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직 궐련 피우고 있나 보지.”
“챙겨 놓고 가려고 했는데, 진짜로 안 보여요. 형님, 제 생각엔 그놈이 아무래도 공작 부인에게 갔을 거 같습니다.”
자콥이 몸을 일으켰다.
“그 겁 많고 멍청한 놈이 그럴 리가 없어!”
“그놈이 사흘 전부터 갑자기 지 여동생 얘기 했던 거 생각 안 나십니까? 3년이나 아무 말 없었는데?”
“흡.”
올리버의 말이 그럴듯해서 자콥은 숨을 들이켰다.
“같이 가십시다, 형님. 돈은 벌 만큼 벌었잖습니까?”
“야, 근데 우리가 도망치면 오히려 수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오늘 밤 안에 산을 내려가서 역마차를 타야 합니다. 형님은 공작 부인이 와도 그냥 드러누워 계신 적도 많잖습니까? 잘하면 하루 이틀쯤은 안 들킬 겁니다.”
그 말도 옳았다.
자콥은 재빨리 일어나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보따리를 쌌다.
소등 시간이 한참 지나 무척 어두웠다. 올리버가 등불을 준비했지만, 이것만으로 산을 내려갈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숲은 어두웠지만, 그래도 아직은 등불을 켤 수 없다. 조금 더 멀리 벗어난 다음에야 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살금살금 걸어 광산의 권역을 벗어나려던 때였다.
“애런 자콥.”
“헉!”
질겁한 자콥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의 호위였다.
“허윽.”
어떡하지. 죽여야 하나? 죽일 수 있나?
그는 한때 고향에서 힘깨나 쓰는 어깨패였고, 올리버도 그랬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어르고 협박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편 중독자인 계원들 상대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공작의 호위를 상대로 그런 싸움 실력이 통할 리가 없었다.
“형님.”
올리버가 그의 등을 슬쩍 찔렀다. 둘이 동시에 덤빌까? 그런다고 단숨에 해치우고 도망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도망가자니 추격이 두려웠다.
올리버와 자콥이 각자 단도를 움켜쥐고 자세를 잡았을 때였다.
저벅.
라이플을 든 경비대원들이 숲 쪽에서 둘을 포위하듯이 나타났다. 자콥의 이름을 부른 공작의 호위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칼을 조용히 땅바닥에 내려놓아라. 각하께서 가능하면 널 살려서 데려오기를 원하신다.”
그건 죽여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겁에 질린 자콥이 먼저 단도를 바닥에 던졌다. 그다음 올리버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칼을 내려놓았다.
퍽!
경비대원이 자콥의 손을 꺾어 잡으며 바닥에 무릎 꿇렸다.
에리히는 별반 표정의 변화도 없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잭의 말에 따르면, 사정은 이랬다.
잭이 살던 마을에 연잎 궐련이 퍼진 것은 4, 5년 전이다. 유랑 극단을 따라다니는 약장수들이 만병통치약이라면서 판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지병이 있던 잭의 어머니가 그것을 쓰고 효과를 보았다. 그때부터 잭의 가족은 어지간한 병과 통증에는 전부 그것을 썼다.
가격이 좀 비쌌지만, 두고 쓰는 상비약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픈 곳도 없는데 온 가족이 그것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리고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서로 이제 절대 사지 말자고 약속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팔러 씨가, 그, 팔러 씨는 약장수인데……. 저랑 여동생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고, 해서…….]
잭의 말은 지리멸렬하여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인내심 있게 질문한 끝에 이야기를 전부 맞춰 냈다.
잭과 여동생은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는 말을 듣고 팔러를 통해 각자 자콥과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자콥은 팔러에게 목돈을 주었다. 잭의 급료를 선금으로, 먼저 빚을 갚는 것이라고 하여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잭은 자신의 빚이 얼마 남았는지, 원래 급료가 얼마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저, 저는 돈 같은 건……. 전부, 제, 제 잘못이니까요. 그냥 동생만, 찾고 싶습니다.]
벌을 받지나 않을까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면서 잭은 그렇게 호소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실질적으로 평소에 무슨 취급을 받았는지는 분명했다.
클레어가 그 이야기를 전부 듣고 기가 막혀서 ‘허, 하’ 하는 소리만 내는 동안 에리히가 결론을 냈다.
“노예주 노릇을 한 거군. 팔러라는 놈이 거간꾼이고.”
“장부는 전부 거짓일 거예요. 뭐 그럴 줄 알았지만.”
이중장부를 써서 돈을 더 떼먹었다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진짜 장부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혼자 돈을 다 먹는데, 위험하게 장부를 뭐 하러 남기겠는가?
“폭약팀장도 자콥의 계원이었죠? 대우는 남들보다 좋았겠지만, 급료는 아마 거의 없었을 거예요.”
빚 때문에 그랬으리라는 추측은 처음부터 했다. 그러나 위험성만 높고 벌이에 비해 그렇게 크지도 않은 금액이라,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심지어 공범인 출납원 몫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급료 자체가 없고, 고립된 광산이라 달리 부업을 구할 곳도 없으니 잔돈푼이라도 아쉬웠으리라.
사람을 시켜 잭을 데리고 나가 다른 방에서 쉬게 하는 동안 밖에서 가스등이 켜지면서 환해졌다.
“잡은 모양이군.”
“기어이 도망을 친 거네요.”
클레어가 허벅지에 내려놓았던 손으로 무심코 주먹을 꽉 쥐었다.
“애런 자콥은 황후의 끄나풀이 아니었군요. 그렇다는 건, 딱히 클라우제너를 노려서 공격한 것도 아닐 거라는 뜻이고요.”
“클레어.”
“황후가 손쓰지 않아도, 동향 사람을 끌어다 아편을 먹이면서 노예로 부리는 자가 있는 거네요. 그게 일종의 사업으로 기능할 정도로 성행하고 있는 거고요.”
“…….”
“아마 원래 중독자가 아니었어도, 도시에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나와 중독시켜 통제하거나.”
에리히가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관자놀이에 입술을 눌렀다.
“진짜, 기분 최악이네.”
클레어가 그의 어깨에 털썩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리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한번 쓸어 냈다. 딱히 눈물이 난 것은 아니지만, 괜히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는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자콥 같은 놈이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닐 거예요.”
“그렇겠지. 확인해 보도록 할게.”
어쩔 수가 없었다.
급료를 높이고 휴식시간을 주는 것은 운영 방침으로 지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대리인들이 클레어처럼 굳이 고용인의 생활까지 들여다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계를 만들어 한 명이 급료를 받아 가면, 혹 폭동을 일으킬까 봐 염려하는 자가 있을지 몰라도 이게 노예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저도 공단 직원 전부 확인해 보라고 해야겠어요. 목화밭이랑 밀밭이랑……. 아는 영지에도요.”
어쩌면 농장에서 품꾼을 고용할 때도 이런 식으로 끼어들지 모른다.
위빙 상단에 원재료를 공급하는 목화밭은 대부분이 대농장이었고, 노동력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들었다.
에리히가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네 밑에 있는 사람들은 괜찮을 거야. 아렌에 노동력을 남길 작정이라면, 굳이 그런 수를 쓰지 않았을 테니까.”
“황후가 명령한 게 아니라 자생한 노예단이잖아요. 돈이 되면 제 공단에도 들어와 있을 거예요.”
클레어는 다시 눈을 감고 목을 쭉 젖혀 소파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히의 손이 살짝 그녀의 귓가로 들어와 목 근육을 눌렀다. 클레어는 무심코 약간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해 달라고 해서 이러는 모양이다. 기분을 풀어 주려고.
안마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기분이 나아졌다.
클레어는 고개를 숙여 그 손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토마스 보르얀스의 아지트에서 발견했던 그 장부 있잖아요. 그것의 진짜 의미를 이제야 알았네요.”
“음.”
“아렌 귀족을 망쳐서 정치적인 이득을 얻는 게 다가 아니었어요.”
아렌 지역을 광범위하게 망가뜨리고, 산업 인프라는 일방적으로 로멜에 집중 투자한다.
격차가 벌어질수록 아렌 지역의 토지와 농민은 몰락하여 로멜에 종속된다. 마침내는 로멜까지 끌어와 값싼 노동력으로 쓴다.
1차적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여 이것을 막을 아렌 귀족도 동시에 망가뜨렸다. 모든 것은 불법이 아니었으며, 은밀했고, 악취 나는 음모로 뒤덮여 있다.
클레어는 그런 역사를 알고 있었다.
다만 실행하는 방식이 군대와 폭력이 아니라 마약이었을 뿐이다.
그것도 클레어가 아는 역사다.
“자콥을 만나 봐야겠어요.”
“굳이 네가 직접 심문할 필요 없어. 내가 네 추측을 확인만 해 오도록 하지.”
“고마워요. 하지만 심문 때문은 아니에요.”
클레어는 에리히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쭉 펴서 일어났다.
“루덴도르프 후작을 파산시키는 데 놈을 이용해야겠어요.”
그리고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25. 광맥
『친애하는 루덴도르프 후작님께.
저희 가문의 의뢰로 다이아몬드를 찾던 탐광자가 귀가의 영지 가까운 곳에서 역청탄 광맥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관해 의논할 용의가 있다면 답신 주십시오. 합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과 협상하고 싶습니다.
랄프 크로지크.』
루덴도프르 후작은 눈을 크게 떴다. 랄프 크로지크가 누군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크로지크 백작가의 노백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