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클레어는 어이없는 눈으로 막시밀리안을 쳐다보았다. 막시밀리안은 표정에 미동 하나 없었다.
“얼마 줬어요?”
“얼마든, 각하의 용돈에서 쓰신 것이니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와, 용돈. 그거 얼마인지 정말, 정말, 정말 궁금하네요.”
“자질구레하게 쓰는 돈은 다 용돈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클레어 님께서 궁금해하시면 그렇게 대답하라고도 지시하셨습니다.”
비로소 막시밀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저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클레어 님. 호텔이나 남의 집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소유한 단독 건물이 보안을 유지하기 좋습니다.”
“아, 그건 그렇군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도 아니라 엘리엇까지 있으니 그게 낫긴 나았다.
“그냥 며칠 묵을 곳인데 사 버린다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뭐, 그 정도 돈은 그 사람에게는 용돈이 맞겠죠.”
전 같으면 반발심이 먼저 들었을 텐데, 이번에 제일 먼저 한 생각은 그 용돈 지갑 좀 까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인장 반지도 받았었으니까, 용돈의 생살여탈권도 나한테 있는 거 아니야?’
쓰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자신더러 관여하지 말라니, 그건 아니지.
어차피 쌈짓돈을 주머니로 옮겼다가 다시 쌈지로 넘기는 일이었지만, 에리히에게 용돈을 주겠다고 말할 생각을 하니 왠지 비죽 웃음이 나왔다.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이왕이면 나도 뭔가 하나 사 줘야겠다.’
그것도 에리히에게는 눈깔사탕 교환식처럼 여겨질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클레어는 그 대화를 마친 후에야 시선을 돌렸다.
막시밀리안 뒤로 도열한 호위들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 서성이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클레어는 이제 가자며 칭얼대는 엘리엇을 떼어 막시밀리안에게 맡겨 놓고 그쪽으로 향했다.
“루덴도르프 후작가에서 오신 분들이신가요?”
“아, 네. 황공합니다. 블룸 남작가의 요안나라고 합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여자가 황급히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를 올렸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환영하러 와 주셨군요.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요안나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은 사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막시밀리안이 이미 한 번 후작의 초청을 거절했다. 신혼여행이니 다른 가문과 교제하기보다는 밀월을 보내고 싶다는 공작 부부의 뜻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영지의 경계를 넘어설 때 무기를 풀어 영주관에 맡기고, 영주에게 인사를 올리는 게 당연한 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먼저 온 막시밀리안이 대신 인사하고, 적절한 선물까지 주며 양해를 구했다.
기차역까지 쫓아가 붙드는 것은 점잖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은 요안나에게 간곡히 말했다.
[이번 광산 일 때문에 호르스트가 미움받고 있는 걸 너도 알잖니.]
[호르스트 경이 미움을 받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아니야. 그이 마음은 내가 더 잘 알아. 요즘에 그이는 호르스트를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일이 빨리 풀리지 않으면 더더욱 그 애 탓을 할 거야. 게다가 헤르만은 공작 부부와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니!]
요안나가 생각하기에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지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수도에 있던 헤르만이, 돌아오는 길에 기차에서 공작 부부와 인연이 생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루덴도르프 후작이 일이 안 풀리면 남 탓을 하는 것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누가 뭘 어쩔 수 있겠는가?
헤르만을 다시 후계자 자리에 올릴 게 아니라면, 어차피 호르스트가 후계자다. 좀 미움받더라도 조용히 웅크리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니까 클라우제너 쪽 인연을 우리가 가져와야 해. 내가 공작 부부를 초청하는 데 성공하면, 그이도 다시 생각하지 않겠니?]
[글쎄요.]
[그리고 그 인연으로 광산 일이 잘 풀리면 호르스트의 공적이 될 거고!]
그래서 찾아오긴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될 법하지 않았다.
로멜 귀족인 요안나는 소개장 한 장 없이 공작 부부에게 말을 걸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했다. 그것도 어디 파티장에서가 아니라 다 노출된 공공장소에서.
클라우제너의 호위들에게 가로막히고 나서는 수치심으로 온몸이 홧홧했다. 이렇게 공작 부인이 상냥한 얼굴로 먼저 말을 걸어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무례를 저질렀는데, 이처럼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뜻으로 마중 나와 주신 건데요. 무례라니요.”
클레어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요안나가 아직도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기에 일어나라는 뜻으로 그런 것이었는데, 요안나는 오히려 그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더 수그리고 아예 한쪽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절을 했다.
“괜찮아요. 기차역에서 이렇게까지.”
클레어는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 올렸다. 요안나가 당혹한 듯 수줍은 듯 발개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렌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다. 아렌인들은 품위 없고, 감정적이고, 부끄럼을 모르는 천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몸을 만지거나 거리를 좁혀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런 편견은 남자에게도 적용되지만, 대체로 여자에게 더 비난의 시선을 던지게 했다.
심지어 요안나는 막내 남동생으로부터 더 나쁜 소리도 들었다.
[델포드? 하, 걔가 그럴 줄 알았지.]
[그게 무슨 소리니?]
[아카데미에서부터 그렇게 공작에게 꼬리를 치더니, 대성공했어, 아주. 예쁘지도 않은 게 나한테는 징하게도 비싸게 굴더니. 썩을 년.]
사실 막내 남동생은 남 욕할 자격 없는 난봉꾼에 불한당이라, 요안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직접 보니 더 그랬다. 이렇게 아름다운 데다가 우아하고 상냥한 분이 아닌가.
난처해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게 왜 천박한 일이겠는가.
예쁘지도 않다는 남동생의 말 역시 완전히 틀렸다.
늘씬하게 뻗은 몸이 시원스러워 보였다. 햇빛을 반사하는 흰색 데이 드레스는 얼핏 단출하고 소박해 보였지만, 도톰하면서도 가벼워 보이는 고급 원단이었다.
사람이 이처럼 환하게 보이는데, 전통적인 미인상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생동감 어린 낯빛은 화사하고, 적갈색 머리칼은 창백한 북방의 겨울 하늘에 불꽃처럼 선명하게 비쳤다.
요안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시선이 빨려 들 듯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레어는 태연하게 말했다.
“후작 부인께서 마음 써 주신 덕분에 이곳에 있는 동안 평안할 것 같아요. 감사의 말씀을 전해 주세요.”
“아……. 꼭 두 분을 초청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요안나는 빨개진 채로 애써 말했다.
“자작나무 숲이 딸린 별채를 치워 두었습니다. 클라우제너의 상아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루덴도르프 영주관도 잘 지어진 건물이고, 별채도 꽤 낭만적인 곳이라 두 분 신혼에도 방해되지 않을 겁니다.”
“음. 후작 부인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한다고 전해 주세요. 아무래도 아이도 있고, 바다를 보러 온 것이라 지금은 사양하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 전하겠습니다.”
요안나는 반쯤 안도하면서 대답했다.
그때였다. 요안나의 일행들이 움찔거렸다. 훤칠한 검은 머리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성큼성큼 앞서 나왔다.
헤르만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제가 소식이 늦어 자칫하면 부인께서 오신 줄도 모를 뻔했습니다.”
그가 흘깃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요안나는 시선을 돌렸다.
클레어는 그 신경전을 알아챘다. 후작 부인이 자신의 도착 정보를 헤르만에게 숨기려다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미 계획은 벌여 놓았고, 자신이 직접 관여할 일은 없다.
헤르만은 그 안에서 자기 몫을 직접 챙겨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였다.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오랜만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좀 어색하지 않나요?”
“다시 만나 뵙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하루가 천 일처럼 느껴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헤르만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클레어의 손을 가볍게 잡아 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그 입술은 보통의 인사보다 조금 길게 머물렀다.
“마치 ‘나’를 다시 만나는 게 목적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헤르만이 눈꼬리를 날아갈 정도로 접어 올리며 달콤하게 웃었다.
노림수이긴 할 것이다. 헤르만의 목적이 진짜로 자신을 유혹하는 게 아니라, 후작가의 다른 식솔들 앞에서 클라우제너와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건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후작 부인이면 헤르만과 적대 관계였다.
미운 놈들 앞에서 높으신 분과 친한 척하는 게 얼마나 꿀맛일지, 해 본 적은 없지만 사실 상상만으로도 설레긴 했다.
‘그러다 코뼈 아작 날 텐데.’
클레어는 새삼스럽게 그의 오뚝한 코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남의 코지만, 그래도 모처럼 잘생긴 코이니 망가지는 건 좀 아까울 것도 같았다.
안 그래도 헤르만은 이미 미움을 산 상태다.
지난번 편지를 낭독하면서 에리히는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이자는 죽고 싶은 모양이군.]
청록색 눈동자의 사신 운운한 것이, 에리히의 눈에 질투의 초록색이 서릴 거라는 의미라는 건 굳이 문학적 감수성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 죽을까 봐 겁난다는 건지, 그렇게 죽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더니, 아무래도 후자였던 것 같다.
그것 말고는 별말도 없었는데 말이다. 은근 질투쟁이였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웃음이 입가에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