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에 오히려 적막했던 테라스에 갑작스럽게 아이 웃음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까지 반쯤 잠든 리누스의 의식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열은 다 내리지 않았고, 숨도 가빴다. 기침이 쉬지 않고 나와서, 하녀가 혹시 폐병 아니냐고 두려워하며 좀처럼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하게 움직이는 육체의 반응과 달리 그의 마음은 새파란 심해를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 내내 깊은 물속에 잠긴 꿈을 꾸었다. 평안하고 고요한 꿈이었다. 파도 소리나 물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진짜 정적.
이런 기회가 두 번 오지는 않을 테니, 더 밑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백일몽에 사로잡혀 있는데.
“해적선! 바다! 콧수염!”
아이가 짜랑짜랑 내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리누스는 이 집에 오기 전까지는 그런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상한 기분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는 과거에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편안하게 웃으면서 떠들었던 기억이 없었다.
황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로멜 귀족 중의 로멜 귀족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을 때조차도 그의 주위에는 그를 어머니의 왕관으로 받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황궁은 고요하고 치열한 곳이었다. 이렇게 파도 소리로 모든 게 묻혀 버리는 해변과 달리 음모와 죽음이 내는 사삭거리는 소리가 만드는 정적이다.
그는 저렇게 웃거나 소리 지른 기억이 없었다. 네댓 살 때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이 아무도 웃지 않는 곳에서 아이가 혼자 웃으며 기뻐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클라우제너 공작가도 그가 살아온 곳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가시 함정 위에 깔린 살얼음판을 밟는 듯한 위험성은 없었겠지만, 에리히도 그와 똑같은 엄숙한 고요 속에서 자라났을 터이다.
그러니 이 집에서 저 웃음소리가 울리도록 만드는 것은, 분명 그 꽃무릇 같은 여자이리라.
[내 집에서는 안 돼요.]
그건 고열에 시달리면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였다.
아마 자신이 먼저 무슨 말인가를 했을 것이다. 기억은 나지 않았다.
붉은 꽃이 피어 있기에 거기가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죽어 묻혀 있거나, 그 무덤 안에서 기어 나온 것이 분명하다고.
무심코 꽃을 잡으려고 손을 뻗은 찰나, 누군가가 그의 팔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십니다, 황자 전하.]
그는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몽롱한 채로도 그를 알아보고 다시 온전히 눈을 떠 보니, 방에 있는 것은 그에게 키스해 주러 온 죽음이 아니라 붉은 머리의 여자였다.
그것도 지금 보면 착각이었다. 그 여자의 머리칼은 엄밀히 따지면 붉은색이 아니라 갈색이다.
하지만 석양빛을 마주하고 선 여자의 머리는 온통 붉었다.
[공작 부인.]
[예.]
대답한 것은 막시밀리안이었다. 리누스가 클레어를 부른 것이 아니라, 그냥 확인하듯 되풀이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에리히, 공이?]
여기 있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목이 갈라진 데다가 기침이 나서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났다. 사실 아무려면 어떠냐고 생각하긴 했다. 에리히가 결혼을 하든 말든.
아니, 상대가 아렌인이라는 것에 놀라긴 했다. 그 냉엄한 성품의 사촌이 연애를 해서 이미 아이까지 있다는 말에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놀람은 모두 짧게 감정의 표면을 스쳐 갔을 뿐이다. 리누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왜 여기……?]
[바다에서 떠내려왔어요. 기억나지 않나요?]
[내버려 뒀으면 좋았을걸.]
[어째서 겨울 바다에 들어가 있었죠? 어디서 빠진 거예요?]
[네가 무슨 상관이지?]
[루덴도르프에는 전하의 호위도, 시종도 없었어요. 에른스트 공작령에서도 바다 쪽을 뒤지는 것 같지는 않고요.]
여자가 말했다.
[수하 하나 거느리지 않은 황자를 이쪽이 보호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난처해서요.]
[사람이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 가는 게 없나?]
[…….]
[내버려 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민폐인데, 정말 짜증 나게 하는군. 꺼져.]
그 순간 여자의 말투가 돌변했다.
[야.]
평생 처음 듣는 무도한 소리였다.
[나, 네 사촌 형수야. 그리고 빅토리아 대공 전하도 나한테 너처럼 무례하게 굴지 않아. 나이도 어린 것이 싸가지 없이.]
리누스는 그때야 그녀의 붉게 빛나는 머리칼 끝이 아니라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명하게 짙은 속눈썹 안에서 금편처럼 불똥이 튀었다. 그제야 그는 상대가 꽃무릇이 아니라 불꽃같은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살리려고 저 겨울 바다에 뛰어든 사람이 아홉이나 돼. 그중 하나는 앓아누웠고, 네 명은 지금도 콜록거려. 클라우제너 보안부가 할 짓이 없어서 온 도시를 헤집으며 네 행적을 추적하고 있는 줄 알아?]
[살려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두 팔 휘저으며 발버둥 치고 있었던 주제에.]
[도로 바다에 던지든가. 아니, 그럴 필요도 없군. 내 발로 가지.]
리누스는 비척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지만, 막시밀리안이 아니라 클레어가 가볍게 한 손으로 떠미는 것조차 이기지 못하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무슨 진흙탕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는 리누스를 보고 클레어가 빈정거렸다.
[여자 하나 밀어내고 일어날 힘도 없는 주제에.]
[너도 어차피 내가 여기서 죽어 버리면 곤란해서 이러는 거 아닌가.]
[알면 나을 생각이나 해. 막시밀리안 경에게 협조하고.]
클레어는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 목숨 네 거라지만, 내 집에서는 안 돼. 네 목숨 구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안 되고.]
리누스는 기묘한 감상에 휩싸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모든 일에 진저리가 나 있었고,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목숨 하나쯤 어머니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죽어 나가는 것은 그가 아니라 다른 자들이었다. 어머니가 그에게 붙인 자들은 이 머리 위에 환상처럼 얹힌 황위 계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것 때문에 너를 죽이겠다고도, 그것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집에서 죽어 나가는 게 곤란해서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도 있을 테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질 수 있었음에도 아직 여기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자신을 살려 둔 이유가 궁금해서.
‘내가 죽어 버리면, 에리히의 계승권이 올라갈 텐데.’
자신이 죽고 나면, 황실의 직계가 모두 사라진다. 그러면 계승법상 애매한 부분은 모두 없어지는 셈이다.
확고한 순서는 빅토리아 대공과 맨프레드 대공이며, 그다음이 에리히 클라우제너다.
맨프레드 대공의 딸 베티나는 로멜 귀족 간의 귀천상혼으로 인해 계승권을 상실했다. 즉, 설령 차기 황제가 맨프레드 대공이 된다 해도 그다음 순위는 에리히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아렌인 배우자 소생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우선한다면, 에리히보다 에리히의 아들이 더 높은 순위일 수도 있었다.
그 여자는 황후 자리가 욕심나지 않는 걸까? 황태후 자리는?
크게 수고가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막시밀리안을 시켜 자신을 다시 바다에 던져 버리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저 심해로 가라앉을 텐데.
정말로 그냥 사람 죽는 걸 보는 게 싫을 뿐인가.
‘심약하게.’
불꽃이라기엔 시시했다. 그래서 그는 여자의 이름을 마음속에서 다시 꽃무릇으로 고쳤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죽으러 나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방 안과 밖에 각각 호위가 둘씩 배치된 데다가 그는 오래 걷지도 못했다.
“쿨룩. 쿨룩쿨룩!”
리누스는 두르고 있던 모포로 입을 가리고 몇 번이나 격렬하게 기침했다. 지칠 정도로 끔찍한 기침 끝에 보니 핏방울이 몇 개 모포에 번져 있었다.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러 왔던 하녀가 겁먹은 얼굴로 물러섰다. 그는 킬킬 웃었다.
그것참, 그냥 기침인데 잘 안 떨어진다.
“여자가 돌아왔나?”
“네?”
그의 질문에 하녀는 멍청한 반응을 되돌렸다. 공작 부인을 그렇게 불렀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누스는 직접 확인하러 가기로 했다. 딱히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냥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 무엇을?’
그 자문은 불안정했으며, 너무 빠르게 의식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서 미처 제대로 의식할 수 없었다.
방을 나서려 하자 호위 중 하나가 부드럽게 문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편찮으시니 외출하지 마시라는 공작 부인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복도까지만 나갈 거다.”
호위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괜찮으리라고 판단했다. 3층 자체에도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리누스는 천천히 3층으로 나섰다. 그리고 복도 창으로 드는 햇살을 바라보고,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섰다.
복도 창문이 정원 쪽으로 나 있어, 아이의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웃음소리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그는 호기심을 느끼며 살짝 창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장난감 칼을 들고 있는 에리히 클라우제너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