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09/263)

110화

“각하!”

에리히와 함께 온 루덴도르프 후작이 경악하여 외쳤다.

“끅, 아악!”

브루노는 목이 뽑히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번지듯이 당황한 사람들이 내는 신음 소리와 탄식이 파티장을 잠식했다.

막시밀리안만 혼자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에리히!”

막시밀리안의 등에 가려지듯이 밀려났던 클레어가 그를 팔로 밀어제치며 앞으로 나섰다.

브루노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에리히의 얼굴은 싸늘했다.

“잠깐 기다려.”

“언제 왔어요? 지금 어쩌려고.”

“악!”

에리히가 팔을 들어 올리자 브루노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발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을 시켜 끌어내게 했으면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을 시켜 매질을 했다면, 썩 좋은 소리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공작이 직접 손을 쓰다니. 아무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 정도까지 완력이 세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남자 하나를 거의 들어 올리고서도 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무표정이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우아하게 다듬어진 껍질 한 겹 아래 감춰져 있는 야만성이 폭발할 듯이 꿈틀거렸다.

클레어는 아뜩함을 느꼈다.

물론 그녀도 화가 났다. 죽여 버리고 싶다거나, 한 대 패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그녀도 자주 한다.

이딴 놈은 누구한테 처맞았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꼴좋다는 소리밖에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의 태도는 그녀의 그런 분노와는 결이 달랐다. 마치 벌레라도 잡아 누르는 듯한 냉엄한 멸시였다.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귀족적인 것이다. 손톱 발톱 끝까지 다듬어진 모양새로, 감정을 숨긴 채 예법을 갖추고 고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게 귀족적인 것이 아니라.

그는 이 자리에서 브루노를 죽일 것이다. 모욕당한 귀족이라면 그게 당연하다.

그건 안 된다.

클레어는 몸이 약간 떨리는 것을 억누르고 그의 팔에 손을 댔다.

“에리히, 이제 그만해요.”

얼어붙을 정도로 새파란 에리히의 눈이 클레어를 훑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브루노를 바닥에 팽개쳤다.

격렬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떨어뜨리듯 툭, 손힘을 푸는 것만으로도 브루노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다음에야 그는 브루노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가 기시감을 느끼고 에리히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짓밟을 작정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얼굴을 확인하려던 것뿐인데, 겁에 질린 브루노의 사타구니 사이가 짙은 색으로 젖어 들었다.

“히익, 히이이…….”

“낯이 익군.”

에리히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클레어는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에리히?”

“내가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이렇게 주둥이를 추잡하게 놀리는 놈이 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에리히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 이상 직접 손을 쓰거나 발로 브루노를 걷어차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비서가 황급히 가까운 테이블에서 물병을 가져다가 손수건을 적셨다.

에리히는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고는 그것을 브루노 위에 버렸다. 무슨 지저분한 것이라도 만진 듯한 태도였다.

“치워.”

손수건을 치우라는 말처럼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루덴도르프 후작가의 하인들이 마치 제 주인에게 명령을 들은 사람처럼 우르르 몰려가 브루노를 잡았다.

“흐악, 악! 흐악!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브루노가 발작적으로 소리 지르면서 울부짖었다. 클레어는 그 겁에 질린 짐승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얼떨떨한 얼굴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에리히는 막시밀리안을 일별했으나 굳이 꾸짖지는 않았다.

대신 클레어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안고 손끝으로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낮은 속삭임이 클레어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더러운 소리를 듣게 했군.”

“아는 사이예요?”

“…….”

에리히의 시선이 클레어의 눈과 마주쳤지만 곧바로 스윽, 밑으로 내려갔다.

“에리히.”

“나중에.”

그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게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을 클레어는 알 수 있었다.

파티장이 금세 고요해졌다. 클레어는 황당한 나머지 조금 멍해졌지만,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에리히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소리를 더 듣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에리히가 이번에는 루덴도르프 후작 부부에게 시선을 주었다.

“후작, 후작 부인.”

“예, 각하.”

“두 사람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네. 굳이 내 아내를 초대한 의미까지.”

“오해십니다, 각하. 저놈은 제 가문에서도 골칫덩이인 놈입니다. 어째서 남작이 저런 놈을 보냈는지 저야말로!”

“후작령 안에서 내 아내에 대한 모욕이 일상적으로 오가지 않았으면,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이 파티장에 들어올 수 있었겠나?”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후작령에는 귀머거리만 살고 있는 모양이군.”

루덴도르프 후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후작 부인은 울기 직전이었다.

“에리히.”

빅토리아 대공이 엘리엇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

엘리엇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분위기에 위축된 채 눈만 도로록 굴리다가, 에리히를 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아빠.”

에리히는 클레어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고 엘리엇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엘리엇이 에리히의 팔에 몸을 맡기고 마치 날아서 안기기라도 할 듯 폴짝 뛰었다.

에리히가 엘리엇의 겨드랑이 아래 두 손을 넣더니 공중으로 가볍게 던졌다가 받아 안았다.

“히히.”

그제야 엘리엇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빅토리아 대공이 말했다.

“잘 치웠다. 저걸 어쩌나 했는데 말이다.”

모욕을 주는 자를 쫓아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리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미친 작자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법이지요. 엘리엇을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빅토리아 대공이 에리히의 품에 안긴 엘리엇과 눈으로 웃음을 나누면서 대꾸했다.

에리히가 말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모님은 계속 여기 머무르실 겁니까?”

“날 초대한 것은 루덴도르프 후작이 아니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에리히는 그렇게만 말했다. 빅토리아 대공은 굳이 보살펴 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돌아가지.”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렇게 겁에 질리고 싸늘해진 파티장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에리히가 한 팔로 엘리엇을 안은 채 다른 한 손을 클레어에게 내밀었다.

클레어는 그 손을 잡았다.

마차는 이제 두 대였다. 에리히는 엘리엇을 막시밀리안과 함께 클레어가 타고 왔던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타고 온 마차에 클레어와 함께 올랐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 잘츠기터에 있어야 할 때잖아요.”

“지금 막 도착했어.”

“그거는 그냥 봐도 알겠어요. 기차역에서 이리 바로 왔어요?”

불안한 얼굴의 비서가 마차 곁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안에도 서류 가방이 여러 개 실려 있었다.

“네가 편지를 보냈잖아.”

“오늘 오전쯤에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클레어는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에리히가 출발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일이 많았을 텐데.”

“일 따윈 어디에서 해도 상관없어.”

에리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무엇을.’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편지를 쓴 당사자인 클레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에리히가 그녀의 손을 쥐어 올려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사과할 수 없어서 미안하군.”

“……당신 탓은 아니니까. 아니, 당신 탓이긴 하지만.”

“…….”

“미안하다고 해요.”

“못 해.”

“어이없어. 방금은 해 놓고.”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야.”

에리히가 인상을 찌푸렸다. 널 발견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결코 클레어를 끝까지 모르는 채 살 수는 없었을 테니까.

“대신, 네 발로 기어 와 사과하게 해 주지.”

“그건 됐고.”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고 까닥까닥, 그에게 자기 얼굴 쪽을 손짓했다.

에리히는 그것을 거부할 리 없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클레어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긴장을 풀라고 혀로 그 위를 톡톡 두드리면서 그는 역시 브루노 블룸을 죽였어야 했나 생각했다.

‘티 테이블의 포크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마치 머릿속에 떠오른 흉포한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클레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코뼈를 부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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