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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7/263)

108화

엘리엇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바다를 본 뒤로 해적 놀이에 대한 열정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진짜 배는 사 주면 안 된다고 미리 말해 둬야겠어.’

클레어는 피식 웃었다.

“엄마, 나, 나.”

“오늘은 손님으로 초대받아서 왔으니 꼬마 신사답게 있어야지.”

“꼬마 아냐. 신사야.”

엘리엇이 주장했다. 클레어는 아이의 귀여움에 몸살을 앓으며 그 뺨을 부비부비 두 손으로 비볐다.

“싱사하테 이로면 앙대!”

“이걸 누가 낳았어, 대체?”

누가 낳았든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게 놀랍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마차는 후원으로 돌아 들어갔다. 부지가 넓어 보여서 마차로 후원까지 간다는 것에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저 손님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던 것 같다.

후원에는 티파티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막시밀리안이 문을 열었다가 막 마차에 노크하려던 헤르만과 마주쳤다.

헤르만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공작 부인을 마중하러 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막시밀리안 경.”

막시밀리안이 묵묵히 그에게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마차 안에 손을 내밀었다.

엘리엇이 훌쩍 그의 팔에 안겼다. 막시밀리안이 엘리엇을 바닥에 내려 주는 동안 헤르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클레어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둘째 공자와 그 부인도 티타임을 함께하기로 했나 보지요?”

“루덴도르프에 있는 사람 중 자격과 시간이 있는 사람은 모두 모였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도 와 계시니까요.”

“어땠나요? 대공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던데.”

클레어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헤르만도 반농담으로 받았다.

“부인보다는 제 매력을 알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독신은 독신끼리 대화가 잘 통하는 법이죠.”

클레어도 농담으로 받았다. 헤르만이 웃어 버렸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더 이상 저를 배제하고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게 되셨죠.”

클레어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불어 모자챙이 흔들리자 헤르만이 손을 뻗었지만, 날려 가기 전에 클레어는 모자를 자기 손으로 눌렀다.

“선주 연합이 온 것 같더군요.”

“예. 아버지가 부르셨습니다.”

클레어는 거기에서 여러 가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빅토리아 대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선주 연합 쪽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자발적인 것이든 후작의 강요를 못 견딘 것이든 똑같다.

이것으로 후작가에 심은 폭탄에는 뇌관이 꽂혔다.

루덴도르프의 작은 사교계에는 좀처럼 흥미로운 일이 생기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모이는 일 자체가 극히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덴도르프는 이미 명성을 잃은 가문이었다. 최근에 아우구스타의 힘으로 위세를 일부 되찾기는 했으나, 후작 부부는 여전히 썩 존경할 만한 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후작이 장남을 제치고 차남을 후계자로 세웠다는 것도 구설수의 대상이었다.

온당한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을 밀어낼 만큼 후작 부인의 신분이 압도적으로 높다거나 사교계의 분위기를 뒤집을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후작 부인이 파티를 열어도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방문한 것이다.

물론 빅토리아 대공의 방문도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더 흥미로웠다. 최근 가장 뜨거운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니까.

초대장 한 장에 네 명이 들어오기도 했다.

“후작 부인이 무척 들떠 보이네요. 하긴, 후작 부인의 티파티에 언제 이렇게 많은 손님이 들어 봤어야 말이죠.”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 자작나무 별관에서 묵으신다고 했잖아요? 후작 부인의 어깨가 아주 으쓱하겠어요.”

“그럴 리가. 헤르만 경이 초청한 건데요.”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소곤소곤 여러 이야기를 실어 날랐다.

“호르스트 경이 아니라요?”

“헤르만 경이에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초청한 것도 헤르만 경이라더군요.”

“어머. 루덴도르프 공자라는 말만 듣고 저는 당연히 호르스트 경인 줄 알았어요.”

“큰 공자가 수도에 오래 있으면서 사람을 많이 사귀었다고 들었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나 빅토리아 대공 전하와 면식이 있을 정도라면, 아마 공작 각하와도 친분이 있겠지요.”

“영지 관리도 중하지만, 귀족이라면 아무래도 교유가 중요한 법인데.”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그런 말들도 오갔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은 아렌 출신이라죠?”

“꽤 남쪽이라고 들었어요. 밀밭이랑 목화밭밖에 없는 시골이라던데.”

“남자가 여자에게 반하는 순간에 그 배경이 보이는 건 아니죠.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라면, 사실 상대가 아렌의 남작이든 로멜의 백작이든,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하시겠지요.”

“이건 제가 블룸 공자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누군가가 더욱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카데미 시절에 공작 각하를 유혹하기 위해서 ……까지 했다고 합니다.”

“설마요. 그래도 귀족인데, 남작 영애가 그런 짓을.”

“저도 들었어요. 그야말로 출세 상대가 될 만한 상대라면 가리지 않고 꾀었다고.”

“세상에, 진짜요?”

“헤르만 경과도 그런 식으로 만난 인연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에 가까운 험담이 퍼졌다.

곧 헤르만이 클레어를 에스코트해서 동백꽃밭으로 들어섰다. 소곤거림이 일시에 멎고 시선이 그쪽에 집중되었다.

클레어는 심녹색과 갈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부터 허리까지, 또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부드럽게 몸의 선을 드러내며 흘러 떨어지다가 무릎에서부터 화려한 파도를 그리며 퍼지는 디자인이었다.

챙 넓은 모자를 장식한 것은 꽃과 레이스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였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시선을 모조리 앗아 가지는 않았다.

겨울의 환한 햇살을 받은 머리칼이 선연한 붉은빛이라, 동백꽃밭 속에서 불쑥 커다란 꽃이 솟아오른 듯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꽃 정령이나 요정처럼 아리따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공작 부인은 정열적인 인간 외의 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사람들이 온통 입을 다물어 조용해진 속에서, 누군가가 짤막하게 감탄사를 흘렸다.

헤르만은 그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했다.

고작해야 남작가 출신이다? 금발도, 푸른 눈도 아닌 아렌인이다?

그녀를 직접 보고도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애초부터 미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자신감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힘에서 나오는 존재감이 있었다.

“부인께 어머니를 소개해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당연히 제일 먼저 안주인께 인사를 드려야죠.”

클레어는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하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래 봤자 시시한 아렌 남부의 촌 귀족, 큰 방직 공장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기를 꺾어 주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과 빅토리아 대공은 한자리에 있었다. 헤르만이 그쪽으로 클레어를 인도했다.

‘이럴 수가……!’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은 마음속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이래서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초청하여 티파티를 열었다는 것이 자기 명성이 아니라 헤르만의 명성이 될 게 아닌가.

빅토리아 대공과 교분을 쌓았다는 평판도 빼앗긴 마당에 그것까지 밀릴 순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대서든 쫓아내 버렸어야 했는데!’

후작 부인은 마치 하려고 했으면 그럴 수 있었기라도 한 양 생각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생각이다. 지금 시점에서 클레어와 가장 친분 있는 것이 헤르만이었기에 그가 마중 나간 것이니까.

그녀가 복잡한 심경을 전부 숨기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엘리엇의 손을 잡은 막시밀리안이 한발 늦게 뒤따라왔다.

엘리엇이 도중에 다른 것에 정신 팔린 탓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귀여워라!”

클레어가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발그레하게 통통한 뺨을 한 아기 신사를 향해서 솔직 담백한 찬사가 쏟아졌다.

“어쩜! 천사 같아요.”

깜짝 놀란 엘리엇이 막시밀리안의 다리 뒤로 숨었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빅토리아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앗, 이모할머니!”

엘리엇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리고 반가운 듯 환한 얼굴로 도도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신사가 되겠다는 이야기는 바로 잊어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엘리엇.”

빅토리아 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구부렸다.

고작해야 2, 3일 보지 않았을 뿐인데 어찌나 이 다정하고 달콤한 아이가 그립던지.

그녀는 여기가 단순한 티타임이 아니라 나름 격식을 갖춘 티파티 자리가 되었다는 것도 잊고, 클레어와 후작 부인을 서로 소개해 주는 것도 잠깐 잊었다.

빅토리아 대공이 고개를 숙이자 엘리엇이 거침없이 그녀의 품에 안겨서 뺨에 뽀뽀했다. 짧은 시간 동안 익숙해진 대로 그녀 역시 엘리엇의 뺨에 입맞춤을 되돌려 주었다.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클레어에게까지 들려왔다. 클레어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위협적인 수도 사교계에 나서기 전에 여기에서 한번 엘리엇을 소개시키는 예행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작게 주절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 결혼하기도 전에 몸을 더럽혀서 낳은 자식새끼가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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