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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4/263)

115화

“피터 팬, 오늘이야말로 나의 승리다!”

엘리엇이 장난감 칼을 의기양양하게 겨누고 소리쳤다.

그에 맞서 두 손으로 장난감 칼을 쥔 에리히는 평소와 똑같이 정제된 무표정이었다. 심지어 자세가 곧바른 데다가 있어보여서, 클레어는 그가 고전 검술 같은 것도 배웠는지 궁금해졌다.

‘와, 저게 피터 팬 역이라고?’

이야기의 원안을 모르는 에리히는 그냥 악역이려니 하는 모양이지만, 클레어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역할을 바꾸면 그럴듯하겠는데.

‘아니, 잘 놀아 주니까 좋긴 한데.’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 상대로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할 일인가?

그러니까 엘리엇이 그를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긴 했다.

지금도 그랬다. 흥분하여 잔뜩 붉어진 얼굴로 엘리엇이 “에잇!” 하고 달려들었다.

아무렇게나 휘젓는 장난감 칼을 에리히가 그럴듯하게 보이게끔 걷어 냈다. 클레어는 그제야 그의 입꼬리가 보일락 말락 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렇게 자상한 분이신 줄 상상도 못 했어요.”

보모 제니가 경탄하듯이 말했다. 마사는 고개를 저었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아내가 예쁘면, 처가의 울타리까지 예쁘다잖아? 게다가 우리 도련님이 오죽 귀여워야지.”

“그건 그래요.”

제니가 맞장구쳤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정원을 지키고 있는 호위들도, 대화에 끼어들지는 못했으나 크게 다를 바 없는 감상이리라.

‘어쩌면 에리히는, 엘리엇을 놀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클레어는 그런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아이는 기뻐했다.

“이얍! 에잇!”

톡.

에리히는 엘리엇의 장난감 칼이 몸에 닿기 전에 칼끝으로 쓱 밀어냈다. 그러면서 칼이 사람 몸에 직접 닿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지 어떨지 생각했다.

‘아직 이른가.’

펜싱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또 한 번 칼을 밀어냈는데, 엘리엇이 바닥을 굴렀다가 발딱 일어나며 선언했다.

“웬디를 돌려받겠다!”

“그건 곤란하군.”

에리히는 희미하게 허물어지려는 입가를 누르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딱히 역할극으로 대답해 준 건 아니었는데, 엘리엇이 환호라도 하듯이 신나서 붕붕 칼을 휘둘렀다.

클레어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엘리엇의 조그만 머릿속에서 ≪피터 팬≫은 무슨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있는 걸까.

‘그렇게 이상하게 이야기해 준 것 같지 않은데.’

갈고리 의수에 꽂힌 것 같긴 했다. 바다를 본 적 없을 때부터 해적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했던 걸 보면.

어제도, 루덴도르프 후작저에서 본 뱃사람들에 대해서 허풍과 상상력을 섞어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에리히에게 잔뜩 자랑하더니, 오늘도 지치지 않고 후크 선장 놀이였다.

‘그나저나 정말 잘 놀아 주네.’

클레어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진지하게 엘리엇을 상대해 주고 있는 에리히에게 감탄했다. 자신이었다면 벌써 열 번은 웃었다. 아니면 지쳐서 뻗었거나.

3층 창문이 열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유리창의 반사광이 눈을 찔렀다.

리누스가 일어났다.

클레어는 몸을 일으켰다.

“엘리엇, 이제 간식 시간이다.”

“간식!”

엘리엇이 순식간에 안색을 바꾸고 장난감 칼을 내던졌다.

그렇게 놀았으니 배고프기도 할 것이다. 뭐 좀 좋은 걸 먹여야 할 텐데 싶어서, 클레어는 뒤늦게 염려되었다.

놀이를 멈추게 할 요량으로 간식 얘기를 꺼냈는데, 이렇게까지 반색하니 간식 메뉴에 실망할까 봐 걱정되었다. 평소처럼 조그만 샌드위치 정도로는 만족 못 하는 게 아닐까.

그녀의 걱정을 알아챈 마사가 생글거리고 웃었다.

“주방에서 도련님 간식 만든다고 해산물을 따로 들였대요. 바닷가니까 신선한 게 준비되어 있지요.”

“아, 잘됐네.”

“난 럼으로!”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엘리엇이 팔을 번쩍 들고 15년 하고도 몇 개월 더 이른 소리를 했다. 마사는 태연하게 “우유에 체리 시럽을 넣어 드릴게요.”라고 말하면서 엘리엇을 보듬어 안았다.

에리히는 처음에는 자기가 엘리엇을 안고 갈 작정이었지만, 클레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 있나?”

“리누스 황자가 깨어난 것 같아요.”

“후.”

에리히가 약간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단란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짜증스러웠으나, 실은 이 때문에 다급히 달려왔다.

상대는 리누스다. 황후가 아렌을 대상으로 저지르고 있는 짓을 생각하면, 정상적으로 절차를 밟아 방문했어도 클레어 혼자 만나게 하기 껄끄러웠다.

그런데 심지어 바다에서 익사 위험에 처해 있던 것을 건졌다. 뱃놀이 중에 황자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도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사람을 은밀히 풀어 황자를 찾고 있었다.

자칫하면 이쪽에서 납치했다거나 살해를 시도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황후도, 에른스트도, 나와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겠지.’

다만, 클레어를 건드리는 게 자신과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으니, 클레어를 공격한다면 타깃은 그녀가 아렌 귀족이라는 사실이 될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온 이상, 바다에 빠진 애를 구해서 돌보다가 내보냈다고 해도 누가 따지거나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신혼여행 중에 이 무슨 난리란 말인가

그는 걱정 가득한 클레어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염려 마. 잘 이야기하고 올 테니.”

“같이 가요.”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다 낫지도 않았다며. 회복될 때까지 머물게 해 주든, 에른스트로 연락을 넣든, 본인 뜻대로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은.”

실종시킬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 없다고 의견 일치를 보고서도, 내내 그런 얼굴이었다.

[솔직히 나쁜 생각이 들었어요.]

[나한테 참회하지 않아도 돼.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도 사라지리라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에리히는 침대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누운 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아니, 꼭 필요하다면 나도, 그래도……. 아니. 영원히 가둬 둘 수는 없겠죠.]

클레어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잠깐 정도는 억지로 잡아 둔다 하더라도……. 입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리누스 황자는 성인이고, 자기가 겪은 일을 스스로 증언할 수 있으니까.]

에리히는 내심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리누스를 완전히 실종 상태로 만드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채로 손에 굴러들어 온 상황이다.

꼭 죽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대로 어딘가 적당한 곳에 보내어 유폐하면 된다. 황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도 괜찮다.

클레어는 리누스의 입을 막을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사람의 입을 막는 수단은 여럿 있다. 황후가 저지른 일을 일부 그 아들에게 돌려주기만 해도 리누스는 폐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은 것은, 클레어가 그 사실을 몰라서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녀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인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애초부터 계산에 없던 일이고, 지금은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

[하지만…….]

[전쟁을 해서 황위를 차지하는 게 목적이라면, 여기서 리누스를 실종시키고 맨프레드 숙부님과 협상하는 게 최선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너와 엘리엇을 안전하게 지키는 건 내 역할이야. 그리고 아편의 확산을 막는 일은 누구 하나를 암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그제야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이번에도 그는 클레어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져 눈가에서 힘을 풀게 했다.

“그냥 있어. 내가 만나고 올 테니. 리누스와는 그렇게 먼 사이도 아니고.”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는 혼자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탓에, 1층도 2층도 아기자기하면서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3층부터는 공기가 달랐다. 막시밀리안이 3층 계단 아래서 대기하고 있다가 말했다.

“침실에 계십니다.”

에리히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도록 호위들이 앞서서 문을 열었다.

리누스는 침실에 딸린 작은 거실 소파에 모포를 뒤집어쓴 채 앉아 있었다.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몸가짐이었다.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리며 문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리누스.”

“이게 누구신가. 클라우제너 공작님. 여전히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용모를 하시고.”

리누스가 킥 웃었다. 그러다가 연달아 기침을 터뜨렸다.

“왜? 앉지 않고?”

“네 기침 세례를 정면으로 맞고 싶진 않군. 아이에게 감기가 옮으면 곤란해.”

리누스의 눈이 커졌다. 에리히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좀 변했구나, 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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