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3/263)

94화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도록 클레어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친분이 생길 정도는 아니라도 마음을 꽤 풀어 놨다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네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용은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에 위빙 상단 주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쌓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역시 믿을 수 없어서일 것이다. 능력이 아니라 마음을.

정말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같이 고민해 주리라는 믿음이 그렇게 쉽게 생길 리 없다.

‘하긴, 나 같아도 사장님 부인이 와서 자기한테 재무 설계 받으라고 하면 이 사람 보험 팔이인가 할 텐데.’

증거를 얻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떠나기 전에 한 명이라도 돕고 싶은 것도 진심이었다.

“너를 신뢰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자콥이라는 그놈이 두려운 거야. 차라리 자콥을 먼저 잡아들이는 게 어때?”

“그자가 진짜 머리인지 어떤지 알 수 없잖아요. 만일에 나라면, 대표로는 바지 사장을 내세우고 심복 부하인 척할 거예요.”

“그건 너고.”

에리히가 짧게 대꾸했다. 클레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보통은 우두머리 자리, 남한테 그렇게 쉽게 안 내줘. 심지어 범죄자가? 그럴 리 없지.”

“뭐 엄청난 범죄단의 수장이면 모르겠는데, 기껏해야 계주잖아요. 마약상으로 빨아먹는 돈은 그것과 별개고요.”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너지.”

할 말이 없어서 클레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내가 뭐, 유난히 돈 좋아하는 게 맞긴 한데.”

“그놈이 머리야.”

“…….”

클레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단서라도 찾았어요?”

“그놈만 날 똑바로 쳐다보니까.”

에리히가 대꾸했다. 클레어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게 근거예요?”

“제가 권력자라고 생각하는 놈이 아니라면 그러지 않아.”

“흑막이 따로 있는데도 자기가 우두머리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흑막 놈은 내 앞에서 절대 고개를 들지 않고 숙이고 있을 텐데, 그런 놈도 보이지 않고.”

“아.”

납득이 갈 것 같아서 분했다.

“어쨌든 놈과 놈의 심복들을 지켜보라고 말해 뒀어. 움직이면 꼬리가 잡히겠지.”

“도망치면 잡아도 되겠군요. 황후의 끄나풀이면 쉽게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갔을 때 후환이 있다면 쉽게 도망가지 못한다. 황후가 가혹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녀의 아랫사람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다.

반대로, 도망간다면 하잘것없는 피라미라는 뜻이다. 이 클라우제너에서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건 놈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클레어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미끼예요?”

“놈을 불안하게 만들 생각으로 자꾸 찌른 것 아닌가?”

“다른 광부들에게 신뢰를 얻으려고 한다고 했잖아요.”

에리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이 그 말이긴 했다.

클레어가 빙글빙글 사무실을 몇 바퀴 돌다가 에리히의 무릎에 털썩 앉았다. 에리히는 그녀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며 물었다.

“왜?”

“할 일 없으면 목이나 좀 주물러 봐요.”

“하.”

에리히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으나 순순히 클레어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으악!”

힘찬 악력이 목덜미를 레몬처럼 쥐어짜는 바람에 클레어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려는데 에리히가 허리를 안아 주저앉혔다. 클레어는 다급히 외쳤다.

“아니, 이제 됐어요!”

“목이 아프다면서.”

“악!”

이번에는 승모근에 손가락 세 개가 파고들었다. 클레어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에리히가 그녀의 몸을 붙들어 눌렀다.

“아악! 살살 해요, 좀!”

“원한 건 너야.”

“악!”

자리를 바꾸어 딱딱한 승모근을 모조리 조지고 난 다음에야 에리히는 손을 풀어 주었다.

클레어는 헉헉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쥐어짜이는 순간은 진짜 아팠지만, 순식간에 몸에서 기력이 빠지면서 이완되었다.

“그런 목소리로 수상한 대사 좀 치지 말라고요.”

“내가 뭘.”

에리히가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클레어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의 몸 위에 늘어진 채 긴 한숨만 내쉬었다. 아팠지만, 시원했다.

“하아…….”

“편해 보이는군.”

클레어가 고개를 뒤로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어깨 좀 주물러 준 게 그렇게 불만이에요?”

에리히가 키스로 값을 치르게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앗!”

노크하지 않고 문을 열었던 마이어의 아들이 깜짝 놀라 콩 문을 닫았다.

클레어는 발딱 일어서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에리히가 인내심을 발휘하며 주먹을 한번 쥐었다 폈다.

“죄송합니다!”

클레어가 문을 열자마자 소년이 뺨을 붉히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아냐, 아냐. 방해한 거 아니야. 그냥 게으름 부리고 있었어.”

“그, 그렇지만, 아버지가 두 분은 신혼이시니까 방해하면 안 된다고……. 노, 노크도 안 했고.”

“원래 발터 씨 사무실이라서 그랬을 거잖니. 그리고.”

클레어는 복도 저만치에서 곧이라도 달아날 듯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서 있는 광부를 보았다. 그는 잭이라는 이름으로, 삼십 대 중반이었다.

소년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괜찮아.”

“네.”

소년이 겨우 안심한 듯 웃었다.

소년의 등을 두드려 보내고, 클레어는 잭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잭 씨. 혹시 이 사무실이 불편하다면, 자리를 옮길까요?”

“아,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 남의 눈에 띄기가…….”

잭이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어눌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그가 불편해하는 것을 깨닫고 옆방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여, 여기는 귀, 귀빈 응접실인데…….”

“손님은 다 귀빈이죠. 들어오세요. 괜찮아요. 자콥 씨에게 들키지 않을 거예요.”

잭이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콥은 그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소등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밖에 켜진 가스등이 깜박거리면서 천막 너머로 흐린 빛이 넘어 들어왔다.

문득 몸을 일으켜 침대에 드러누운 머릿수를 셌지만, 아직 궐련을 피우는 놈들이 전부 들어오지 않았다.

‘찜찜해.’

계원 대부분에게는 자기 의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자콥이 그들을 이 광산에 취업시킨 것이 3년 전, 여기 있는 자들은 대개 그보다 2, 3년 전부터 연잎 궐련에 손을 댔다.

자콥은 내성이라는 개념을 몰랐으나, 경험상 점점 더 강한 약을 찾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 딴엔 나름 신경 써서 소중한 계원들을 관리했다. 하나하나가 수만 골드 이상의 값어치를 갖고 있는데 쉽게 잃어서야 될 일인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광산의 일상이 도움이 되었다. 계원들은 낮 동안 시키는 대로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저녁이 되면 자콥이 배급한 연잎 궐련을 피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다음 잠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폭발 사건 때문에 모든 게 어그러졌다.

‘빌어먹을 빌 새끼, 진짜 죽여 버렸어야 했어.’

사고를 치고 이미 죽어 버린 놈이지만, 더 먼저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이 억울해 자콥은 이를 갈았다.

발터 마이어만이라면 어떻게든 구슬렸을 텐데. 그 사건 때문에 갑자기 공작이 찾아오고, 공작 부인이 나대더니, 둘이 뭉개고 앉아 돌아갈 생각을 안 한다.

신혼여행 중이라더니, 이깟 광산에 대체 무슨 볼거리가 있다고.

보나 마나 공작 부인이라는 계집이 이 뇌가 녹은 놈들에게 마님 마님 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자콥은 이를 갈았다.

“형님, 형님.”

고향 동생이자 제일 믿음직한 부하인 올리버가 그의 등을 콕콕 찔렀다.

돌아보자, 작은 보따리를 하나 싸서 짊어지고 있었다.

“……오늘 가냐?”

올리버가 도망치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며칠 전이었다.

[전 아무래도 불길합니다, 형님. 솔직히 증거가 있느니 마니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공작이 수틀려서 다 니네 탓이라며 뒤집으면 어떡하게요?]

[공작이 수틀리면 우리가 야반도주한다고 해결되겠냐? 어떻게든 찾아내겠지.]

[이름을 바꾸고 한동안 어디 저 멀리 땅끝까지 가 있으면 돼요.]

결국 올리버와 그는 각자 알아서 갈 길 가자는 것으로 그 대화를 끝냈다.

하지만 자콥도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다. 증거가 없고, 공작이 언제까지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겠냐 하는 것과, 이대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두고 도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뒤엉켰다.

자신은 왜 하필 클라우제너 공작령으로 왔을까? 파펜하임이나 슈페 같은 곳으로 갔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의 영주들은 자콥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을 흔쾌히 받았을 테니까. 그 한 놈 한 놈이 얼마를 받든, 뇌가 녹았든 안 녹았든 관심도 없을 것이다.

굳이 이곳으로 온 것은 클라우제너 공작령의 임금이 가장 높고, 진짜 값싼 소년 광부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지만, 자콥은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는 이미 깨끗이 잊었다.

올리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잭이 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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