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날 조롱할 정도로 용감하게 성장할 줄은 몰랐는데.”
에리히의 말에 리누스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 충격적이라서 말이야. 에리히 클라우제너가 어린애랑 놀아 주기 위해서 장난감 칼을 휘두르다. 수도에서라면 제법 훌륭한 헤드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이를 돌보는 일에 왜 수치심을 느껴야 하지?”
에리히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는 원래 치욕이나 자괴를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은 자신을 꾸미지 않는 법이다.
에리히의 행동에는 늘 여유가 있었고,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완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그 오만함이야말로 리누스가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것이며, 어머니가 그에게 요구해 온 것이기도 했다.
품위, 우아, 엄격, 냉철. 절도 있는 동작과 정제된 표정. 그 밖에 어머니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자신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나 에리히는 소년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모든 것.
그러니, 한때는 이 아홉 살 위의 사촌 형을 동경했다. 자신도 아홉 살을 더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그는 심지어 에리히의 용모마저 부러워했다. 황자인 자신보다도 더 선대 황제를 닮았기 때문이다.
제러드와 에리히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도 그렇게 생겼다면 그들과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타고난 성정이든 혈통이든, 그 얼굴까지도 원래부터 자신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그는 에리히를 증오했다.
죽은 황태자도.
자신은 그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어째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혈관에 흐르는 고귀한 피의 농도가 짙은 것이 고통의 원인이라면, 그들의 피야말로 자신의 것보다 고귀할 터인데.
“그래. 그러시군.”
리누스는 오히려 속 시원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이제 그는 소년 시절처럼 불가능한 우애 따위를 갈구할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면 에리히 클라우제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본디부터 그랬다. 에리히는 제러드의 사촌이지, 그의 사촌이 아니었다.
에리히가 그의 안에 들끓는 분노를 눈치채지 못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아이를 어떻게 돌볼지는 나와 내 아내가 결정할 일이야. 그보다 리누스. 넌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도망친 것 같더군.”
“…….”
“너 때문에 에른스트 쪽 사정을 좀 알아봤다. 호위와 시녀가 처형됐어.”
리누스는 침묵했다.
“에른스트 공작도 다급할 테지. 황후 폐하께 추궁당하기 전에 널 찾아야 할 테니까.”
이건 클레어가 괴로워할 것 같아 그녀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의 정보팀은 에리히가 루덴도르프 역에 내리기도 전에 에른스트의 동향 파악을 끝냈다.
리누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의 행적을 역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에른스트의 움직임을 알아내는 것은 더 쉬웠다. 그들은 리누스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며 그를 찾고 있었으니까.
그 결과, 수도까지 리누스를 수행하기로 했던 호위와 시녀가 모두 책임을 지고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시녀까지 죽였는데 하인과 마부가 무사할 리 없었다.
책임자 처벌 다음에는 수색이다. 리누스가 들른 식당과 숙박한 여관의 주인까지 끌려갔다. 정보다운 정보가 나올 때까지는 죽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에른스트에서는 지금쯤 네가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도 알 거다.”
“그래서?”
“원한다면, 행적을 감춰 주지.”
리누스가 놀란 얼굴을 했다.
에리히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뛰어든 곳까지는 추적할 수 있지만, 여기까지 떠내려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지금 내 아내와 호위팀밖에 없어. 죽고 싶어서 바다에 뛰어든 게 아니라 황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지.”
“에리히.”
“어딘가 원하는 곳으로 떠나도 되고, 아니면 외진 별장 같은 곳에서 휴양을 하는 것도 좋겠군. 금전도, 생활도 지원해 줄 테니 달리 신경 쓸 일은 없을 거다.”
리누스는 소파에 파묻힌 채 충혈된 눈으로 에리히를 노려보았다.
“목적이 뭐야?”
“널 상대로 목적 따윈 없어. 호의로 해 주는 말이다. 죽이지 않고 제거하고 싶다면,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전두엽 시술을 한 다음 어디 시골에라도 처박았겠지.”
에리히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제러드의 장례식 날에 구토하느라 장례식장에는 들어오지도 못했던 섬약한 열다섯 살의 소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늘 용기 없는 표정으로 멀리서 뱅뱅 맴돌던 여위고 창백한 얼굴도.
그때의 인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는 아마 클레어가 아니었어도 리누스를 해치는 걸 망설였을 것이다.
필요할 때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과 기꺼이 저지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리누스는 이제 그때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에리히의 말을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며 사납게 말했다.
“내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궁에 연락해야지.”
“…….”
“달아날 게 아니라면 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나.”
“지금까지 날 가둬 두고도 아무 일 없으리라고 믿는 건가?”
“가둔 것이 아니라 네가 폐렴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던 거다.”
에리히의 말은, 엄밀하게는, 그렇게 주장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정말로 폐렴 치료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게 한 거라면, 적어도 소식은 넣었어야지.”
“서로 뻔히 아는 사실을 번거롭게 설명하게 만들지 마라, 리누스. 나는 너와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야.”
익사할 뻔한 리누스를 구해서 보호했다.
다소간의 절차적인 문제가 있었고, 어쩌면 리누스가 바다에 빠진 이유에 대한 것부터 음모와 조작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황후도, 에른스트 공작도, 공개적으로 에리히를 적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작해야 연락이 며칠 늦어졌다는 것만으로 클라우제너와 원한을 맺을 수는 없으니까.
리누스가 어금니를 물고 대꾸했다.
“진짜로 날 구한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널 구하라고 명령한 것이 나든 내 아내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우리 둘 다 클라우제너이고, 둘 중 누가 말해도 차이는 없어.”
“…….”
“물리적으로 물에서 건져 낸 사람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따로 보답할 수 있도록 불러 주지.”
리누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역시 변했어.”
“그럴 수도 있지.”
에리히는 담연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디가 어떤 방식으로 변했는지 리누스는 진짜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리누스만이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구도.
아들과 놀기 위해 장난감 칼을 만지고, 뺨에 뽀뽀를 받을 때마다 다정한 마음이 드는 게 뭐가 대단한 변화란 말인가. 그런 건 그냥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본질적인 변화는 그런 곳에 있지 않다.
그는 굳이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어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 폐렴이 나을 때까지는 어차피 움직일 수 없을 테니.”
“…….”
리누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에리히는 그를 놓아두고 밖으로 나왔다.
‘변한 건 겉모양뿐이었군.’
예민하고 회피적인 성정은 그대로인 모양이다.
리누스에게는 군주가 될 자질이 없다.
나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나약함으로 인해 혈관에 흐르는 고귀한 피가 요구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은 죄다.
그러니 리누스는 지금 도망쳐야 할 것이다.
황후가 그의 머리 위에 관을 올려놓고 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테니 말이다.
엘리엇은 간식 상이 치워지고 나서 몇 분 되지도 않아 곯아떨어졌다. 신나게 놀고 배불리 먹었으니 졸리지 않고 배기겠는가.
“저녁까지 푹 자겠지?”
클레어는 엘리엇을 안아 아이 방으로 옮기면서 희망 섞인 추측을 했다. 제니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제 생각엔 저녁 식사 시간엔 깨워 드려야 할 거 같아요. 밤에 일어나시면 안 되니까.”
“음. 그러면 안 되지.”
엘리엇은 요 몇 달 사이 훌쩍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클레어는 침대에 아이를 눕혀 놓고 쭉, 기지개를 켰다. 딱히 몸이 피곤할 일은 없었으나 리누스 문제로 심력을 소모한 탓인지 몹시 피곤했다.
“나도 침실에서 좀 쉬어야겠어. 에리히가 내려오면 침실로 오라고 전해 줄래?”
“네, 마님.”
하녀가 공손히 대답했다.
클레어는 2층에 있는 침실에서 잠깐 눈을 붙일 작정이었다. 에리히가 오면? 바디필로우 삼아, 탄탄한 복근에 다리를 얹어 놓고 자면 될 일이다.
그러나 본디 바쁜 사람의 낮잠 계획은 좀처럼 성사되지 않는 법이었다.
클레어가 머리를 풀고 겉드레스를 벗은 시점에서 가정부가 문을 두드렸다.
“공작 부인,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군데?”
“빅토리아 대공 전하와 루덴도르프 후작가의 헤르만 경, 그리고 블룸 남작가의 요안나 양입니다.”
“하아아…….”
헤르만 하나라면 무시할 수 있지만, 요안나를 무시하는 건 꺼려졌고, 빅토리아 대공을 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올 거면 옷을 벗기 전에 오지. 피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