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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91/263)

92화

하지만 절대 그걸 들킬 순 없었다.

네게 마음이 없다고 말해도 전혀 듣지 않았던 이 오만한 남자의 콧대를 더 세워 줄까 보냐.

그래서 클레어는 삐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마치 보고를 들을 때처럼 물었다.

“가신들이 낭비가 된다고 반대하지 않았어요?”

“조금씩 시도해 보고 효용이 없다 싶으면 그만두면 될 일이었지.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수익성이 떨어지잖아요.”

“너는 나를 광산주나 지주 따위로 생각하는 건가?”

에리히가 클레어를 노려보았다. ‘아니면 뭔데?’ 싶어서 클레어도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법적으로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내각에 이양했다고 해도, 나는 클라우제너의 영주야. 내게는 영지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지.”

“…….”

“클라우제너의 슬하에 있는 사람이라면 꼭 영지민이 아니라도 마찬가지고.”

클레어는 침묵했다.

안전 대책을 이렇게 귀족적인 마인드 때문에 수립했다니.

이유가 무엇이든 좋은 일이다. 더군다나 광산 같은 가혹하고 위험한 환경이 나아지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었지만, 역시.

“당신은 민주주의의 적이에요.”

클레어가 눈에 힘을 주었다.

역시 그녀는 모든 일이 온건한 화해로 마무리 지어지는 것보다 싫은 놈을 망하게 만드는 게 좋았다. 왕과 대귀족의 목은 단두대에 걸어야 제맛인데.

이제는 자신도 자본가이니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말이긴 했다.

에리히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두 시간이나 그 문서를 들고 끙끙댄 것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심심한데 아무것이나 꺼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어요. 이건 사무실 방문자한테 보라는 듯이 놓여 있길래요.”

클레어는 매뉴얼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관리하고 있는데도 폭약을 빼돌리는 게 가능했단 말이에요?”

“유감스럽게도 그렇군. 폭약팀장과 출납원이 공모했어.”

“창고에 재고 수량을 세는 사람은 없었어요? 감사는?”

에리히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클레어는 소파에 눕듯이 파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발터 마이어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그래.”

에리히의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나왔다.

“만일에 발터가 주범이라면, 고작 폭약 따위를 빼돌릴 리도 없겠지만, 설령 사고가 났어도 훨씬 더 교묘하게 숨길 수 있었을 거야.”

“하긴, 횡령이라면 폭약 같은 위험 물질을 빼돌리느니 그냥 장부를 조작하는 게 낫겠죠.”

클레어가 천천히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다른 목적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테러에 쓰일까 봐 우려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철도 폭파 같은 걸 노리는 자라면 여기보다 훨씬 쉽게 더 강한 화약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많으니까.”

“하긴.”

이곳에서 폭약을 관리하는 것은 갱도에서 함부로 쓰다가 사고가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폭약 자체가 필요한 거라면 제조 공장이나, 이곳보다 훨씬 관리가 소홀한 곳에서 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역시 이미 콜베르크 광산에 몸담은 자가 기회가 되었기에 횡령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게 또 하나 있어요. 폭약을 다루는 자라면 불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폭약 상자를 앞에 놓고 궐련에 불을 붙였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음.”

“술에 만취한 상태였을까요? 아니면…….”

에리히가 클레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환히 알 수 있었다.

“만취 상태였다면 목격자가 알고 있겠지만, 그런 보고는 듣지 못했어. 연잎 궐련일 수도 있겠군.”

“만일에 그렇다면, 굳이 폭약을 횡령한 것도 이해돼요. 마약에는 빚이 따라오는 법이니까.”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 며칠 여기 머무르죠. 관련자의 재정 상황을 살펴보고 싶어요. 감사 결과도 알고 싶고요.”

“바덴에 가서도 보고서는 받아 볼 수 있어.”

“머무르는 동안, 이곳에 있는 아렌 출신 광부들을 만나 보려고요. 마침 숙소가 무너졌으니, 동향 사람으로서 보살펴 준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에리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클레어는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허벅지 위에 무릎을 올리며 에리히의 미간을 문질렀다.

“나라고 뭐, 일이 하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하지만 왠지 감이 안 좋아요.”

“어떤 면에서?”

“연잎 궐련은 황후가 퍼뜨리고 있는 거예요. 클라우제너가 공격 대상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사고일 확률이 높아. 물론 관리 소홀 문제는 작은 것이 아니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지.”

“불안한 걸 눈감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사고라는 걸 확인하는 쪽이 낫죠. 사실 마이어 군에게 아렌 출신 광부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신경도 쓰였거든요.”

클레어의 손이 그의 눈썹을 쓰다듬었다. 에리히가 눈가를 찡그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미인계를 쓰는 건가?”

“미인계는 미인이 쓰는 거고요. 이건, 조르기? 떼쓰기?”

클레어는 웃음보가 터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에리히가 그녀의 손등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같은 말인 것 같은데.”

“아무튼 그래서, 여기 머물러요. 안 돼요?”

“엘리엇한테 설명은 네가 해.”

그 순간 클레어의 손이 굳었다.

에리히는 승리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던 클레어의 손목을 움켜쥐고 다른 팔로는 그녀의 허리를 휘감으며 일어섰다.

휙.

순식간에 시선의 높낮이가 뒤바뀌었다. 책상에 눕혀진 클레어가 눈을 깜박거렸다.

에리히는 그녀의 손을 깍지 끼어 책상에 누른 채 내려다보았다. 클레어의 허벅지 안쪽에 그의 몸이 닿았다.

“자, 잠깐, 이건 엘리엇한테 설명하는 것과 상관없잖아요.”

“상관없지. 기회가 보였는데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을 뿐이야.”

“무슨 기회요!”

“널 책상 위에서 짓누를 기회.”

에리히가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

“숨이 가빠졌어, 클레어. 기대하고 있나?”

“여기 마이어 씨 사무실이에요.”

클레어의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불타듯이 화르륵 붉어졌다.

“미쳤느냐고는 안 하는군.”

“에리히!”

“괜찮아. 아무도 안 와. 서류는 나중에 내가 정리하도록 하지.”

“……!!”

그의 입술이 클레어의 입술을 벌려 깊게 맞물어 왔다. 클레어의 팔이 다급히 그의 등에 감겼다.

다리가 떨리면서도 에리히의 다리에 엉키고 툭, 구두가 바닥을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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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로 지어진 임시 숙소가 술렁거렸다.

공작 부인이 방문했다는 뜻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히 공기가 달라져서, 자콥은 불편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콜베르크 광산은 현재 휴업 중이었다. 숙소가 무너졌다는 이유로 공작은 광부들을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급료는 평상시의 절반을 줄 테니 한 달 동안 쉬라는 말에 대다수 광부가 기뻐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광산을 떠났다.

광부 절반 이상이 콜베르크시에 가족의 집이 있었다. 그게 아니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향이 있었다. 대부분이 클라우제너 영지 출신이기 때문이다.

한 달의 황금 같은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자콥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돌아왔을 때 자리가 남아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서?’

꼭 다시 불러 준다는 말 같은 걸 진심으로 믿는단 말인가?

물론 발터 마이어는 놀라운 호구긴 했다. 공작의 운영 원칙은 종교적 선심에서 나오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기이했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생겼다면, 당연히 체질을 바꿔야 했다. 자콥 자신이라면 이 광산의 수익성을 족히 지금의 두세 배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저들을 모조리 잘라 버리고, 자신처럼 아렌의 계주들을 부르면 된다. 어디 다른 영지처럼 열 살 아이를 갱도에 밀어 넣으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렌에만 한 번 다녀올 수 있다면, 지금의 두 배로 벌 수 있는데……!’

하지만 아렌은 너무 멀었다. 게다가 계원들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막사에 남은 것은 모두 아렌 출신의 광부들이고, 자콥의 계원들이었다.

아렌까지 다녀올 수는 없다는 말에 발터는 한숨을 내쉬며 천막으로 임시 막사를 세워 주었다.

추웠지만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계원들은 자콥이 명령할 때와 연잎 궐련을 입에 물고 있을 때가 아니면 벌레처럼 드러누워 꿈틀대고 있을 뿐이니까.

불평하는 건 자콥과 그 심복뿐이었다.

‘빌어먹을. 공작 부인이 대체 왜!’

그는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공작 부인이 자꾸 이 숙소에 드나들지 않았다면, 계원들은 내버려 두고 자신은 콜베르크시의 고급 호텔에서 휴식을 즐겼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티 나게 굴 순 없었다.

게다가 올 때마다 공작 부인은 귀찮게 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막사 창이랑 입구를 걷으세요. 석탄 화로를 환기도 시키지 않고 피우고 있으면 큰일 나요.”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찬 바람이 밀려들었다. 아편에 절어 드러누워 있던 남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갑자기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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