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에리히가 번거로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제호퍼 장관이 긴장하며 덧붙였다.
“각하께 해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상황을 알고 있는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경을 책망하는 게 아닐세.”
에리히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관의 말이 옳다. 이만한 규모의 일을 하면서 행정 장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노예단의 색출 작업은 대부분 끝났고, 감찰이 시작된 시점부터 비밀을 지킬 수는 없게 되었다.
“직공과 광부에게 아편을 공급하는 대가로 급료를 떼먹는 자들이 있더군.”
감찰 결과, 다행히 클라우제너 안에 들어와 있는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적극적으로 노예단을 이용하고 있는 다른 영지와 달리 클라우제너에서는 영지민을 우선 고용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 많은 사업 속에 하나도 숨어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큰 문제는, 노예단을 고용한 경영 대리인과 알면서도 방치한 중간 관리자들이었다.
감사 과정에서 다른 병폐도 적지 않게 발각되었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에리히가 처리할 것은 이 문제뿐이었다.
“관련자 전부를 해고하실 작정입니까?”
늘어날 실업자의 숫자를 생각하자 아득해져서 제호퍼 장관이 물었다.
“이 계는 불법이 아닙니다, 각하. 계라고 부르는 것에서 음흉함이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본디 채권자가 급료를 압류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나는 경에게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닐세.”
에리히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제호퍼 장관이 더듬거렸다.
“그야,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내가 고용인에게 높은 급료를 주는 것은 자비심 때문이 아닐세. 생산성을 유지하고 영지 전체의 활력을 돋우기 위해서지. 검은 빵과 썩은 물로 연명하는 직공이라도 괜찮다면, 구빈원에서 사람을 꺼내다 썼을 거야. 아편으로 만든 노예의 주인 따위에게 급료를 지불하는 게 아니라.”
제호퍼 장관은 옳은 말이라고 고개를 숙인 수밖에 없었다.
“달리 더 할 말이 있나?”
“혹, 이 감찰을 공작가 밖으로도 확대할 예정이십니까?”
에리히의 싸늘한 시선이 장관의 얼굴을 훑었다. 장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른 지역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지. 염려할 것 없네.”
제호퍼 장관이 아편 조직에 관여하고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으나 에리히는 일단 그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이 일을 수면 위로 꺼내어 싸울 작정은 없다.
어디까지나 영지 관리 측면에서 접근했다고 알려지는 쪽이 낫다. 애초의 경영 지침이 있었으므로 황후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영지에서, 제정신을 놓은 아편 중독자가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네.”
“절제력을 가지고 적정량을 사용하면 약이 됩니다.”
“…….”
“고통을 줄여 주는 약 없이 가난한 평민들이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에리히는 잠시 침묵했다.
이건 일반적인 인식이다. 제호퍼 장관은 심지어 애민 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 아내가, 고통을 줄여 주는 약이 필요할 정도로 가난한 자에게 절제력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게 온당하냐고 묻더군.”
제호퍼 장관이 대답하지 못했다. 에리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네. 따라서, 영지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에 따라 치료소를 개소할 예정이야. 이번 감찰에서 걸려 해고되는 중독자 모두가 대상이 될 걸세.”
빌헬름이 듣는다면 기함할 소리였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갈 것이다.
제호퍼 장관도 입을 벌렸다. 그러나 곧 깨닫는 바가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것도 공작 부인의 뜻이십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에리히의 얼굴에서 잠깐 맴돌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 바람에 장관은 공작 부인의 자비를 칭송할 타이밍을 놓쳤다.
“장기적으로는 클라우제너 전체의 중독자를 대상으로 하게 될 거야. 그리고 클라우제너 내부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유통하는 것을 금지하겠네.”
그것은 공작이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입법권은 의회의, 행정권은 내각의, 사법권은 재판소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라우제너 공작이 자신의 영지 안에서 금지하겠다는 것을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어차피 법에 의해 허용해야 할 문제도 아니다. 반발할 귀족도 없다.
제호퍼 장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에리히의 시선이 냉엄하게 움직였다. 이만 물러가라는 뜻임을 알아채고 제호퍼 장관은 일어섰다.
“각하의 시간을 많이 빼앗았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하게.”
에리히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장관은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하고 집무실에서 물러갔다.
“…….”
에리히는 잠깐 생각을 정리한 다음 제일 먼저 이것부터 명령했다.
“기차를 준비해.”
“예?”
“루덴도르프로 가는 기차. 한 시간 안에 출발하는 것이 있다면 객차를 잡고, 없다면 출발시켜.”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다시 묻지는 않았다. 공작은 지금까지 기차를 단독으로 전세 내어 움직이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즉시 보좌관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한 명은 기차를 준비시키러 가고, 다른 한 명은 짐을 싸라는 소식을 집사에게 전하러 갔다.
에리히는 남은 업무를 빠르게 분류해서 실무를 맡기고, 정보팀을 불러들였다.
“에른스트 공작령에 관한 첩보 상황은 어떻지?”
“공작령 자체에는 노예단이 많이 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영지 밖의 지역에 가지고 있는 사업체 중심으로 확인 중입니다.”
“2황자는?”
“수도로 이동할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판은?”
“여전히 공작저 안에 숨어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거처의 하인이 워낙 자주 갈려서,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 최근 반년 동안 황후 폐하께 보낸 편지가 70통이 넘습니다.”
“리누스가 쉬운 성격은 아니지.”
에리히가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
그건 정보망의 흐름 전체를 조정하라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나 정보팀장은 공손히 긍정의 대답만 했다.
에리히는 최근 수도에 관한 보고서를 훑으며 기차에 올랐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한 시간이었다.
뿌우우……!
루덴도르프행 기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며 출발했다.
루덴도르프 영주관이 잘 지어진 건물이라던 요안나 블룸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쭉쭉 뻗은 하얀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영주관은 따스한 겨울 햇볕을 듬뿍 받아 더욱 아늑해 보였다. 부지가 넓고, 너무 높지도 않았다.
정원수가 모두 오래되어 아름다운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우와.”
엘리엇의 몸이 벌써부터 들썩거렸다.
“엄마, 나 저거.”
“남의 집에 가서 나무를 타면 안 돼.”
“힝…….”
“이모할머니를 보러 가는 거니까, 가서 얌전히 있어야 해.”
클레어의 단속에 엘리엇이 ‘웅’ 하고 대답했다. 어차피 어린아이 인내력을 믿을 수는 없다. 빅토리아 대공이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의 초대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남의 영지에 왔으니 예의상 한번 방문하긴 해야겠지만, 에리히가 도착한 후에 부부 동반으로 올 작정이었다.
루덴도르프에는 엘리엇 또래의 아이가 없으니, 굳이 데리고 방문할 필요 없었다. 그러면 엘리엇도 불편한 사람들에게 장시간 노출되지 않는다.
대신 후작 부인이나 호르스트 부부를 별장으로 초대할 생각이었다.
가볍게 엘리엇의 얼굴을 보여 주고 나가 놀게 하는 것으로 사교적인 인사를 끝마치고, 나머지는 날씨와 바다 이야기로 채울 수 있었으리라.
빅토리아 대공도 아이 사정이 있으니 별장 쪽으로 와 주십사 하고 청하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누스 황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운이 없게 다른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처해. 아예 집 안에 사람을 안 들이는 게 제일이지.’
그렇다고 빅토리아 대공이나 후작 부인을 아예 무시하고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방문하기로 결정하고 만 것이다.
‘빅토리아 대공 전하도 계시고, 랄프 경도 있고, 뭐 딱히 저쪽에서도 나한테 기대하고 있는 건 없겠지.’
탄광은 클라우제너의 사업이고, 루덴도르프 후작은 여러모로 아주 남자다운 사람이니, 에리히가 아니라 자신을 상대로 뭔가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차가 막 정원을 돌았을 때였다.
“잠깐만요.”
클레어는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마부석 쪽을 열어 두었기에 마부가 곧바로 마차를 세웠다.
건너편에 앉은 막시밀리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람들이 나가고 있어서요.”
본채 정문에 마차가 여러 대 서 있었다. 모두 소박한 갈색이나 검은색이었지만, 대여 마차 같은 것보다는 잘 관리된 좋은 물건이었다.
귀족가를 방문하는 중산 계급이 쓸 만한 마차다. 클레어는 눈에 힘을 주고 나오는 자들을 살폈다.
“선주 연합이군.”
“예. 뱃사람이 많습니다.”
둘은 잘 차려입은 손님들 대신 각자 주인을 맞이하는 하인들 쪽을 살폈다. 의족이나 의수를 단 자가 제법 있었다.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팔다리를 잃은 일꾼을 거두는 주인은 드물었다. 하지만 다친 선원을 거두는 선주는 제법 많았다.
여기가 루덴도르프라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었다.
뱃사람이라는 말에 엘리엇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후크 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