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운이 좋아서 후작 부인 자리를 꿰찬 남작 딸이라면서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이 눈가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소리쳤다.
“우리 가문이 아우구스타 님이 지원해 주는 것 말고 뭐 내세울 게 있긴 해요? 그게 아니면, 당신이 철저하게 내 편이 되어 준 일이 있어요?”
“허, 이 사람이?”
“아니면, 당신이 클라우제너 공작이 부인에게 한 것처럼 철저하게 날 지켜 주기를 했어요? 당신이라면 나 때문에 블룸 남작의 멱살을 잡았을까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자신이 직접 당한 모욕이라면 모를까,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관대한 척하며 넘기거나.
그걸 그녀도 알고, 후작 자신도 알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공작은 클라우제너야!”
“당신이 못 하듯이 나도 황후나 공작 부인처럼 사교계를 통솔할 수는 없어요!”
“지금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후작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후작 부인은 홱 몸을 돌렸다.
돌아서서 나가는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아, 어머니.”
서재 앞 복도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호르스트가 당황하며 불렀지만, 후작 부인은 그냥 가 버렸다.
“허, 기가 차서, 정말.”
후작이 뇌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르스트는 조심스럽게 서재 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후작은 책상 앞에 앉아 고개를 젖힌 채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버지, 저 다녀왔습니다.”
“호르스트냐.”
후작이 불쾌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르스트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가게른 남작님의 동의를 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외삼촌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화낸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군.”
후작이 손을 내리고 핏발 선 눈으로 호르스트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말씀하신 조건에 합의했고, 투자금과 지분에 관한 협상도 마무리했습니다. 크로지크 백작가에서, 처음 이야기했던 것보다 투자금을 증액하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다행이고.”
루덴도르프 후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호르스트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도 티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벌써 전해 들었다.
상황이 무척 난처하게 되었다. 가게른 남작에게 후한 대접을 약속한 것은 클라우제너 공작가를 이 일에 끌어들인다는 전제로 결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가게른 남작에게 주어야 할 보상금을 모두 치르고 나면 정작 광산 개발에 투자할 자금이 없었다.
그렇다고 크로지크에 더 많은 투자금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쪽의 지분이 늘어난다. 이쪽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도 있었다.
“후…….”
루덴도르프 후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사죄를 하러 가면 어떻겠습니까?”
“클라우제너 공작가에?”
“손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우리 가문 책임입니다. 어머니와 제가 사과하러 가겠습니다.”
호르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는 합리적인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건 우리 가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그건 그래. 사교계 관리는 네 어머니 역할이고, 남자들 일과는 관련 없긴 하지.”
“예. 어쨌든 사과는 해야 합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네 말이 맞다. 헤르만을 보내는 게 좋겠구나.”
“예?”
“그 녀석이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지 않으냐.”
게다가 이번에도 헤르만이 중간에서 브루노를 막으려고 하기도 했다.
실은 자신이 직접 공작 부처에게 사과하러 가야 마땅했지만, 그는 자존심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공작과 교분을 나누러 가는 거라면 기꺼이 나서겠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젊은 부부에게 사과하러 간다는 게 아무래도 떨떠름했다.
호르스트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하지만 아버지.”
“네가 가서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그 자리의 여주인이었는데도, 공작이 인사조차 하지 않고 가 버렸지 않으냐.”
후작이 혀를 찼다. 마치 못난 부하가 저지른 일 때문에 난처해진 사람 같은 태도였다.
호르스트는 머뭇거렸다.
어머니의 잘못은 종종 그의 잘못과 연결되곤 했다. 그러니 그가 책임져야 깔끔하게 끝난다.
이 일을 헤르만에게 맡기면, 자신이 가문을 장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가신과 그날 파티장에 초대되었던 다른 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명예를 헤르만이 책임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제가 후계자로서, 가서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형님이 가면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후작은 호르스트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헤르만 녀석이 그래도 수도에 이런저런 인맥도 있고, 얼굴도 반반한 편이니, 그게 보기 좋아.”
호르스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반면에 루덴도르프 후작은 해결책이 생겼다 싶은지 목소리가 조금 나아졌다.
“넌 광산 일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좋겠구나. 크로지크에 돈을 더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고……. 가게른 남작과 다시 협상하는 건 어떠냐?”
“그건 어렵습니다. 계약서에 이미 크로지크 노백작님의 서명까지 들어갔으니까요.”
호르스트가 슬그머니 루덴도르프 후작의 표정을 살폈다. 무능하다고 화를 내거나 가게른 남작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트집을 잡을까 봐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덴도르프 후작은 자신감을 잃기라도 했는지 조용했다.
그래서 호르스트는 조금 안심하고 말했다.
“요즘 광산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하니까 지인이 광부 조직을 하나 소개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광부들을 매우 저렴하게 고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자세히 이야기해 봐라.”
“원래 콜베르크 광산에 고용되어 있던 아렌인 광부 계라고 하더군요. 거기가 휴업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고향까지 가기도 애매해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콜베르크 광산에서 일했으면, 임금이 제법 비쌀 텐데?”
“숙식을 제공해 주면 저렴하게 맞춰 주겠다고 중개인이 그러더군요. 계주가 돈이 급한 모양입니다.”
호르스트는 열의를 가지고 설명했다.
“대부분 몇 년이나 광부로 일했던 자들인 데다가 콜베르크의 폭약팀까지 섞여 있다고 하고요. 다만, 콜베르크 광산이 다시 열리면 그쪽으로 돌아갈 거라는 조건이랍니다.”
“한동안 만이라 해도, 콜베르크 광부를 쓸 수 있다면 상당히 이득이지. 개발 기간도 단축할 수 있을 테고.”
“예.”
“네가 가서 협상을 해 가지고 오너라. 우리 자금 사정은 네가 더 잘 알 테니.”
“예, 알겠습니다.”
호르스트는 주먹을 쥔 채 대답했다.
결국 가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공작가와의 교유나 명예에 대한 일은 장남인 헤르만에게 넘어가고, 자신은 실무자가 된 셈이다.
그래도 광산이 개발되기만 하면 만회할 수 있다. 공작 부부가 사과를 어디까지 받아 줄지, 받아 준다 한들 그게 실질적으로 가문에 이득이 될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다.
28. 리누스
에리히는 별장의 위치에 만족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위치가 높았다. 그렇다고 산꼭대기에 있는 것도 아닌데 바다와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3층에 있는 부부 침실 밖으로는 테라스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남의 눈이 닿지 않을 테니, 여름이 되면 거기서 일광욕을 해도 좋으리라.
바닷가에 쉬기 좋은 집을 하나 사 두라고 했을 뿐인데, 마음에 꼭 맞는 집이라 만족했을 것이다.
아무 일 없이 그냥 왔다면 말이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벌써부터 표정이 굳어 있는 에리히의 팔짱을 끼면서 클레어가 말했다.
“엘리엇은 아직 몰라요. 리누스 황자의 폐렴 증상이 낫지 않았고, 정신을 차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침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거든요.”
“그렇군.”
“아빠!”
억지로 얼굴을 폈던 에리히는 뛰어오는 엘리엇을 보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그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엘리엇이 그의 볼에 키스하고, 이마와 두 볼에 뽀뽀를 받은 다음에야 불평했다.
“아빠는 나빠.”
“응?”
행여나 블룸을 제압했던 것에 충격이라도 받았나 싶어 에리히는 일순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지 않았다.
“맨날 나만 빼놓고 엄마랑 타.”
“아.”
“잘 때두 그렇고. 자꾸 나만 따돌려.”
“…….”
에리히는 대답할 말이 궁해서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는 얼굴이 빨개져서 그를 외면하고, 혼자 저택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