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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2/263)

103화

솔직히 낭독하게 해 준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에리히가 진짜로 편지를 읽을 줄은 몰랐다. 예의 바르다기보다는 에티켓에 까다로운 사람이니, 남의 편지는 읽을 수 없다고 끝까지 사양할 줄 알았다.

에리히를 꽤 잘 안다고 생각해 왔는데,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되는 점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자꾸 도발하게 된다. 그랬다가 자기 쪽이 죽어 나가기 일쑤인데도 말이다.

아니, 진짜 조심하긴 해야 했다. 도발은 본인에게 하는 걸로 충분했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헤르만이 무심코 그녀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클레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지금은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지루함이 한계에 도달한 엘리엇이 칭얼거리며 막시밀리안에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클레어가 말했다.

헤르만이 고개를 숙였다.

“막시밀리안 경이 철저하게 준비한 것 같아 영주관에 머무르시라는 청은 못 드리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저희 가문을 방문해 주십시오.”

“남편이 도착하면, 그때 만찬에 초대해 주세요.”

그 말에 헤르만이 이채를 띠고 클레어를 보았다.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까?”

“콜베르크 광산에서 사고가 있었거든요. 후속 처리가 남아 있는 모양이에요.”

“아.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폭약 사고였다지요? 걱정이 크셨겠습니다.”

“광부들을 새로 고용해야 한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클레어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나 후작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였다.

헤르만이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오신 후에 정식 초청장을 가지고 방문하겠습니다. 그 전에라도, 티타임에 초대해 주시겠습니까?”

클레어는 으음 하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의 코뼈도 코뼈지만, 내 남편이 남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면 좀 곤란했다.

“권위 있는 귀부인의 호감을 사서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싶은 거라면, 나한테 그러는 것보다 훨씬 효과 좋을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예?”

헤르만이 되물었다.

때마침 빅토리아 대공이 객차에서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내렸다. 그녀는 기차 여행에 지친 탓에, 짐이 모두 옮겨질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헉!”

요안나가 눈에 띄게 놀라며 무릎을 구부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후작가 일행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막시밀리안과 클라우제너의 호위들은 그러지 않았다. 지켜야 할 여주인이 있는데, 함부로 몸을 숙여 움직임을 부자유스럽게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가슴에 손을 올리며 짧게 황족에게 예를 표했다.

당황한 기관사와 짐을 나르던 일꾼들이 두리번거렸다.

클레어가 헤르만을 향해 빙긋 웃었다.

“여자는 어리든 나이 들었든 미남을 좋아하지요. 꼭 연애적인 의미와 상관없이요.”

“하하.”

헤르만이 약간 허탈하기까지 한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이지, 부인께는 당해 낼 수가 없군요.”

“네?”

“빅토리아 대공 전하라면, 온 힘을 다해 눈에 들도록 애써 봐야 마땅하지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클레어의 손에 다시 쪽 소리 나게 키스하고, 빅토리아 대공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클레어는 그가 빅토리아 대공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

이 정도 기회를 주었으면, 자신은 도리를 다했다. 이제 빅토리아 대공을 포섭하여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것은 헤르만 스스로 할 일이다.

‘고귀한 레이디를 모시면서 어쩌고 하는 것도 다 사귀기 전 이야기지.’

하지만 상대가 빅토리아 대공이라면 개껌처럼 물어뜯길 염려는 없다. 노부인을 잘 모시는 젊고 잘생긴 남자는 그저 어디 가서도 빛이었다.

클레어는 막시밀리안에게 칭얼대고 있는 엘리엇에게 손을 뻗었다.

“자, 그럼 우리는 갈까?”

“우웅.”

엘리엇이 눈을 비볐다. 졸린 모양이었다.

저택은 훌륭했다.

클레어가 기대한 것은 멋진 뷰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바닷가에 면한 절벽 위에 있어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수평선이 보였고, 반대쪽으로는 너른 평야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찻길이 보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원이 작다 했더니, 그 끝에서 오솔길이 해변까지 이어져 있었다.

“와!”

클레어는 감탄했다. 길이 가파른 편이지만, 3분이면 모래사장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었다.

“엘리엇이 내려와 놀기 좋겠군요. 여름에는 사람이 많겠지요?”

“사유지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지 않다면 여름 휴가에도 한번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클레어는 멈칫했다.

“사유지라니. 샀어요? 어디까지?”

막시밀리안이 해변의 한쪽 끝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끝은요?”

막시밀리안이 끝을 알려 주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각하께서 주신 예산을 꽉 채웠습니다.”

“예산이 아니라 용돈이었죠.”

막시밀리안이 그 말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에리히와 다른 의미에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클레어는 새삼스럽게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루덴도르프 후작가는 돈이 급하고, 해변은 돈이 되는 땅은 아니니까요.”

“막시밀리안 경이 흥정에도 유능한 줄은 몰랐네요.”

“딱히 흥정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명을 받은 대로 바다에 면한 저택과 해안 일부를 사들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망하는 가문은 망하고, 흥하는 가문은 더 흥하는 거구나 싶네요.”

클레어는 사박사박 모래를 밟으며 말했다.

해안의 모래는 흰빛이었고, 바다는 맑았다. 북해이니 아마 여름 기간은 짧겠지만, 관광지로서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남쪽보다 선호되지는 않겠지만, 그쪽은 너무 머니까. 자주 오지도 못할 텐데, 여기다 리조트를 세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울타리를 치려고 합니다.”

“일부만 하죠.”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

“저기서부터, 저기 정도까지?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아마 기껏해야 영지 사람들이 여름에 놀러 오는 걸 텐데요.”

“알겠습니다. 보안 문제가 있으니까, 저택 인근만 확실히 막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클레어는 그밖에도 저택 보안 문제에 대해 막시밀리안과 몇 가지 의견을 더 나누면서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띈 것은 1층 테라스로 나왔을 때였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등 뒤 하늘은 검푸른색으로 물들고, 정면의 바다는 불타는 듯한 붉은색이었다.

바다의 일몰을 본 것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전생의 일이라, 클레어는 잠시 난간을 짚은 채 그 광경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파도 사이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헝겊 뭉치나 뭐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쓰레기가 떠밀려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경, 저거, 사람 아니에요?”

“예?”

한 보 뒤에 서 있던 막시밀리안이 놀라서 클레어의 곁으로 나왔다.

그는 클레어보다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입니다!”

“구해야죠!”

이 날씨에 북해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막시밀리안이 해안을 순찰하고 있던 경비원에게 먼저 소리 쳐서 알렸다. 클레어는 그의 명령이 끝나기 전에 먼저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객실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뜨거운 물을 준비해요! 그리고 의사를 불러요!”

“마님?”

하녀들은 깜짝 놀랐지만, 클레어가 시킨 일을 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클레어는 숨이 턱에 닿도록 밖으로 뛰어나갔다. 계단 앞에서 막시밀리안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가 해변에 당도했을 때는 대여섯 명의 경비원들이 우르르 물에 빠진 사람과 그의 머리를 잡은 경비원을 함께 끌어내어 물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하아, 살아, 살아 있어요?”

“심장이 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경비원 하나가 구조해 낸 사람을 바닥에 눕히고 몇 번 가슴을 눌러 압박했다.

마침내 구조된 사람이 쿨룩쿨룩 입에서 물을 뱉어 내고 숨을 쉬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할딱거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다행이에요.”

그녀는 황급히 해변을 둘러보았지만, 달리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일몰이 끝나 어두워서, 사실 뭐가 있어도 분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막시밀리안 경, 일행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색팀을 편성해 주세요. 안전하게요.”

“예.”

“그리고 여러분은 모두 안으로 들어가요. 뜨거운 물을 준비시켜 놨어요.”

경비원들이 명령에 따라 흩어져 움직였다.

클레어는 숨을 조금 고른 뒤 한발 늦게 막시밀리안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객실에는 이미 뜨거운 물과 난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경비원들은 각자 몸을 데우러 가고, 물에 빠졌던 사람은 객실로 옮겨져 의사가 보고 있었다.

클레어는 제발 무사하기를 빌면서 그쪽으로 향했다. 만일에 사람이 죽는 순간을 목격한 거라면, 정말 기분이 찝찝할 것 같았다.

“어떤가요?”

“체온이 너무 떨어져서 일단 따뜻한 욕조에 담가 두었습니다. 살아날 겁니다.”

하녀 한 사람이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아까는 다급하여 확인하지 못했는데, 상대는 젊은 남자였다.

본래 맑은 은발이었을 머리칼이 더러워진 채 헝클어져 있었다.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클레어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막시밀리안이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클레어 님.”

그가 몸을 구부려 클레어의 귀에 대고 다급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사람, 리누스 황자입니다.”

클레어는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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