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8/263)

109화

술에 취한 듯한 남자 목소리였다.

클레어는 귀를 의심했다. 클레어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파티장이 한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빅토리아 대공이 엘리엇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영문을 모르고 엘리엇이 버둥거렸다.

‘별 미친놈이?’

클레어는 순간적으로 혈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이 황급히 나서서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아드님과 아름다운 부인을 얻으셨으니, 공작님께서 요즘 매일매일 행복하시겠어요.”

헤르만과 기 싸움 같은 걸 할 때가 아니었다.

이 파티장의 관리 책임은 후작 부인에게 있다. 상황이 난처해지면 그녀가 책임을 져야 될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얼마나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지원을 받고 싶어 하는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클레어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아주 천천히 그리면서 되뇌었다.

‘나는, 할 수 있다. 우아하고 얌전한 귀부인……!’

욱하면 안 된다. 여기서 화난다고 몽땅 뒤집어엎으면, 뒷일이 더 골치 아파진다.

후작가에 꾸며 놓은 것이 괜히 엉뚱한 일 때문에 어그러지면 곤란했다.

“별말씀을요. 그이가 어울리지 않게 아이를 예뻐하긴 해요.”

클레어는 들은 것을 무시하고 있는 힘껏 미소 지으며 후작 부인의 말에 응답했다.

“이렇게 어여쁜 아드님을 누구인들 사랑하지 않겠어요?”

“제가 공작 각하를 먼발치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데, 정말 이런 미남이 세상에 둘이 더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한 분이 더 나타났네요.”

“어쩜 이렇게 닮으셨을까요?”

금세 귀부인들이 엘리엇을 둘러싸고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자, 인사해야지.”

엘리엇이 수줍음을 타면서 빅토리아 대공의 치맛자락에 숨었다가, 대공의 말을 듣고 발개진 얼굴로 머뭇머뭇 나섰다.

“안녕하세요. 클라우지에…… 제너의, 엘리엇입니다.”

엘리엇이 두 손을 모으고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얼른 클레어에게 매달렸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동글동글 파란 눈동자가 어른들을 올려다보았다.

고운 분홍색 입술이 오물거리다가 또다시 부끄러운 듯 클레어의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귀여우셔라.”

보들보들한 입술이 제 손바닥에 닿기라도 한 양 사람들이 안달했다.

역시 자기가 낳진 않았지만, 클레어는 뿌듯해졌다. 이 유전자는 길이길이 남겨야 한다.

물론, 자신과 에리히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성격을 좀 면밀히 살펴야 할 테지만.

하지만 그녀는 마음에 없는 겸양을 떨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파티인 줄 알았다면 두고 왔을 텐데. 엘리엇이 시끄럽게 굴어서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를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일 따름인걸요.”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은 조금 전까지 느꼈던 실망감과 패배감을 깨끗이 날려 버리고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클라우제너의 장남이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찬탄하는 사이, 제일 먼저 실속을 차린 것은 헤르만이었다.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를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엘리엇 경. 우리는 기차역에서 이미 한번 만난 사이지요?”

그는 엘리엇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엘리엇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경?!”

“그렇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의 장남이시니 마땅히 경의 존칭을 받으셔야죠.”

엘리엇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엄마, 들었어? 나보고 경이래!”

어깨를 펴고 배를 내밀며 으쓱거리는 엘리엇을 보고 클레어는 어이없음 반, 귀여움 반이 섞인 웃음을 흘렸다.

“경은 무슨. 존칭을 듣기엔 아직 이르죠.”

“백작은 아직 이르더라도, 남작위 하나 정도는 주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지려면, 아무리 어려도 아카데미에 들어갈 나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빅토리아 대공이 웃었다.

“세상이 달라졌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도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퍼붓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에리히만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아마 그 말을 진짜로 이해한 것은 클레어뿐이었으리라.

“어렸을 때부터 너무 거만하게 키우면 곤란하기도 하고요.”

“그 말도 옳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진짜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정원을 가로질러 똑바로 전달되었다.

“하긴, 얼마나 자랑스러우시겠어? 기어이 몸으로 공작을 꼬드겨서 결혼까지 골인했으니. 내가 저 여자, 아카데미 시절부터 걸레인 건 알았지만.”

후작 부인의 낯빛에서 실시간으로 핏기가 빠져나갔다.

클레어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뒷소문이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헛소문 한두 마디 듣는다고 상처 날 멘탈도 아니었다.

대부분은 가십처럼 그냥 떠드는 소리다. 그것도 아니면 질투였다.

전자는 신문 기사의 논조가 바뀌면 같이 바뀌게 마련이었고, 후자는 잘 살아서 염장을 질러 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앞에서 말하는 놈은 논외다. 실수로 흘러나온 말 정도라면 나중에 헤르만을 통해 조용히 경고할 작정이었지만, 이딴 소리를 공개적으로 듣고 그냥 넘어가면 사람이 우스워질 뿐이다.

클레어는 엘리엇을 빅토리아 대공의 품으로 넘겼다.

“부인. 제가 대신.”

헤르만이 그녀를 말리려는 듯이 불렀다. 클레어는 그의 손을 가볍게 떨어내고, 주절댄 작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안나는 파랗게 질려서 남동생 브루노의 입을 막으려 했다.

“너 아까부터 미쳤니? 제정신이야!?”

목소리를 한계까지 낮춘 채 닦아세웠지만, 이미 브루노가 말한 것을 모두가 들었다. 주변에서 슬금슬금 사람들이 피했다.

조금 전까지 브루노에게 맞장구를 치던 율리아 영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브루노는 큰 소리로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하고 언성을 높였다.

요안나는 속이 터져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이래서 브루노는 못 데려간다고 했는데……!’

그래도 네 동생이 앞으로 블룸 남작가의 주인이 될 사람인데, 이런 중요한 자리에 빠지면 되겠느냐고 부모님이 기어이 우겼다.

그럼 직접 데리고 참석하시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들이 같이 가 봐야 형식적인 인사밖에 못 하지 않겠니?]

[브루노는 공작 부인과 옛날에 친분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마침 잘됐지 뭐냐. 신혼 중에 혼자 여행하는 부인을 혼자 만나는 것은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일이니, 네가 같이 가 주는 게 좋겠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왜 브루노를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친분은 개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브루노가 그녀를 모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이라도 제정신을 차렸으면 했는데, 어제의 술이 덜 깼는지, 아침에 해장술이라도 한잔했는지, 주정뱅이 꼴이 역력했다.

이런 놈과 동행이라는 게 수치스러웠으나 동생을 버리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요안나는 시뻘게진 채 몸을 움츠렸다.

또각또각.

클레어가 다가와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블룸 남작 영애. 곁에 있는 주정뱅이는 동행자인가요?”

“아, 공작 부인. 그게…….”

“하, 찔리긴 하는 모양이지, 델포드?”

클레어가 브루노를 잠시 쳐다보았다. 델포드라고 불렸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꽤 드물었다.

그러니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라면 알 법도 한데,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

통통한 몸에 술살이 붙은 이목구비는 아주 평범했고, 인상에 남을 만한 거라고는 코뿐이었다. 부러졌다가 잘못 붙었는지, 모양이 뒤틀려 있었다.

물론 클레어는 코 모양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사람의 얼굴을 흉하다고 말할 작정은 없었다.

그러나 대낮에 술 냄새를 풍기면서 티파티에 참석한 남자의 딸기코는 확실히 흉물스러웠다. 클레어는 눈을 치웠다.

그녀의 시선이 비켜 간 것을 깨닫고 브루노가 욱해서 언성을 높였다.

“날 모른다고? 나 브루노 블룸이야! 브루노 블룸!”

“기억에 전혀 없는데. 예의도, 품위도 없으면서 여자가 기억해 주길 바라면 얼굴이든 능력이든 최소한 둘 중 하나는 갖추는 게 어떨까?”

“야, 너!”

“야, 너?”

클레어가 브루노의 억양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따라 했다.

그러고 나서 시선을 브루노에게 둔 채 싸늘한 목소리로 불렀다.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 나는 내가 이 티타임에 중요한 손님으로 초대받은 줄 알았는데요.”

“아, 송구합니다. 아.”

후작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몇 분 전에 후작의 비서가 다급히 가져다준 쪽지 때문에 그녀는 혼란한 상태였다. 이 일까지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블룸 공자를 모셔라!”

클레어의 앞을 감히 가로막을 수 없어서 물러나 있던 헤르만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공작 부인이 후작 부인을 부른 시점에서 확실히 자신들이 치워야 할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인들이 서둘러 다가왔다. 브루노가 발광했다.

“야, 이 개 같은 년아! 또 남자야? 그렇게 질질 흘리고 다니는 년인 줄 알았으면, 내가!”

막시밀리안이 클레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끅!”

강인한 악력이 뒤에서 브루노의 덜미를 틀어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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