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7/263)

98화

“헉!”

빅토리아 대공이 헛숨을 들이켰다.

나이가 들면서 퍽 물러지고, 특히나 어린아이들에게 유해지긴 했다. 그러나 그녀도 근본은 로멜 귀족이었다.

다정하게 아이를 안고 등을 두드리는 것 정도는 생각했지만, 뺨에 닿는 달콤한 감촉에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히히.”

엘리엇이 활짝 웃으며 팔을 뻗었다. 으레 안아 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빅토리아 대공은 뻣뻣하게 굳은 채 어설프게 아이를 안았다. 뺨에 쪽 하고 입술이 닿은 자리부터 아른아른한 온기가 퍼져, 늘 냉정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던 그녀의 볼도 허물어지듯이 풀어졌다.

정말이지 저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안아 올리진 못하고 조심조심 쪼그린 채 보듬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힘껏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마치 제 보드라운 냄새와 체온을 나눠 주려는 듯한 몸짓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도, 꼭 이런 느낌을 받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고맙구나.”

빅토리아 대공이 그렇게 말하자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고맙다고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빅토리아 대공 자신도 확실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보송보송해 보이는 금빛 머리칼이 사랑스럽게 흔들렸다. 그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머금었다.

클레어가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할머니라고 하면 무조건 자기한테 친절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니야.”

엘리엇이 빅토리아 대공의 손을 잡은 채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이모잖아.”

“응?”

“이모할머니는 아빠의 이모라고 했으니까, 아빠한테 어엄청 중요한 사람이야. 그리구 가족이야!”

“아…….”

클레어는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못 하고 무너질 뻔했다. 가슴이 아렸다.

세상에 이렇게 과분한 사랑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랑한다, 아끼며 키운다, 늘 애써도, 역시 엄마가 키우는 것만은 못한 게 아닐까 불안해지곤 했다.

남에게 맡기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마음속에 다른 일이 스며들 때마다 그랬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도.

감정도, 시간도 다른 일에 나누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이렇게 사랑받을 때마다 더욱더.

그러다가 문득 클레어는 빅토리아 대공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네. 저간의 사정은 대강 들어 알고 있으니. 마음 어지러운 상황에서 가문을 훌륭하게 이끌고 아기까지 키워 냈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네.”

“음.”

빅토리아 대공의 태도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해서, 클레어는 외람되지만 어느 설을 지지하고 계시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다행히 거기까지 저지르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웃음을 띤 채 빅토리아 대공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대공 전하. 손님을 대접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지만, 저희 저녁 식사가 분명히 입에 맞으실 거예요.”

“소시지!”

엘리엇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자기주장을 펼쳤다. 클레어는 엘리엇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구스타프 경에게 가서 할머님의 침실이 준비되었는지 확인하고 오렴.”

“응!”

심부름을 맡은 엘리엇이 도도도, 로비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집사가 빅토리아 대공의 짐보다 엘리엇을 우선시하여 그 뒤를 따랐다.

“뛰지 말고! 넘어지면 큰일 나!”

“응!”

엘리엇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저러다 계단에서 넘어지면 큰일이다 싶어,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식을 들은 에리히가 인사를 하러 나온 것은 그때였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이모님?”

“내 영지가 여기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데, 못 올 곳에 왔니?”

“모처럼 수도까지 내려가셨으니 좀 더 계실 줄 알았습니다.”

“박정하게 날 쫓아낼 모양이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에리히가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얼굴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영지의 일입니다.”

클레어가 에리히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에리히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지만, 표정을 바꾸거나 빅토리아 대공에게 부연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이유가 있겠지.’

클레어는 빅토리아 대공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녀 역시 로멜 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황후 편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다.

설령 황후 편은 아니라도,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얻는 것은 없이 이쪽의 카드만 까는 셈이 된다.

빅토리아 대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혼이잖니.”

“클레어는 이해할 겁니다.”

“내버려 두세요. 콜베르크 광산에서 일어난 사고 때문에 에리히는 바쁘답니다.”

클레어는 방긋 웃으며 빅토리아 대공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그녀를 응접실 쪽으로 안내했다.

“덕분에 방치된 저는 대공 전하께서 전해 주실 수도 소식에 아주 목말랐고요.”

빅토리아 대공은 엘리엇에게 뽀뽀를 받았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클레어는 약간 더 진심으로 웃고 말았다. 얼굴만 보면 에리히와 별로 닮지 않았는데, 그녀의 표정에서 에리히가 보였기 때문이다.

“자네는 날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군.”

“그럴 리가요. 어려운 분이니 이렇게 공경하고 있는걸요.”

“예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가 말하다 말고 에리히를 보았다.

“네게도 이런 식이니?”

“저는 오히려 매일 쥐어뜯기고 삽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클레어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반박했지만, 에리히는 정색하고 대꾸했다.

“부정하려고? 네가 내 몸에 낸 상처가 한둘도 아닌데…….”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예요!”

클레어가 소리를 지르며 그의 팔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에리히가 이것 보라는 듯이 빅토리아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사이가 정말 좋구나. 에리히가 연애를 했다고 해서 믿지 않았는데.”

“무슨 소문을 어떻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리히가 절 찍어 놓고 괴롭혔던 거예요!”

“그러면 넌 괴롭힘 당하면서 기뻐했단 소리군.”

“……내가 미쳐, 진짜.”

클레어가 말을 말자면서 홱 돌아섰다. 빅토리아 대공이 웃었다.

“소심해서 기가 죽을 것 같진 않구나.”

“기를 죽일 수 있다면, 제가 몇 년 전에 찌그러뜨려서 주머니에 넣었을 겁니다.”

에리히가 대꾸했다. 그래서 대공이 또 웃었다.

“주머니?”

“중요한 건 숨겨 두고 혼자 보는 게 제일 나으니까요. 안전으로 보나 뭐로 보나.”

물론 그렇게 하면 클레어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주머니 밖으로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주머니를 통째로 폭발시킬 것이다.

그러니까 반했다. 왜 자꾸 숨으려 하냐고 들여다보다가 홀렸다. 자신의 것이 아닐 때부터 꺼내서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선명하게 세상에 드러나자 한 번씩 숨기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게 이상했다.

이왕이면 침실에.

그랬다가는 달콤하게 머리털을 쥐어뜯기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 가죽이 벗겨질 것 같긴 했다.

그때 품었던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조금 달랐다. 그녀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리기보다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만족감이 차올랐다. 결혼해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늘 폭발할 것 같은 무언가가 목구멍 밑부터 가슴 아래까지 들어차서 사람을 들쑤시곤 했었는데 말이다.

‘아, 터진 것은 내 쪽이었군.’

에리히는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달았다.

그가 무심결에 입술에 웃음을 머금자 클레어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왜 또 웃어요? 또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네 주머니에 들어 있던 거라는 이야기를 해 줄까 보냐.

클레어가 그걸 알려면 적어도 자신보다 오래 살면서, 좋은 청력도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어흠.”

빅토리아 대공이 헛기침을 했다. 클레어는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별것도 아닌데, 부끄럼으로 볼과 귀에 열이 확 올랐다.

빅토리아 대공이 말했다.

“신혼을 오래 방해할 마음은 없으니, 용건부터 마치고 일찍 떠야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모님! 이왕 오셨으니 천천히 온천욕을 즐기고 가셔야죠.”

“……그렇게 하십시오.”

에리히의 대답은 적지 않게 떨떠름해 보였으나, 빅토리아 대공은 점잖은 사람답게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에리히는 자리를 떴다. 빅토리아 대공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클레어, 자네가 보내 준 제안서를 읽어 보았는데.”

“네.”

클레어는 긴장한 채 빅토리아 대공을 바라보았다.

“제안 자체는 흥미로워. 선주 연합에서 보험을 만들어서 사고에 대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보험을 다시 영주에게 재보험을 들게 하겠다니.”

“요즘 터지는 해상 사고는 옛날과 규모가 다르니까요.”

클레어는 단정하게 말했다.

증기선이 생기면서, 해운의 발달이 눈부셨다. 배를 타고 여행하는 승객의 수도 늘었다.

법률가의 수가 늘어난 것은 선주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승객에게 변호사를 쓸 수 있는 신분과 돈이 있으면, 사고 배상 책임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선주 연합이 상호 보험을 만들고 있다고 해도, 피해 사건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죠. 1차적으로는 사고를 당한 선원이나 승객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선주 연합이 휘청거리면서 아예 해운 자체가 쪼그라들 수도 있어서 그게 걱정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네. 자네 제안이 그것을 보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클레어의 대답에 빅토리아 대공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왜 굳이 자네가 그런 일에 끼어들지? 델포드는 바다를 끼고 있지 않고, 클라우제너에도 큰 항구는 없어.”

클레어가 빙긋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질문에 대답을 갖고 있었다.

“돈 때문에요.”

그게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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