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요안나는 바짝 긴장한 채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빅토리아 대공은 아이 방으로 초대를 받아 올라갔고, 응접실에 남은 것은 그녀와 헤르만뿐이었다.
공작 부인은 아마 빅토리아 대공에게 먼저 가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여유가 생기면 응접실로 올 것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세 시간? 네 시간?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니 오래 기다릴 각오는 하고 있었다. 사실 만나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요안나의 진짜 고민은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였다. 앉아서? 아니면 무릎을 꿇고?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블룸 영애. 공작 부인께서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걸로 위세를 부리실 분이 아니니까요.”
“네.”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도 공작 부인을 오래 붙들어 두시진 않을 겁니다. 애초부터 공작 부인이 아니라 영식을 만나러 오신 터라서요.”
“고맙습니다.”
요안나의 인사에 헤르만은 멈칫했다.
“제가 지금 감사 인사를 들을 만한 말을 했던가요?”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 공작 영식을 만나러 오시는 건, 가까운 친척 간의 다정한 방문이라 혼자 몸 가볍게 오실 수도 있었는데, 공자께서 저를 끼워 주셨으니까요. 저 혼자 왔으면 아마 대문이 열리지 않았을 겁니다.”
“감사 인사는 너그럽게 허락해 주신 대공 전하께 올리시지요. 저도 사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쩌나 하다가, 대공 전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다는 말씀에 재빨리 수행하고 싶다고 청을 올린 것뿐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헤르만의 미소는 짙었다. 일차적으로 빅토리아 대공을 에스코트하는 것 자체가 영예였고, 요안나를 끼워 줌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증명했으며, 블룸 남작가에 은혜를 입혔다.
조그만 루덴도르프 사교계라면 아마 하루 안에 전부 말이 퍼질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수도에도.
블룸 남작가가 어떻게 되든, 헤르만에게는 손해될 게 없었다.
요안나도 그것을 알기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외면하실 수도 있었는걸요. 실제로 후작님께서는 저희 어머니를 문전 박대 하셨답니다. 편지도 돌아왔어요.”
“아, 저런…….”
도움을 청하러 온 귀부인을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내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게다가 비록 지금은 관계가 느슨해져 주종 계약이 해제되었지만, 블룸 남작가는 한때 루덴도르프의 가신이었던 가문이다.
적어도 편지에 답장하거나, 비서가 대신 맞이하게 했어야 했다.
요안나는 헤르만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후작님께서 각별히 잘못하셨다는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블룸과 루덴도르프 사이에는 이미 아무런 의무도 남아 있지 않고, 저희 어머니가 어린 시절 동무였다는 이유로 후작 부인께 오랫동안 무례하게 굴기까지 했지요.”
“영애.”
“저도 후작 부인을 위해 해낸 일이 아무것도 없고요. 블룸이 어리석은 짓을 했으니, 블룸이 책임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요안나는 단정하게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 브루노를 빼고 온 가족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멸문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응답이 돌아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루덴도르프 후작저는 차갑게 문을 닫았고, 다른 곳도 다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해 보려 했다. 클라우제너를 섬기는 가신과 혼맥이 있거나 친분 있다는 집안부터, 언젠가 잘츠기터 사교계에서 훌륭한 평판을 받은 적이 있다는 숙녀까지. 그리고 사제와 관료에게도.
그 정도 입장으로 공작 부부에게 직접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러는 것이다.
누구라도 좋은 말 한마디를 공작의 귀에 흘려 넣고, 사죄할 기회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사교계의 그 누구도 블룸 일가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혼처 예정이었던 곳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감입니다, 블룸 남작 부인. 처지는 딱하게 되었지만, 우리도 입장이 난처해요.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이들 결혼도 취소했으면 해요.]
[뭐, 라고요?]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파혼서를 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하셨으니 어쩔 수가 없네요. 어차피 블룸 공자가 우리 마누엘라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한 것도 아니고, 둘 사이에 뭔가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그냥 부인과 제가 결정한 것이니, 저희 선에서 파혼해도 문제없을 것 같군요.]
블룸 남작 부인은 갈 곳 없는 노처녀를 구제해 준 게 누구인데 그러느냐고 가슴을 쳤지만, 요안나는 마누엘라를 위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의 품위 있는 가문들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법률 고문과 재산 관리인 역시 하루아침에 그만두었다.
[송구합니다만, 괴르델러 백작님은 제 은사의 선배시기도 하고, 감히 그분과 법정에서 맞붙을 생각은 없습니다. 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는 걸 빤히 알면서 남작님에게 당당하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요. 원하시면 다른 법률 사무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남작님께서 절 믿고 재산 관리인의 직무를 맡겨 주셨지만, 저는 클라우제너 장학 재단의 후원으로 학교를 다닌 사람입니다. 책임이 있으니 인수인계까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둘 모두 가신도, 블룸 남작가의 후원을 받은 처지도 아닌 단순 고용인이었기에,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내렸으니,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다른 고용인들이 따라서 그만두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아직 소송을 시작하기는커녕 괴르델러 백작이 내놓은 선택지에 대해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블룸 남작은 그걸 겪자마자 곧바로 에른스트 공작령으로 떠났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적어도 클라우제너와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에른스트 공작이 남작을 만나 줄 리 없었다. 파티장에서 한 번 인사를 나눈 적밖에 없는 사이니까.
결국 할 일을 하러 온 사람은 요안나밖에 없었다.
클레어가 나온 것은 한 시간쯤 후의 일이다. 생각보다 빨랐다.
요안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헤르만이 먼저 공손히 인사하고 클레어의 손등에 키스했다.
“안 만나 주실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태를 보여 주시니 제 가슴이 무척 설렙니다.”
“아무한테나 플러팅 하다가 코뼈 부러져요, 헤르만 경. 모처럼 어머님께서 잘생긴 얼굴을 물려주셨는데, 소중하게 여기셔야죠.”
전 같았으면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실없는 소리를 한두 마디 던졌겠지만, 헤르만은 이번에는 머쓱하게 코만 어루만졌다. 코가 아니라 목이 더 무서웠지만.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 루덴도르프의 대접이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더군요. 티파티에서의 일은 제외하고요.”
“다행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 말을 전달하는 것을 조금 너그럽게 봐주실 수 있을까요? 아버지께서는 공작 각하의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글쎄요. 설령 에리히에게 물질적인 사과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고 해도, 루덴도르프 가문한테 그럴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헤르만이 민망해하지도 않고 미소를 띠었다.
“공작 부인께 말씀 올려 보긴 했으니, 이걸로 제 역할은 다한 셈입니다.”
“경이 할 일은 후작가 안에 더 있겠지요.”
클레어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을 받은 요안나가 무릎을 구부려 인사하는 대신, 바닥에 두 무릎을 모두 꿇었다.
“블룸 영애!”
클레어는 당황했다. 헤르만도 깜짝 놀라 요안나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요안나는 헤르만의 손을 가볍고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클레어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을 모조리 비웠다. 이렇게 해서 용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족 중 아무도 온당한 행동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라도 해야 했다.
“브루노가 부인의 명예를 모욕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뱉은 것에 대해서 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공작 부인.”
그녀는 브루노가 예전부터 무슨 소리를 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말을 클레어가 들었든 듣지 못했든, 공작이 보복을 했든 아니든, 사과를 해야 했다.
클레어가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러지 마세요, 블룸 영애. 영애는 제게 사과할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못난 형제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지기만 했을 텐데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안나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에게 브루노 때문에 힘들었겠다고 말해 준 사람은 클레어가 처음이었다.
부모님은 왜 브루노를 잘 보살피지 못했느냐고 그녀에게 화를 냈고, 브루노를 싫어하는 이들은 같은 집안 사람이라며 그녀도 기피했으니까.
어느 쪽이든 브루노가 그녀의 책임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큰 고통을 받은 분은 공작 부인이시니까요. 당연히 엎드려 빌어야 할 사람은 브루노고, 또 관리 책임은 저희 부모님께 있지만, 실은 브루노가 온전치 못해서요.”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모님은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전 그 애에게 병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상태인 줄 빤히 알면서 티타임에 데려갔고, 입을 막지 못했으니, 제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브루노와 부모님의 몫은 물론, 제 책임만큼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블룸 영애 탓이 아니에요.”
클레어는 그녀의 사정을 이해했다.
남동생의 행실에 책임이 있는 누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요안나는 그렇지 않았다. 부모가 옹호하는 미친 형제를, 그것도 가문의 후계자를 어떻게 말린단 말인가.
“장녀가 제일 낫군.”
에리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