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5/263)

106화

27. 멜랑콜리

낯선 천장이다.

리누스 로멜은, 혹은 리누스 에른스트는, 혹은 그것조차 아닌 리누스는 눈을 반개한 채 생각했다.

호흡이 가빴다. 한 번 새액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쇠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내쉴 때에는 통증이 있었다.

사실 들이쉴 때에도 통증은 있었을 것이다. 냄새가 코를 찔러 별달리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폐렴입니다. 겨울 바다에 빠지셨으니까요.”

누군가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일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죽음을 향해 한 발을 떼면 의사도, 호위도, 시녀도, 시종도 떼를 지어 움직였다. 마치 살점에 달려드는 피라냐 떼처럼.

그렇게 해서 입에 문 살점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향기로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차피 냄새는 모두 착각이다. 자신의 코에 쉬지 않고 나는 피와 쇠 냄새가 가짜이듯이.

그래서 그는 도로 눈을 감았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목숨에 지장은 없는 건가?”

“젊은 분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알았네.”

다시 눈을 뜬 것은 대화하는 목소리 중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섞여 있어서였다.

그는 흐린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방 이쪽저쪽에 시선을 주었다.

찾는 사람은 남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체격이 있었기에, 몇 년 만이지만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 경…….”

성대를 긁듯 잔뜩 쉰 목소리가 간신히 나왔다.

“황자 전하.”

막시밀리안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 곁에, 붉은빛 도는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리누스는 몽롱한 채 물었다.

“내가 왜……? 에리히 형님이……?”

“각하께서는 이곳에 안 계십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여자가 막시밀리안의 말을 막았는지, 막시밀리안이 그냥 말을 멈춘 건지 그는 확실하게 분간할 수 없었다.

여자의 손이 그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한숨이 허공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직 아픈 사람인데요. 자게 내버려 두세요.”

힘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그 손바닥에 짓눌린 것처럼 리누스는 침대에 파묻혀 도로 눈을 감았다.

고열에 시달리는 중인 황자는 곧바로 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클레어 님.”

막시밀리안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불렀다. 클레어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깨어나서 나가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자는 게 나아요. 억지로 가둬 두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클레어는 황자를 내려다보았다.

첫인상은 어리다는 것이었다. 이제 스무 살이고 키도 훤칠한 청년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머릿속에서 적으로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사람을 대면하자 오히려 인상이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넌 죽음인가?]

열에 들뜬 눈으로 황자가 했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그보다, 다른 소식은 없나요? 수색팀이 있을 텐데. 설마 에른스트에서 여기까지 떠밀려 온 건 아닐 거잖아요.”

“호위 넷과 시종 하나가 루덴도르프까지 동행했었습니다. 저쪽에서도 비밀리에 수색 중이라서 사람을 넉넉히 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수색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 올 때까지는 모르는 척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에리히가 올 때까지는 버텨야 해요.”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배송이라고 다시 바다에 던져 버릴 게 아니라면, 결국 걸어 나가게 해야 한다.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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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는 집무실로 들어오다가 은쟁반 위에 수북하게 쌓인 편지 더미를 보았다. 쌓이다 못해 쟁반이 세 개였다.

“한 번 더 걸러.”

에리히는 제일 많은 봉투가 쌓인 쟁반을 보고 짧게 말했다. 비서 하나가 재빨리 그것을 들고 나갔다.

두 번째 쟁반에는 대여섯 장이 놓여 있었다. 중요한 사람에게서 온 편지다.

그는 봉투가 딱 하나 놓인 세 번째 쟁반의 것을 집어 들었다. 클레어에게서 온 것이었다.

겉봉에 수신인이 ‘E.R.K.’라고만 적혀 있었다. 발신인 자리에는 클레어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에리히는 무심코 웃음을 머금었다. 그 수신인 이름만으로도 제법 달콤한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 외의 사람에게는 한 번도 이렇게 이니셜로 서명해서 보낸 적이 없었다.

에리히는 굳이 신분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숨겨야 할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어에게 뭔가를 보낼 때 이니셜로 서명한 것은, 그녀가 화를 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이름이 붙은 봉투가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좀 인지해 주실래요?]

[밀러 교수의 부탁을 전한 것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기숙사 사감장이 직접 갖다주러 찾아왔다고요! 전령이랑 같이!]

클레어는 거의 분통 터져 하며 소리쳤다.

그는 전령이 왜 문제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사감장이 지나친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 행동을 유발한 것이 자신의 서명이라는 것도.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이니셜로만 서명한 뒤 학내 우편으로 보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클레어가 유일한 상대였다. 보통은 그가 클라우제너의 이름으로 서명한 봉투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니까.

그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클레어가 모르는 줄 몰랐다.

“흠.”

이제 와서야 그는 이게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별장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가 있거나, 반대로 그것을 트집 잡아 시비를 걸었을 걸 기대하면서 손수 편지 칼로 봉투를 갈랐다.

그러나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빨리 와 줘요. 당신이 필요해요.』

마지막 줄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흡.”

그의 얼굴이 차갑게 물드는 것을 보며 클라우제너의 행정 장관 제호퍼는 숨을 들이켰다. 그만이 아니라 집무실에 있던 비서와 서기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편지 봉투를 집어 들며 웃을 때만 해도 이상하게 옆 사람까지 간질거렸다. 에리히가 본래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식석상에서 의무적으로 짓는 부드러운 표정 정도는 있지만, 사적인 얼굴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미소는 더더욱. 그나마 최근 수도의 상아궁에서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본 사람이 많지만. 잘츠기터의 영주관에서는 전무했다.

‘진짜로 신혼이 맞나 보네.’

제호퍼 장관은 멍하게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알은척하지 말라는 지시가 공문으로 내려왔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고, 미소가 머물렀던 입가는 평소처럼 냉정하게 굳어졌다.

집무실의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제호퍼 장관.”

“예, 각하.”

장관은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가슴을 베어 낼 수도 있을 것처럼 예리한 공작의 눈동자에 그늘이 져서 더 새파랗게 보였다.

“오래 기다리게 했지만, 내게 시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접견을 끝내야 할 것 같군. 양해하게.”

“아.”

장관은 침을 삼켰다.

언제든 불러 달라거나, 자신이 기다려야 마땅하다거나 하는 인사를 덧붙일 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공작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그것이 아부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무슨 일인가?”

제호퍼 장관이 좀처럼 말을 시작하지 못하자 에리히가 물었다.

“각하께서 시행하신 대규모 감찰 때문에 소란이 좀 있습니다.”

지난주에 신혼여행 중이라던 공작이 이틀 전 갑자기 잘츠기터의 영주관으로 들어왔다.

그 직후에 클라우제너의 보안요원과 감찰관들이 각지의 주요 광산과 공장에 일제히 들이쳐 불시에 대규모 감사를 실시했다.

물론 지금 공작이 하고 있는 일은 공작가의 감찰뿐이다. 다만 그 범위가 단순히 저택 몇 개, 사업장 몇 개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사흘 만에 그의 집무 책상 위에 편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클라우제너는 제국 제일의 공업 지역이자 원재료 산지다. 클라우제너가 멈추면, 공업 전체가 타격을 입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클라우제너 영지 안에는 공작가의 사업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공작가와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질된 경영 대리인도 몇 사람이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콜베르크 광산도 휴업 중이고요.”

“내 경영 방침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졌더군. 감찰은 그 때문이야.”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에리히는 약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늘 내각 구성원을 존중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주머니 속의 편지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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