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모가 미안해. 혼자 놔둬서 미안해.]
하지만 아무리 사과해도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오래 떼어 놨던 것은 처음이었다.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안고 업고 달랬다. 그때는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았지만, 옆에서 에리히가 얼음처럼 싸늘한 얼굴로 고장 난 채 곁을 지켰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좀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힘들어하자 에리히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엘리엇, 내가 안아 주는 건 안 될까……?]
‘이리 와’도 아니고 ‘안아 주마’도 아니고 ‘안아 줄게’도 아니었다. 에리히가 남에게 그렇게 빙 돌려 묻는 것은 아마 생전 처음일 것이다.
엘리엇은 울먹거리다가 팩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말이다.
마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님을 공작님께 빼앗겼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클레어는 반성했다. 약혼한 뒤부터 엘리엇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새 사업이다 결혼이다 하는 것도 그렇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황후 문제가 터지면서 쉴 틈이 없었다.
에리히가 끼어들면서 엘리엇의 삶이 다채로워지고, 또 여러 가지로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도 있었다.
너무 착한 아이는 그래도 엇나가지는 않았다. 껌딱지가 되어 들러붙긴 했지만.
‘우선은 본성에 갈 것까지만 생각하고…….’
루덴도르프에도 가긴 가야 할 텐데, 조금 걱정스러웠다. 엘리엇을 데려가기는 불안하고, 두고 가기는 마음 쓰인다.
문이 쾅 열렸다.
“엄마!”
엘리엇이 힘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달려들어 와 클레어의 무릎에 온몸을 던졌다.
“윽!”
안 그래도 아프던 허리가 푹 꺾였다. 온천이 아니었으면 죽는다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끙차끙차, 엘리엇이 클레어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엄마!”
천사였다. 바늘 끝에서 춤추기는커녕 무릎을 아작 낼 무게였지만.
클레어는 엘리엇의 엉덩이를 받쳐 허벅지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몸을 끌어안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켰다.
“어디 갔다 왔어?”
“구스타프 아저씨한테. 손님 엄청 많아!”
엘리엇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신나 보이는 게 꼭 강아지 같았다.
“사탕 받았어!”
“어디 봐.”
엘리엇이 움찔했다.
“아, 안 먹었어. 유모가 봤어.”
“무슨 사탕 받았는지 궁금해서 그래.”
엘리엇은 움찔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종이에 싸인 사탕 한 알을 꺼냈다.
클레어는 그것을 받아 손안에 쥐고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초콜릿이랑 바꿀까?”
“진짜?!”
사탕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엘리엇이 눈을 반짝했다. 클레어는 사탕을 자기 주머니에 넣고, 엘리엇을 안고 일어섰다.
이렇게 하는 게 교육상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나 마사가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뭘 입에 넣는 것보다는 나았다. 남이 주는 음식은 신뢰할 수가 없다.
클레어는 테이블 쪽으로 가서 한 손으로 초콜릿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엘리엇이 상자를 잘 볼 수 있도록 몸을 좀 구부렸다.
“골라 봐.”
“우웅……. 그치만.”
엘리엇이 몹시 망설였다.
“이거 아빠가 엄마한테 준 건데.”
“괜찮아. 엘리엇한테 이걸 준다고 아빠가 화내진 않을걸?”
엘리엇은 그래도 망설이다가, 아빠와 사탕을 나눠 먹겠다고 클레어가 약속하자 그제야 히히 웃으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웅.”
얼마나 맛있는지 엘리엇이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으려고 애쓰면서 목구멍에서 소리를 내는 게 또 귀여웠다.
클레어는 엘리엇을 안고 안락의자 쪽으로 옮겨 갔다.
“아빠는 또 바빠?”
입술에 초콜릿을 묻힌 채 엘리엇이 물었다.
“그러게. 여행은 우리 둘이 갈까?”
엘리엇이 진심으로 갈등하는 얼굴을 했다. 클레어를 자꾸 데리고 사라질 때는 미웠지만,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서러웠다.
에리히는 지금도 서재에 있었다. 이번 사건의 뒤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일단 공단의 고용 형태를 다시 확인한 뒤 특이한 사항을 보고하라고 로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일을 마쳤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렇지가 않았다.
노예단이 북부에 훨씬 더 많이 들어와 있을 것은 명백했다. 게다가 자콥처럼 저 혼자 꾀를 내어 저지른 게 아니라 황후를 뒷배로 업은 자가 마약에 부가하여 별도 사업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클라우제너가 직접 소유 중인 광산, 공장, 다른 여러 사업은 물론이고, 영지 내의 다른 상단 소유의 공장이나 그 밖에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도 노예단을 색출해 내야 했다.
[규제할 권리는 없지 않나요?]
공식적으로 행정은 관리의 몫이다. 그러나 클레어의 말에 에리히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클라우제너 안에서 그런 짓을 하게끔 용납할 수는 없어. 게다가 이건 단순히 아렌인의 문제가 아니야.]
해로운 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도 퍼져 지역 전체를 물들이게 마련이다.
그러기 전에 막아야 했다.
[황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군. 이걸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어차피 평민 따위인데. 아렌을 자양분으로 삼아 로멜의 우위를 확고하게 굳히고자 한다는 게, 로멜의 평민까지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에리히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반박할 수 없었다. 어릴 때라면 모를까, 그도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도 마음에 불신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클레어처럼 사람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토지를 소유하고 다스리는 것이 바로 귀족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미덕이었다. 거기에는 사람 또한 포함되어 있다.
진정으로 품위 있는 귀족은 흔하지 않지만, 에리히는 적어도 황후를 그 범주 안에 넣고 있었다.
권력에 탐닉하는 것 정도는 자신의 의무만 잘 지키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클레어는 물론 그 말을 비웃었다.
[권력에 탐닉하는 사람이 의무를 다하긴요.]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예단을 색출해 처벌하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고용인을 채우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독자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정말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다.
윗선이 황후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차근차근 움직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도주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넓은 영지와 사업들을 뒤져 한꺼번에 뿌리 뽑자니 사전 준비에 공이 많이 들었다.
클레어는 이게 무슨 신혼여행이냐고 불평하지 않았다. 전부 뒤로 미루고 아랫사람한테 맡기라는 에리히의 권유를 먼저 거절했던 건 자신이었다.
“우리 엘리엇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면 되지.”
“그래두……. 아빠가 나 좋아하는데.”
“알면서 그렇게 화냈어?”
“헤헤.”
엘리엇이 멋쩍게 웃으며 클레어의 목을 끌어안았다.
구스타프가 문을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공작 부인, 손님이 오셨습니다.”
“내 손님이요?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죠?”
“빅토리아 대공 전하십니다.”
구스타프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도 깜짝 놀라 일어섰다.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데이 드레스 위에 망토 하나만 걸치고 서둘러 로비로 내려갔다. 예의에 맞는 차림새를 한다고 빅토리아 대공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았다.
빅토리아 대공은 털가죽 모자를 벗지도 않은 채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집사가 막 차를 내왔다가 클레어를 보고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마님.”
“빨리 내려왔군.”
“어서 오세요, 빅토리아 대공 전하. 답장을 주실 줄 알았는데, 직접 오실 줄 몰랐습니다. 아, 우선 들어가세요. 로비가 추운데.”
“꽤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말일세. 신혼부부를 방해하는 것이 다소 꺼려지긴 했지만.”
빅토리아 대공이 그렇게 말하면서 클레어의 치맛자락을 잡고 서 있는 엘리엇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 귀여운 아가보다는 덜 방해하지 않을까 해서 왔지. 그간 잘 있었니?”
“안녕하세요, 이모할머니.”
엘리엇이 방실방실 웃으며 배꼽 인사를 했다. 빅토리아 대공이 ‘오!’ 하고 희미하게 반가운 얼굴을 했다.
“지난번에는 얼굴만 빨개져서 도망가더니.”
“에리히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리 온. 한번 안아 보자꾸나.”
엘리엇은 흘끔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아무한테나 가서 안기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클레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엘리엇은 신나게 달려가 빅토리아 대공에게 답삭 안긴 뒤 그 뺨에 뽀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