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몇 달 전이었다면, 클레어는 노백작의 이 같은 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양했을 것이다.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은 거둘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사람을 거둔다는 말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권력의 우열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상하가 있는 것과 주종 관계는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힘이 조금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녀는 경우의 수를 셈하는 기계가 아니고, 삶도 체스가 아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편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적대 세력을 줄이는 것밖에 없었다.
크로지크 백작가가 다이아몬드 사업에서만이 아니라 가문 전체의 운명을 자신에게 걸어 준다면, 그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가신들조차도 오래된 주종 관계에서 벗어나려 하는 이 시대에, 새로 귀족 가문 하나를 온전히 따르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크로지크 백작가 같은 오래된 귀족 가문 상대라면, 그 사실만 가지고서도 델포드 남작가의 위상은 몇 단계나 올라간다.
그것을 알기에, 크로지크 노백작도 그녀를 공작 부인이 아니라 남작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에게 백작이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상하 관계로는 자신의 뜻을 다 밝힐 수 없으니까.
‘요한 경을 포섭하려고 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큰일이 될 줄 몰랐는데.’
하지만 그런 마음을 모두 일단 치워 내고 클레어는 평화롭게 말했다.
“요한 경이 누구를 닮아 미남인가 했더니, 백작님을 빼닮았군요.”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형편없는 손자 놈이 귀한 분께 폐나 끼치지 않았을까 늘 걱정이었습니다.”
“폐라뇨. 클라우제너와 크로지크는 이제 둘도 없는 인연이고, 요한 경도 백작님을 도와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놈은 잘 꾸며서 보석상에나 앉혀 놓으면 딱 좋을 놈입니다.”
노백작의 가차 없는 평가에 클레어는 웃어 버렸다. 사실 그녀도 조금 그렇게 생각하긴 했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보다 대단한 재능은 흔치 않은 법이잖아요.”
“그놈이 사람 구실하게 된 것은 남작님 덕분입니다. 이번에 보니, 그간 깨달은 바가 좀 있는 것 같더군요.”
“요한 경에게 너무 가혹하시군요. 수단이 깨끗하지는 못했지만, 자리를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고 했던 것은 아마 가문을 위해서였을 텐데요.”
클레어는 부드럽게 말했다. 노백작이 이채를 띠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요한 경이 제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지요. 황후 폐하 아래 있는 쪽이 훨씬 출세에 가깝고, 위험에서는 머니까요. 제가 크로지크에 제시한 것은 요한 경 개인의 이익보다 가문의 이익 쪽이 아니었던가요?”
그 말에 노백작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 녀석이 어리석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그 결과, 남작님과 이렇게 인연이 생겼으니, 결과적으로 훌륭하게 해낸 셈이기도 하고.”
“껄끄러워하셨던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조금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클레어의 말에 노백작이 껄껄 웃었다.
“아마 이제는 할아비가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보다 남작님이 수고했다고 말씀해 주시는 걸 더 기뻐할 겁니다.”
“서운하지 않게 하려면, 제가 노력을 많이 해야겠군요.”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다과가 나왔다.
“이 일에 크로지크 가문의 이름을 빌려 달라는 제 무리한 청을 들어주시는 걸로도 모자라, 자세한 내막을 모르면서도 이렇게 직접 와 주셨으니, 저야말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실은 어떻게든 남작님께 은혜를 입혀서 저울추를 맞춰 볼 작정이었습니다.”
노백작이 버릇인 듯 외알 안경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저같이 은퇴한 사람까지 움직이면, 부탁받은 일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티를 낼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남작님께서는 연장자에게 마음을 쓰시니까요.”
“요한 경이 그런 말을 하던가요?”
클레어는 멋쩍게 웃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신분 높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에게 수그러지는 마음이 있었다.
아예 확실하게 자기 가문 사람이라면 좀 나았다. 마음과 별개로 지난 20년 동안 확립해 온 상하 관계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래도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시작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노백작이나 빅토리아 대공처럼 확실하게 나이도, 신분도 존대할 만한 상대가 편했다.
클레어는 자신이 지나치게 전생에 얽매여 있나 생각할 때도 있었다.
노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귀부인이 자애로운 것은 흠이 아닙니다. 저처럼 이용하려 드는 자만 잘 다스리면 될 일이지요.”
“다스리다니요.”
“제가 늙은 몸을 움직였다는 핑계를 대려다가 결국 남작님께 또다시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가게른 남작령의 역청탄광은 진짜더군요.”
“네. 클라우제너의 보고서에 있었던 내용이에요. 어떠셨나요? 백작님까지 오셨는데도 가게른 남작이 고집을 부린다고 들었는데.”
“결국 남작은 개발 사업에 동의할 겁니다. 루덴도르프 후작도 후작이지만, 가게른 남작가의 가계를 생각해서도 그렇지요.”
“흔치 않은 기회이긴 하죠.”
클라우제너가 이미 확인하고, 한때 해당 지역의 땅을 사들일지도 검토했었다는 것을 안다면, 남작에게도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빚을 내서라도 개발을 시작했으리라.
“그 광산의 지분을 확보할 기회를 주셨으니, 이제 크로지크는 남작님께 이중으로 은혜를 입은 셈입니다. 다만, 일을 진행시키기 전에 먼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노백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법입니다. 가게른 남작과 루덴도르프 후작 사이에 분쟁이 생기겠지만, 역청탄광이 실제로 채굴을 시작하고 금고가 차오르면 금세 잊어버릴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그렇게 되면 차남 호르스트 경이 오히려 확고하게 후계자 자리를 굳히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에 요한이 클레어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헤르만과의 사이를 은밀히 주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목적은 당연히 헤르만을 통해 후작가를 쥐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대로 사업을 진행해도 좋겠습니까?”
“그런 일까지 마음 써 주시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이름을 빌려 놓고 손해를 보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녀는 정직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크로지크 가문의 이름만 빌리고자 했던 것이라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전 루덴도르프 후작이 지금처럼 밀어붙여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작님께서는 후작이 뭔가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루덴도르프 후작령은 지금 항구 증축에 가문의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상황이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남의 광산을 탐내서 무리한 일을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없어요.”
루덴도르프 후작이 어떻게든 문제를 틀어막아도 소용없다. 이미 폭탄을 심어 놓았으니, 언제가 되든 터질 것이다.
클레어는 그것까지 노백작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노백작은 짐작했는지 아닌지 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남작님의 예측을 불신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습니다. 달리 조언 주실 것은 없으십니까?”
“탄광 자체는 충분히 사업성이 있으니, 여유가 된다면 지분을 확보하시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클레어는 일부러 조금 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협상해 낼 수는 있지만, 자금 문제로 확보할 수 없는 지분이 있다면 제가 사고 싶고요.”
“호오.”
“후일에, 후작이 팔아 치우는 지분도 제 몫인 것으로 하겠습니다.”
노백작이 허허, 미소를 지었다.
“그건 조금 아쉽군요. 지금은 크로지크도 자금이 꽤 넉넉하다는 사실을 남작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최초 정보 제공자가 가장 큰 몫을 가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서운한 말씀입니다. 제 노력 여하에 따라 남작님의 지분도 결정되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클레어는 빙긋 웃었다. 이런 협상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루덴도르프가 지분을 내놓게 되었을 때 거기에 누가 영향력을 미쳤는지도 따져 보셔야 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몇 마디 더 응수를 주고받았을 때였다.
똑똑.
클레어가 대답하지 않았는데, 막시밀리안 직속의 보안요원이 들어왔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클레어는 무슨 일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죠. 나한테 일정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렇게 맞이해 주셨는데, 오히려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은 셈이지요.”
“당분간은 이렇게 직접 뵙긴 어렵겠고, 나머지 이야기는 실무자를 통해 하시지요. 앞으로도 뵐 기회가 꽤 있을 겁니다.”
“예.”
크로지크 노백작이 모자를 쓰고 나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남작님을 만난 기쁨에 전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이것을.”
클레어는 그가 건네주는 봉투를 받았다.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요한 놈이 보낸 편지 안에 따로 들어 있었습니다. 실은 이것을 전해 드리러 온 것이지요.”
“고마워요.”
클레어는 노백작이 응접실을 떠나자 곧바로 봉투부터 뜯었다.
노백작이 직접 전하러 왔을 정도라면, 시급하지는 않아도 기밀일 것이다.
『에른스트 공작령에서 2황자가 사라졌습니다. 황후궁에서 크게 당황하고 있습니다. 클라우제너의 움직임은 아직 인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클레어는 나머지 자잘한 소식들을 대충 훑어 읽고 편지를 벽난로에 던졌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서며 보안요원에게 확인했다.
“환자가 깨어났나요?”
“네, 공작 부인. 지금 의사가 보고 있습니다만……. 상세가 썩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그녀는 곧바로 3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