짝 놀란 클레어가 다리를 움츠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에리히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 몸 위에 고정시켰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후.”

방해받은 에리히가 불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구스타프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어쩔 수 없이 클레어를 내려놓고 입실을 허가했다.

“급한 일인가?”

“아, 급한 일은 아닙니다.”

부부의 시간을 방해한 구스타프가 죄송스러운 얼굴을 했다.

“빅토리아 대공 전하와 무어 공작 각하께서 보내신 편지가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외부 연락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런 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 말고도 편지가 몇 장 더 있었다. 에리히는 편지다발을 받아 보낸 이의 이름을 훑었다.

크로지크 노백작의 명의로 보낸 것은 아마 요한이 보낸 것일 터다. 로저 카슨이 보낸 것은 위빙 상단의 통상 보고서일 테고. 케이시 모리스가 보낸 것도…….

역시 남자가 너무 많다. 그렇지만 그것을 버리면 클레어의 업무를 방해하는 꼴이라 그러지도 못하고, 그는 편지다발을 따로 빼서 대강 테이블 위에 던져 놓았다.

『헤르만 루덴도르프.』

이건 버려도 되겠지.

결정한 순간, 클레어의 손이 뻗어 와서 편지를 빼앗았다.

“당신한테 낭독하라고 할 테니까 염려 말고 이리 줘요.”

에리히는 살짝 인상을 썼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딱히…….”

“질투하는 거 맞잖아요. 쓸데없이.”

클레어가 태연자약하게 그렇게 말하고 그 편지를 테이블 위에 던져진 다발 위에 얹었다.

구스타프가 미소를 머금었다. 약혼 파티와 결혼식에 참석한 가신 중에도 진짜 연애결혼이다 아니다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꼭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 이상 방해하지 않고 하나만 여쭙고 가겠습니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시길, 마님께서 저녁에 연탄구이를 드시겠다고 하셨다고요.”

“아, 생각난 김에 말한 거였는데 마침 잘됐네요! 방에 들일 수 있는 작은 화로에 석쇠를 얹으려고 하는데요.”

“뭐?”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부츠를 신은 발이 석조 복도를 밟고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스타프가 놀라서 먼저 밖으로 나가서 맞이했다. 전령이었다.

“발터 마이어가 각하께 보낸 급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안으로 들여. 무슨 일인가?”

전령은 흘끔 클레어의 눈치를 보았다. 갓 결혼해서 온 새 마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의아했던 것이다.

말하라고 에리히가 가볍게 손짓했다. 전령이 메고 있던 가방에서 발터의 편지를 꺼내 에리히에게 공손히 건네며 말로도 설명했다.

“콜베르크 광산에서 발파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매몰되었나?”

에리히한테까지 보고가 올라왔다면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인명 피해가 경미하거나 추가 조치에 큰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으니까.

“아닙니다. 광산 안이 아니라 숙소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발파용 폭약을 빼돌린 광부가 그 앞에서 궐련에 불을 그었다고 합니다.”

전령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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