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에리히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러나 클레어는 속지 않았다.
“블룸 말이에요. 코뼈가 옛날에 한 번 부러졌던 것처럼 보이던데요. 당신이 그런 거죠?”
“근거 없는 소리는 하지 마.”
“그게 아니면 왜 블룸이 그렇게 당신을 보고 겁을 먹는 건데요?”
그의 반응은 거의 동물적이고 즉각적이었다.
권력을 두려워한 것이라면 빅토리아 대공 때문에라도 미리 조심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두렵다면 막시밀리안의 눈치를 보았으리라.
하지만 블룸은 그런 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날뛰었다. 뇌가 술에 절여져서 정상적인 생각을 못 하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리히를 보자마자 오줌을 지릴 정도로 겁에 질린 것은 분명히 몸에 각인된 공포가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는 아카데미 시절을 언급하며, 에리히와 자신을 엮어서 욕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아마도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를 다녔던 자일 거다.
“생각해 보니까, 아는 사람 중에 중퇴자가 있었어요.”
“알아봤자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어차피 기억도 못 하는 상대라면, 더더욱 알 필요 없어.”
클레어가 눈을 깜박거리면서 생각에 잠기려는데, 에리히가 그녀의 뺨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 맞췄다.
생각을 흐트러뜨리려는 시도에 굴하지 않고 클레어는 말했다.
“로만 교수의 제자였어요. 뭐, 병 때문에 갑자기 그만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안다고 말하기도 뭐한 상대긴 했다.
그녀의 지도 교수였던 밀러 교수의 연구실에 심부름을 오곤 했던 법학과 학생이었다. 귀족이 교양학부가 아니라 시험을 쳐서 법학과에 들어가는 일은 흔치 않아서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은 다시 생각해 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인상이 흐릿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차를 내준 적이 몇 번 있었을 것이다. 밀러 교수의 다기 세트가 좋아서 자주 그 연구실에 눌러앉아 있었던 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정도면 알 만했다.
시기가 꼭 맞는다. 자신을 알면서 에리히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을 만한 사람, 그리고 아카데미를 그만둔 사람까지 합치면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에리히에 의해 코뼈가 부러진 다음 아카데미를 다닐 수 없게 되어 그만두고, 클라우제너에서 그에 관한 소문을 없앴다고 하면 말이 되었다.
“당신이……. 음.”
이번에는 좀 더 깊은 도전이 이어졌다.
에리히가 그녀의 턱을 쥐고 아랫입술을 벌려 열었다. 클레어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키스가 막히자 에리히가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
“딴 놈 생각하지 마.”
“내 생각은 내 거예요.”
클레어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지금 다른 생각 하고 있는 주제에.”
“…….”
“내 말이 틀렸어요?”
에리히가 키스하려고 기울였던 고개를 빼고 반듯하게 앉았다.
단맛이 흔적도 없이 가시고, 이성으로 고삐를 채워 놓은 분노가 가슴뼈를 박살 내고 달려 나갈 것 같았다.
“기억할 가치가 없는 놈이야. 너 때문에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는 건조하게 말했다.
그녀를 위해 거짓말을 해 주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자신은 스스로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왜 화가 났는지도 전부 이해하지 못한 채 놈을 복싱장으로 끌어냈었다.
아마 쓰레기 같은 놈이 더러운 입으로 자신까지 엮어서 떠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은 클레어가 멍청하게도 하필 그런 놈과 얽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클레어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숙녀의 명예를 위해서 움직인 거라면, 분노를 쏟아 내는 게 아니라 보다 온당하고 우아한 방법으로 놈에게 경고를 주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한 일은 감정에 몸을 맡긴 채 놈을 피떡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부친은 그 일을 보고받고 나서,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가 혈기 왕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나이지.]
[죄송합니다.]
[후회하느냐?]
[아니요. 모욕에 대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거칠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알고 있다면 됐다. 머리가 식은 뒤에도 후회하지 않는 일이라면, 하는 게 옳지. 걸린 게 숙녀의 명예라면 더더욱.]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구나. 뭐,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때는 부친이 왜 그렇게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지 몰랐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뒤늦게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 채 감정에 휘둘렸는지 알았다. 일 처리가 지나치게 서툴렀다.
그는 거의 수치심을 느꼈다.
블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놈을 말살하는 일은 간단했다. 이제 놈 자체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놈이 불러일으키는 옛 기억에 짜증이 났다. 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스스로에게도.
진창에 처박아서라도 그녀를 제 품에 넣고 싶어 망상하는 그 더러운 속셈이 너무 잘 이해되어서.
그리고 또다시, 관계의 모든 부분이 그녀에게만 부담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때는 물론, 아내가 된 지금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클레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런 기분을 짐작도 못 하는 클레어가 잡혀 있는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에리히.”
클레어는 생각에 잠긴 그의 푸른 눈동자가 늪에 잠긴 듯 어두운 빛깔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황금빛 속눈썹이 그 위를 덮었다.
그것이 진짜 무감한 얼굴이 아니라 복잡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드는 상대는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것도.
무심결에 웃음을 흘리자 에리히가 트집 잡듯 말했다.
“또 왜 웃어?”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는 게 가끔 억울해질 때가 있어요.”
클레어는 붙잡힌 손을 끌어당겼다. 에리히는 그대로 질질 딸려 오듯이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키스하지 않았다.
코와 코가 스치고, 그다음에는 뺨이 맞닿았다. 부드럽게 내리깔린 눈 아래로 시선이 닿고, 입술 끝이 살짝 상대의 숨을 머금었다.
그 순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에리히가 잡아먹을 듯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화를 내는 건지 흥분한 건지 분간할 수 없는 태도였다.
클레어의 호흡이 가쁘게 그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에리히가 깍지 낀 손을 아프도록 움켜쥐고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하.”
그러자 그를 밀어냈다. 아랫입술을 깨물리고, 깍지를 풀어냈다가 팔을 다시 당기며 몇 번이나 공방전이 이어졌다.
클레어의 머리가 마차 문에 부딪쳤다.
에리히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느라 손을 풀었다. 클레어는 겨우 손이 놓여난 틈을 타서, 고삐라도 잡듯 그의 뺨을 감싸 고정시켰다.
확고한 중지 의사에 에리히가 멈췄다. 그의 가지런한 이에 붉은색이 묻어 있었다.
“에리히.”
클레어가 숨을 할딱거렸다.
에리히가 어두워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감정을 쏟아 내라고 유도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블룸 따위는 상관없어요. 옛날에 무슨 소리를 했는진 몰라도, 이미 지나간 일인걸.”
“…….”
“내가 신경 쓰는 건 당신이에요.”
클레어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화내는 건 괜찮아요. 당신 얼굴 일그러지는 걸 보면 솔직히 좀 뿌듯할 때도 많고.”
“뭐?”
에리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클레어가 약간 웃었다. 실제로 그런 마음이 드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렇지만 공포로 다스리려고 하지는 말아요.”
“…….”
“사람을 벌레처럼 쳐다보지 마세요. 죽어 마땅하다고 분노하는 건 괜찮지만, 죽여야겠다고 판단하지는 말아요. 난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기울일 수 없어요.”
묻은 연지를 닦아 주려는 듯이 그녀가 그의 입술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에리히는 그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었다.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애써 보지.”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 정도였다.
클레어가 웃었다.
“난 당신이 진짜로 남의 코뼈를 부러뜨린 전과가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는데.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니.”
에리히는 언짢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가 복싱장 외의 장소에서 주먹을 날린 건 살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이었고, 블룸을 포함해도 두 번이다.
둘 다 클레어 때문이었으나, 그는 굳이 그걸 변명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자제력을 상실하는 유일한 원인이 그녀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요동치던 감정과 충동이 모두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년 시절이 온통 그녀 차지라는 것도.
그게 사실이라는 것과 그것을 인정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안 그래도 목줄이 잡혀 있는 마당에, 숨통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다.
에리히는 인내심 없이 그녀의 턱을 끌어당겨 다시 입 맞추었다.
안 그래도 흉험한 기분이 몸 안에서 들끓는 것을, 그녀가 말리는 바람에 한 번 참았다. 더는 인내에 소비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의 소녀 시절을 차지할 방법은 이미 없었고, 미래 역시 독점할 길이 요원했다.
그러니 단둘이 있을 때라도 온전히 가져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클레어의 손이 부드럽게 그의 머리칼 사이로 들어와 헤집었다.
그것만으로도 뒤엉킨 감정과 억지로 잡아 놓은 살의가 물속에 떨어진 잉크처럼 풀려나갔다. 그는 줄곧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던 것이 클레어가 아니라 자신 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 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필요했어요.”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클레어를 끌어당겼다. 진흙 인형이 된 기분이었지만, 그것이 기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