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리누스 황자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물에 빠져서?
클레어는 의사에게 환자를 잘 돌보라고 지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을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
“확실해요?”
“마지막으로 본 것은 5년 전입니다만, 확실합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왔으니까요.”
“하긴. 그렇죠? 막시밀리안 경은 쭉 에리히의 측근이었으니까.”
황자도 자주 만나 보았을 것이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물었다.
“달리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다 말해 줘요.”
“특별한 정보는 없습니다. 리누스 황자는 여태까지 주로 에른스트 공작령에 있었습니다. 황후 폐하의 뜻이었습니다.”
“에른스트 공작령에 있었다는 건 나도 알아요.”
처음에 리누스 황자가 공작령으로 옮겨진 것은 안전을 위해서였다. 제러드 황태자가 암살당했는데, 리누스 황자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당시에는 황태자파의 보복을 염려했을 것이다.
클레어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인상을 쓴 채 생각에 잠겼다.
‘아직까지 거기 있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주 납득 못 할 바는 아니었지. 워낙 말이 많았으니까.’
황제에게 다른 자녀가 없으니, 결국 리누스 황자가 황제가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말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로멜-아렌 계승법에 어긋난다. 그렇기에 리누스 황자는 황위 계승 서열상 빅토리아 대공보다 뒤로 밀린다.
그나마 맨프레드 대공과 에리히의 모친이 모두 로멜 귀족과 결혼했기에 리누스 황자는 2순위를 지킬 수 있었다.
아직 거기까지 따져 본 일은 없지만, 자칫하면 자신과 에리히 사이의 아이보다도 밀릴 가능성이 있었다.
형제자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리누스 황자는 아직까지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
만일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그가 유일한 황자였다면 굳이 계승법 같은 것을 들먹이는 사람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제러드 황태자는 암살당했다. 그 일을 누가 저질렀는지는 명백했다. 증거가 없을 뿐이다.
죽은 헨리에타 황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출산 후 쇠약해진 채 병들어 죽었지만, 제러드 황태자가 죽은 뒤로 그녀도 사실은 암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소곤소곤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렇다고 황제가 리누스 황자를 총애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아예 밖에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그러기 전에도 둘째 아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가끔은 존재를 완전히 잊은 듯이 보일 때도 있었다.
‘복잡한 말이 나오게 만드느니 그냥 수도에서 떼어 놓는 게 나았겠지.’
황자에 대한 에른스트 공작가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하는 수단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스무 살이 되었으니, 슬슬 황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일 거라고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리누스 황자는 가장 강력한 황위 계승권자야.’
그 누구도 그의 계승권에 굳이 순위를 붙이지 않았다. 황후가 무조건 그를 황제의 자리에까지 밀어 올릴 테니까.
클레어는 무심코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가, 눈앞에 드리워진 손그림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막시밀리안이 주먹을 쥐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는 입술에 상처가 날 겁니다.”
“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피는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누스 황자가 왜 루덴도르프에 있을까요? 여행 중이었던 걸까요?”
그래도 이상하긴 매한가지였다. 황자가 바다에 빠졌는데,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잠시 후에 수색팀장이 보고를 올렸다.
“인근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시내 쪽에서 사람을 찾는 무리가 있는지도 알아봐 주세요.”
“예.”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호위와 시종은 있었겠지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막시밀리안에게 말했다. 막시밀리안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황자의 상태가 바뀌거나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먼 거리를 움직이신 데다가 일이 많아 피곤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막시밀리안이 팔을 내밀었다. 맞는 말이었기에, 클레어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경은 안 자려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체력이 있으니까요. 오늘 밤에는 비상시를 대비해서 명령권자가 깨어 있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러네요. 미안해요.”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막시밀리안은 그녀를 침실까지 바래다주고 물러갔다.
클레어는 겉옷을 벗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굴러다니고 있는 엘리엇의 머리를 괜스레 어루만졌다.
악랄한 생각이 머릿속을 잠시 스쳤다.
대신 황제의 관을 거머쥘 사람이 없어도, 황후가 계속 미친 짓을 할까?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나도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야.”
클레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엘리엇을 끌어안고 누웠다.
그날 밤에는 진흙탕 같은 꿈을 꾸었다. 클레어는 자신의 머리와 같은 높이에서 연꽃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연꽃과 달리 그녀의 발은 진흙탕 바닥에 닿지 않아서, 조금씩 몸이 잠겨 갔다.
에리히가 이렇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마사는 침실 창문의 커튼을 걷고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머, 주인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으응, 내 얼굴이 왜?”
클레어는 좀처럼 졸음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눈에 풀을 바른 것 같았다.
“눈이 엄청 부었어요.”
“피곤해서 그런가 봐.”
“그럴 만도 하시죠. 그럼 더 주무세요.”
“으음…….”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확인해야 할 것들이 생각나 클레어는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마사, 어젯밤에 있었던 일 이야기는 들었어?”
“아, 바다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면서요? 좋은 일 하셨어요. 주인님도 많이 놀라셨죠.”
“응.”
마사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 물에 빠진 사람이 리누스 황자라는 비밀은 지켜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막시밀리안이 그런 것을 놓칠 사람은 아니다. 어차피 리누스 황자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줄곧 수도에 있었던 에리히와 달리 리누스 황자는 어릴 때는 황궁 깊은 곳에 감춰졌고, 열다섯 살 때부터는 에른스트 공작령에 있었으니까.
클레어는 대강 얼굴을 씻고, 일어날 줄 모르고 코를 고는 엘리엇을 마사에게 맡긴 뒤 밖으로 나왔다.
빅토리아 대공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음. 대공 전하께서는 루덴도르프 영주관에서 머물 예정이신 모양이야. 헤르만 경이 마음에 드셨나?”
“알겠습니다. 그러면 식사는 당분간 마님과 도련님 것만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영주관에 한번 방문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아무튼 오늘은 쉴 테지만 말이다.
“환자는 깨어났나요?”
“아직입니다. 상세는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막시밀리안이 대답했다.
“일단 깨어날 때까지, 막시밀리안 경도 쉬어요. 이제 내가 깨어 있으니까.”
“클레어 님.”
“아,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오늘 나는 저택 안에서 널브러져 있을 거니까 진짜로 괜찮아요. 환자가 깨어나면, 경도 깨울게요. 그러면 되지요?”
“알겠습니다.”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리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클레어는 스스로 말한 대로 두어 시간 동안 바다에 면한 테라스에 널브러진 채 파도 소리만 듣고 있었다.
손님이 방문한 것은 그때였다. 외알 안경을 끼고 지팡이를 짚은,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라고 했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셔서요. 그게…….”
하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클레어는 웬만하면 손님을 맞이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응접실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눈에 손님의 정체를 눈치챘다.
“크로지크 노백작님이시지요? 이렇게 뵙게 될 줄 몰랐어요. 반갑습니다.”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작스럽게 방문하여, 이름도 밝히지 않았는데,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로지크 노백작이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며 허리를 굽혔다. 지극히 공손한 자세였다.
“델포드 남작님.”
마치 가신이 주군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클레어는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노백작이 다이아몬드를 매점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아마 계약서를 보았을 때부터 크로지크 백작가의 재정이 자신에게 종속되리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쪽의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으리라.
“루덴도르프까지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인사를 꼭 한번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성사된 일인걸요. 수도에 있는 아드님과도 인사를 나누었으니, 노백작님께서 제게 따로 인사까지 하실 일은 아니에요.”
“부디 말씀 놓으십시오.”
“말을 놓다니요. 가신도 아닌 분에게 그럴 수는 없어요. 부디 고개를 드세요, 백작님.”
“그냥 랄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클레어는 쓴웃음을 지으며 불렀다.
“랄프 경.”
비로소 노백작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