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에리히!”
클레어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응접실 문간에 에리히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평소라면 노크를 했을 것이다. 방문객 중 숙녀가 있다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상대가 블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블룸 가문의 딸을 숙녀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의외의 대화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가 문간에 있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던 헤르만이 뒤늦게 묵례했다. 무릎 꿇고 있던 요안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아예 허리까지 숙여 깊이 절했다.
“놀랍군. 사죄를 하러 온다면, 당연히 남작 부부가 올 줄 알았는데.”
“송구합니다.”
“가문을 위하는 블룸 양의 용기도, 마음도 인정하겠네. 그러나 사죄도 자격 있는 사람의 몫이지.”
요안나가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 바람에 요안나를 일으키려던 클레어의 시도는 완벽하게 무위로 돌아갔다. 그녀는 요안나의 팔을 잡은 채로 에리히를 돌아보았다.
“너무 냉정하게 말하지 말아요. 영애는 사과를 하러 온 거잖아요.”
“그래. 그래서 기특하다고 하지 않았나. 다만 그게 ‘블룸 가문’의 사과가 될 수는 없다는 거지.”
클레어는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에리히의 말에서 생각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어서서 에리히를 노려보았다.
“블룸 남작가에게 뭘 한 거예요?”
“적절한 후속 조치.”
클레어는 놀라서 조금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이마를 한번 쓸어 올린 뒤 에리히 쪽으로 다가서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뭐, 사과하러 오라고 편지를 보낸 건 아닐 테고.”
그 자리에서 브루노를 죽여 버리려고 했던 것은 홧김이었다 치더라도,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이상 그 후속 조치라는 게 온건한 것일 리 없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움직였다면 더더욱.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챈 듯 에리히가 먼저 대꾸했다.
“감정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았어.”
“충분히 감정적이었을 것 같은데요?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했잖아요.”
“괴르델러 경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데, 그것까지 너와 의논해야 하나?”
“에리히.”
클레어는 한순간 감정이 치받는 것을 느꼈으나 애써 참았다. 대신 그녀는 침착한 어조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내 일이에요.”
“물론 네 일이지만, 클라우제너의 명예에 대한 일이기도 해.”
“아니.”
클레어는 또 한 번 한 박자 쉬었다.
“나한테 말 안 한 거, 내가 반대할 걸 아니까 그런 거잖아요. 설마 멸문시키겠다, 뭐 거기까지 가진 않았겠죠?”
“아, 공작 부인. 그런 게 아니에요.”
요안나가 당황해서 끼어들려는데, 에리히가 그녀를 무시하고 클레어에게 말했다.
“네가 싫어하는 ‘옛 방식’대로 하지는 않았어.”
“당연한 소리 말아요. 불쾌했던 건 사실이지만, 욕 좀 들었다고 남의 집을 풍비박산 낼 수는 없어요. 게다가 당신이 그 자리에서 바로 보복했잖아요.”
“놈이 그 자리에서만 모욕적인 소리를 뱉은 게 아닌데, 그냥 방치하란 말인가? 추문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요. 위자료 청구나 좀……. 나, 저 얼굴 알아.”
클레어가 에리히를 노려보았다.
“웃지 마요. 지금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했죠?”
“내가 지금 웃고 있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면 그 얼굴 뭔데?”
“글쎄.”
에리히가 팔짱을 풀고 클레어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세운 채 허리만 구부려 거리를 좁혔다.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얼굴이 아니었을까? 지금 딱 그런 기분인데.”
“남들 앞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클레어는 버럭,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손 닿는 거리였다면 팔뚝이나 등짝을 한 대 때려 줬을 것이다. 에리히가 굳이 평소보다 거리를 벌린 채 서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클레어는 기가 막힌 기분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가 허물어지면서 비로소 미소가 흘러내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해졌어?’
그리고 헤르만과 요안나가 눈 둘 곳 없어 어쩔 줄을 모르거나 말거나, 한 걸음 더 다가서서 클레어의 허리를 감아 안으려고 했다.
“안 돼요.”
사실 그 정도 애정 표현은 클레어에게도 허용 범위였으나, 얄미웠으므로 그녀는 찰싹 에리히의 손등을 때려 치워 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블룸 영애, 설마 이 사람이 지나친 일을 한 건 아니죠?”
“놈에게서 경의 칭호를 거둬들이도록 한 게 다야.”
에리히가 웃음을 지우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거라면 너도 반대할 이유가 없을 텐데? 명예는커녕 예절도 모르고, 위아래도 없는 돼지 같은 놈 따위가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핏줄을 후광처럼 입고 위세 부리는 건 네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잖나.”
“싫어해요. 싫어하지만,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가문 하나를 뭉개는 것은 옳지 않아요.”
“너와 상관없이 내 판단은 똑같았을 거야. 감정적인 문제도 아니고. 놈은 귀족이 될 자격이 없어. 그리고 그런 놈을 후계자로 결정한 블룸 남작가의 상태도 뻔해. 남겨 두는 것은 해악일 뿐이지.”
가주가 직접 사죄하러 왔다면 또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관용을 보일 여지조차 없었다.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기껏해야 아내가 모욕당한 일로 공작이 화가 나서 날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클레어는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껄끄럽게 생각하는 부분은, 에리히가 판결을 먼저 내리고 거기에 절차를 붙였다는 점이지,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브루노 블룸 같은 놈에게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지방 남작가의 조그만 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에리히의 시선이 요안나에게로 이동했다. 차갑고 새파란 눈동자가 직시하자 요안나는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잠시 응접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에리히가 자신에게 발언할 기회를 준 것임을 깨달은 요안나가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책임지고 후속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미 공작은 그녀에게 지참금으로 블룸 가문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질 수 있다.
아마도 그녀의 부모님은 가문을 딸의 지참금으로 삼으라는 공작의 의도를 곡해할 게 분명했다.
공작이 화풀이를 하고 있을 뿐이니, 우선 눈속임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리라. 이미 그녀는 아버지가 방계 혈족 중 가장 늙고 병든 남자를 자신의 결혼 상대로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단 결혼을 시켜 지참금으로 가문을 딸려 보냈다가, 남편이 죽어 남동생에게 다시 맡겼다고 하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그걸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공작이 요구하는 것은 블룸 남작가가 귀족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사죄하고, 브루노를 제재해야 한다.
할 수 있다. 그녀는 이제 곧 서른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부모님이 개입하기 전에 가문에 대한 권리를 정확히 분할하도록 계약서를 쓰고 결혼한 다음, 여주인으로서 책임을 지고.’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들려는 찰나에 클레어가 말했다.
“블룸 영애가 가문을 계승하면 되겠군요.”
“네?”
“그렇잖아요. 남작 부부에게도, 아들에게도 자격이 없다는 게 에리히의 판단인 셈인데, 딸은 그렇지 않죠.”
요안나는 깜짝 놀랐다.
“아, 아뇨. 저는 후계자 교육을 받은 일도 없고, 외동딸도 아닙니다. 그런 일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영애가 남동생보다 훨씬 나은 사람인 게 분명한데.”
클레어가 말했다.
요안나는 당황해서 이번에는 에리히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화를 내지도, 비웃지도 않은 채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로 그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여태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가능성에 호흡이 가빠졌다.
“제가,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도 여자지만, 남작이에요. 집안에서 반대가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되긴 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공작 부인과 달라요. 그냥 평범하고…….”
“심사숙고해 보세요. 영애가 결심한다면, 나도 도와줄게요.”
클레어가 대답했다.
두 숙녀는 해야 할 이야기가 더 있다며 자리를 옮겼다.
헤르만은 완전히 잊혔으나,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즐겁기도 했다. 공작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그걸 약점으로 쥘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과히 내키지 않는 얼굴로 에리히가 물었다.
“경은 이모님을 기다릴 작정인가?”
“대공 전하께서는 아마 오늘 밤에 여기 머무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엘리엇 경을 워낙 그리워하셨거든요.”
“흠.”
“블룸 영애가 돌아오면 그녀를 바래다줄 작정입니다.”
“그렇게 하게. 마차를 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에리히의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지는 것을 헤르만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셨습니까?”
그러자 에리히의 시선이 싸늘하게 그의 얼굴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