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99/263)

100화

26. 루덴도르프

잘츠기터에서 루덴도르프까지는 철도가 직행으로 놓여 있다.

루덴도르프 후작령은 교통의 요지도 아니고, 하다못해 델포드 남작령처럼 땅끝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놓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역이 생긴 것은 아우구스타 때문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어업항 사업 때문이었다.

항구 개축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도로를 정비하고 철도를 깐 것이다.

클레어는 루덴도르프 항구를 크게 증축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기차역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에리히는 그녀의 의심을 부정했지만 말이다.

“루덴도르프의 항구는 꽤 괜찮은 편이야. 후작의 운영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적합성 기준이 황후 주변 사람에게만 낮다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건 부정할 수 없군. 옳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오로지 레이디 아우구스타의 봉사에 보답하기 위해 결정된 일도 아니라는 뜻이지.”

“사업을 중간에 멈추게 할 수도 없고요.”

이미 철도까지 뚫린 마당이니까.

원래 여행 일정대로라면 다음 행선지는 클라우제너 본성이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계획을 바꿔 루덴도르프행을 결정했다.

루덴도르프에서의 일이 급한 것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일정을 모두 마치고 에리히와 함께 잠깐 바다 구경을 할 겸 들르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빅토리아 대공이 재보험 사업을 처리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루덴도르프로 먼저 가기로 했다.

어차피 한번 가야 한다면, 그녀가 있을 때가 낫다. 클레어는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빅토리아 대공이 겉으로는 차가울지언정 냉혹한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다.

보수적이고 로멜 우월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그러나 지위가 곧 상대를 억압할 권능이라고 믿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모님은 기품이 있는 분이지. 아편에 대해서라면 아마 피운 자의 잘못이라고 하시겠지만, 아이를 해치는 것을 두고 볼 분은 아니야.”

에리히와 클레어는 그 점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상대가 고귀한 핏줄을 가진 혈육이라면 더욱 소중히 여길 사람이었다.

“내게도 애를 많이 쓰셨지만, 제러드를 많이 사랑하셨지.”

에리히는 그렇게 덧붙였다. 추억담을 말한다기보다는 사실 관계를 전달하는 건조한 어투에 클레어는 약간 웃고 말았다.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편애보다 당신 성격 문제겠어요.”

“편애라고 한 적 없어.”

“편애당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 같긴 하지만.”

하긴, 클레어가 어린 에리히와 빅토리아 대공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봐도 그다지 다정한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에리히는 노예단 색출 문제를 위해 잘츠기터에 남아야 했다.

그렇다고 클레어 혼자 갈 수는 없었다. 한번 크게 울리고 나니 도무지 엘리엇을 떼어 놓고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빅토리아 대공과 함께 가는 게 제일 나았다. 엘리엇을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이모할머니! 이모할머니! 저번에 있잖아요. 아빠가 나 기차 앞에 세워 줬어요!”

지치지도 않고 엘리엇은 그 이야기를 했다.

“와아아앙 하고 입 벌리면 바람이 알사탕처럼 입에 들어와요!”

빅토리아 대공은 굳은 듯한 입가를 끌어 올리고 엘리엇의 손을 쥔 채로 벌써 스무 번은 들었을 이야기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클레어는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천사가 나한테만 천사가 아니라니까.’

엄격한 빅토리아 대공도 며칠 만에 흐물흐물 녹여 버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마음, 몹시도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고슴도치라서가 아니라 엘리엇은 진짜 함함한 아이였다.

역까지 배웅 나온 구스타프가 설명했다.

“루덴도르프 역에 도착하시면, 마중 나와 있을 겁니다. 막시밀리안 경이 한발 먼저 출발하여 그쪽에서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막시밀리안 경이 여기까지 왔어요?”

클레어의 질문에 구스타프 대신 에리히가 대답했다.

“너와 엘리엇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빅토리아 대공 전하도 같이 가시는데, 뭐 별일이 있으려고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막시밀리안을 옆에서 떼어 놓지 말고.”

“노력할게요. 별일 없을 거예요. 전면에 나설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녀는 실무를 하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라 콜베르크 광산의 사정을 자연스럽게 루덴도르프 후작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다.

또한, 헤르만 경과 ‘그놈’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건 그냥 가기만 해도 성사되는 일이다. 그러니 만찬에나 참석하고 엘리엇과 실컷 놀 작정이었다.

클레어가 빙긋 웃었다.

“하필 루덴도르프부터 시작하는 건, 바다가 있기 때문이죠. 겨울 바다가 보고 싶었거든요.”

“……바다에 간 적이 있었나?”

에리히가 잠깐 머릿속으로 과거를 되새겨 보며 물었다. 델포드는 내륙 지방이고, 수도도 그랬다.

바다까지 나가려면 꽤 멀리 나갔어야 할 것이다. 남부에도 주요 항구 쪽에는 모두 철로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클레어가 가볍게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에리히는 눈에 힘을 주었다.

생글거리는 웃음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있으면 뭐 어때서요?”

“뭐라고 하지 않았어.”

“겨울 바다가 없던 감정도 생길 만큼 낭만적이긴 하죠.”

클레어의 미소에 여유가 넘쳤다. 에리히는 자신이 신경 쓰는 부분에 대해 그녀가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클레어가 생글거리고 웃고 있는 게 화가 나서 손목을 움켜쥐었다. 클레어가 조금 놀란 듯이 손을 떼려고 했다.

그는 오히려 반대쪽 손까지 움켜쥐고 클레어를 끌어당겨 눈을 맞췄다.

“콧대 부러질 놈은 만들지 마.”

“글쎄요? 루덴도르프까지 가서 바다도 보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을 생각은 없는데?”

그러면서 클레어는 달아나려는 듯이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구두 앞코가 에리히의 발 사이로 들어갔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려고 애쓰는 대신 가볍게 발끝을 세우고 에리히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이 남자가 귀여워 보이는 날이 올 거라고 8년 전의 자신에게 말하면, 제정신 차리라고 혼날 것이다.

“내가 납작하게 하고 싶은 콧대도 하나밖에 없고.”

다음 순간 벌어졌던 입술과 혀가 단숨에 삼켜졌다.

에리히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클레어는 숨을 할딱거렸다. 도발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깍지 끼어 잡힌 손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손바닥 안에 열과 땀이 고였다.

해방된 쪽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결국 옷깃을 잡고 매달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에서 힘이 풀리기 전에 에리히가 허리를 감아 지탱했다. 그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물었다가 놓았다.

“그만해요. 기차역에서.”

“누가 먼저 시작한 일인데.”

“뽀뽀랑 키스랑 같나.”

“아내를 먼저 보내면서 키스조차 하지 말란 건가?”

수도나 아렌에서라면 작별하는 커플들이 한 시간쯤 키스하고 있는 일도 흔한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물론 이곳은 로멜이었다.

다들 점잖게 눈을 돌려 주었다.

“금방 따라갈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에리히는 거칠게 말하고, 클레어의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스르륵 빗듯이 가슴 위까지 쓸어내렸다. 클레어의 눈이 그 손을 따라 내려가다가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숨이 조금 가빴다. 클레어는 그것을 애써 내리눌렀다. 이제 곧 기차에 올라야 했다.

뿌우우 하고 기관차 굴뚝에서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엘리엇이 폴짝폴짝 뛰어왔다.

“아빠! 진짜 같이 가면 안 돼요?”

“중요한 일만 마치고 바로 따라갈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클레어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이었으나, 기다리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달랐다.

“아빠 없는 동안에 네가 엄마를 지켜야 한다.”

“응!”

엘리엇이 결의에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에리히가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한테 무슨 약속을 시키는 거예요?”

“덤비는 놈은 전부 뭉개 버려.”

“방금은 엄한 놈 코뼈 걱정을 하더니. 너무 걱정 말아요. 우아하고 얌전한 귀부인 노릇을 하고 있을 테니까.”

클레어는 웃고는, 엘리엇을 안아 올렸다.

엘리엇이 에리히에게 팔을 내밀었다. 클레어가 작별 키스를 할 수 있도록 몸을 내밀어 주자 엘리엇이 몸을 들썩이며 에리히의 뺨에 입 맞추었다.

이럴 때 에리히는 여전히 약간 어색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엘리엇의 뺨에 키스를 되돌리고, 클레어의 뺨에도 키스했다.

“이제 그만 가자.”

이러다가 끝이 없을 것 같아 빅토리아 대공이 끼어들었다.

“클레어와 엘리엇을 잘 부탁드립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빅토리아 대공이 어이없다는 듯이 에리히를 쳐다보고는 먼저 기차에 올랐다.

클레어가 뒤따라 기차에 올랐다. 엘리엇이 그녀에게 안긴 채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에리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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