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발작하며 끌려 나간 브루노 블룸이 정신을 차린 것은 마차에서 내려질 때쯤이었다.
하인들이 그의 팔다리를 잡고 억지로 끌어 내렸다. 브루노는 누가 자신을 잡아끈다는 사실만으로도 겁에 질려 발악했다.
“흐악! 흐윽!”
“아니, 얘가 대체 왜 이러니!”
블룸 남작 부인이 황급히 아들을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발작인가? 요안나! 너 브루노 제대로 돌보지 않고 뭐 했니!”
“아니, 루덴도르프에서는 이런 상태인 아이를 그냥 마차에 태워 보냈단 말이냐!”
블룸 남작까지 나서서 요안나를 닦아세웠다.
요안나는 더 이상 말할 기력도 없어서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브루노가 이런 상태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한때, 소년 시절에는 아카데미에서 법학 교수의 총애를 받았던 때도 있었으나, 중퇴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결코 총기를 되찾지 못했다.
하루 종일 술을 찾고, 하녀를 건드리고, 신문을 보며 욕설을 뇌까리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래도 부모는 결코 외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 애가 지금은 방황하고 있을 뿐이지, 언젠가 큰일을 할 거야.]
그게 10년이었다.
글쎄, 차라리 자신감을 잃고 영지 안에 숨어 있었으면 모를까, 위스키가 담긴 힙 플라스크를 가지고 다니는 시점에서 요안나는 그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포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문의 상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계승법이고, 그다음은 가주의 의사다.
“요안나!”
“두 분이 잘못하신 거예요. 브루노는 티파티에서 술에 취한 채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에게 욕설을 했어요.”
“뭐?”
“그걸 공작 각하께서 들었고요. 무슨 말을 했을지는, 아시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블룸 남작이 사납게 요안나를 추궁했다. 반면, 남작 부인은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브루노가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요안나는 어머니를 쏘아보며 말했다.
“공작 부인 앞에서는 말을 가릴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브루노가 공작 부인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 이미 아시잖아요.”
“아니, 하지만, 그…….”
“술까지 가지고 들어갔어요. 이러니까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블룸 남작 부인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블룸 남작이 소리쳤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잖소!”
“나, 난 몰라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미혼 시절에 우리 브루노와 인연이 있었는데, 결국 공작을 택하는 바람에…….”
남작 부인이 설명하다 말고 발끈했다.
“하지만 그게 브루노 탓인가요? 어릴 적 일이잖아요.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여자가 앞에서 살랑살랑 다니면 혹할 수도 있죠! 그런 점에서는 공작도 절대 당당하지 못할 텐데요!”
그 일로 상처받은 브루노가 아직까지 결혼조차 하지 않고 폐인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아깝고 잘난 아들인데.
부모에게 물려받을 것이 없어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야만 하는 보통 귀족가의 차남이나 삼남들과 달리, 그녀의 아들은 작위를 상속할 외아들인데도 영특하고 성실하여 스스로 공부를 택했다.
그 아들의 미래를 망쳤다고 생각하면, 공작 부인이 한없이 미웠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하면, 이건 이것대로 좋은 기회였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같은 고위 귀족과 인연을 맺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녀의 아들은 본디 똑똑하고 영특한 데다가 잘생긴 청년이었다. 공작 부인이 재회를 기뻐하지 않을 리 없었다.
훌륭한 청년이 고귀한 귀부인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거야말로 브루노를 위한 기회가 됐을 터였다.
두 번째 마차가 도착한 것은 남작 부인이 간신히 브루노를 진정시켜 안으로 들여보냈을 때였다.
마차 자체는 흔한 검은색이었으나, 옆에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블룸 남작은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차에서 내린 것은 검소한 회색 정장을 갖춰 입은 반백의 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블룸 남작님?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남자가 태연하게 손을 내밀며 블룸 남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영광되게도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의 법률 고문직을 맡고 있는 괴르델러 백작이라 합니다.”
블룸 남작은 그 손을 잡는 것도 잊고 멍청하게 괴르델러 백작을 바라보았다.
남의 일을 보살피는 사람이라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다. 그는 블룸 남작보다 몇 배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자였다.
작위를 가진 귀족이 법률가나 학자가 되는 일은 드물다. 가문의 주인이라면, 보통 남의 일을 보살피는 것보다는 자기 가문을 잘 경영해야 했다.
하지만 상대가 클라우제너 정도라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 같은 고귀한 가문의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하는 자리다. 그렇기에 괴르델러 백작가는 장남까지 모두 법학과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브루노가 노렸던 최고의 출세 형태가 바로 괴르델러 백작인 셈이었다.
블룸 남작이 망설이자 괴르델러 백작은 차분하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블룸 남작은 그때야 경악해서 서둘러 손을 내밀었으나, 이미 괴르델러 백작은 악수할 생각이 없어진 것 같았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블룸 남작이 애써 침착을 유지한 채 사과하자 괴르델러 백작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블룸 남작은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괴르델러 백작은 클라우제너의 문장이 찍힌 봉투 두 장을 테이블에 꺼내 놓고 말했다.
“제가 방문한 이유는 아마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아들……이 공작 부인께 무례한 일을……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블룸 남작에게는 공작이 내 아들에게 저지른 짓은 어쩔 거냐고 따질 만한 용기가 없었다.
괴르델러 백작이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 일로 각하께서 노하셨습니다. 본디 자비로운 분은 아니라, 같은 말씀을 두 번 하는 것을 싫어하시지요.”
“예…….”
블룸 남작은 이번에 들은 말이 경고라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무례를 저지르지 말라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클라우제너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에리히는 이미 학창 시절에 브루노에게 한 번 ‘경고’를 주었다. 영지로 돌아가 두 번 다시 나오지 말라고 말이다.
그것을 어기고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것으로도 모자라서 공작 부인을 또다시 모욕했으니, 이제는 제재해야 할 때였다.
“남작님께서 택하실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입니다.”
괴르델러 백작이 봉투 두 개를 모두 블룸 남작에게 내밀었다.
“아드님을 폐적하고 요양 병원으로 보내어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가문은 방계 친족에게 상속하시거나 따님의 지참금으로 삼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뭐요?”
블룸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건 가문을 닫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모욕죄로 소송을 할 예정입니다.”
괴르델러 백작은 온화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재료가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지저분하게 하자면, 블룸 남작가의 지난 50년간 납세 내역을 살펴본다거나, 영지민의 삶을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귀족원은 만장일치로 블룸 남작가의 작위를 박탈하는 것에 동의할 겁니다.”
“백작님!”
“그리고 남작님도 이 정도면, 각하께서 철저하게 절차를 지키시는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블룸 남작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부당하다. 부당했다.
고작해야 아렌의 여남작 하나를 좀 비난했기로서니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공작 부인이기도 했다.
공작은 충분히 말 한마디로 가문을 멸문시킬 수 있었다.
“기다,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십시오.”
괴르델러 백작이 콧수염을 점잖게 만지며 대답했다.
“생각에 보탬이 되실지도 모르니 제안은 두고 가겠습니다.”
그가 일어섰다. 의례적인 그의 미소가 블룸 남작에게는 잔혹한 사신의 그것처럼 보였다.
이 일은 블룸 남작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루덴도르프의 문제이기도 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쿵! 캉!
집어 던져진 문진이 바닥을 푹 찧고 몇 번이나 튀어 올라 굴렀다. 유리잔과 가스등이 깨지고, 엎어진 잉크병이 카펫을 물들였다.
후작 부인은 죄인처럼 두 손을 모은 채 그 난장판 속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중요한 일이라고 했지! 어떻게든 이 기회에 공작 부부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잖아!”
“여, 여보…….”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그런 놈 하나 못 골라내?! 당신이 그러고도 루덴도르프의 안주인 맞아?!”
루덴도르프 후작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니까 루덴도르프 사교계가 망했다느니, 없어졌다느니 하는 말이 생기지!”
“전부 내 탓으로 돌리면 속 시원해요?”
마침내 견디지 못한 후작 부인이 마주 언성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