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헤르만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눈치챘을 정도이니, 공작 부인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처음부터 블룸 영애에게 남작가를 계승시킬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굳이 가문을 장녀의 지참금으로 삼으라는 미묘한 요구를 할 리가 없었다.
가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소실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공작과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다.
블룸 남작이 생각해 낸 꼼수를 클라우제너 공작과 괴르델러 백작이 떠올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요안나는 결혼에 생각이 매몰되어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건 요안나의 잘못이 아니다. 혼기가 지난 숙녀는 무얼 해도 결혼 이야기를 듣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시야도, 생각도 편협해지기 쉽다.
에리히가 가문의 이름을 없애고자 했다면, 그런 선택지를 주지 않고 바로 작위를 박탈하고 가문 구성원 전원을 평민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곳이 에른스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이라고는 해도, 편지 한 장으로 양해를 구하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지배 가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문의 권리를 장녀의 손에 맡기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 자체가 시험으로 보였다.
‘야망이 있다면 가문의 실권자가 되기 위해 찾아올 것이고, 현명하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얻을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겠지.’
헤르만 자신도 비슷한 입장이 아니었던가. 그는 야망을 가지고 찾아왔었다.
하지만 요안나 블룸은 둘 다 아니었다. 그녀는 클레어에게 사죄를 하러 왔다.
그건 그녀가 자기 이득보다 책임을 중시하는 사람이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만하면, 공작의 목적에 충실히 봉사할 수 있다. 능력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인품과 책임감은 증명되었다.
“작위가 있는 가문을 가신으로 거둘 기회는 흔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공작 부인께는, 아니지.”
헤르만은 호칭을 고쳤다.
“델포드 남작님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아무리 공작 각하시라도, 여남작을 남작님의 측근으로 만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경이 나불대기 좋아하는 성미인 줄 내가 익히 짐작했지.”
에리히는 삐딱한 태도로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나 헤르만은 그의 위협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로저 카슨이었다면 몇 마디 더해서 공작의 무표정을 깨는 즐거움을 누렸겠지만, 헤르만은 인생의 재미보다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블룸 남작이 에른스트 공작가로부터 접견을 거절당하고, 에른스트 사교계의 문이 꽉 닫혀서 도저히 열릴 가망이 없다는 것까지 확인하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이미 루덴도르프에서 한 차례 겪어 보았으므로, 그는 빠르게 체념했다.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문을 닫았는데, 그 사교계 구성원들이 블룸 남작가를 도울 리 없다. 아니, 돕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을 것이다.
‘쯧. 결국 요안나의 지참금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수밖에 없겠군.’
내키지는 않았으나 클라우제너 공작의 눈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요안나가 철이 없고 이기적이라서 가끔 제 남동생을 질투하거나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하지만, 근본이 나쁜 아이는 아니다.
나이 서른이나 된 노처녀이니, 생각이 있으면 어차피 이보다 나은 혼처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으니, 저도 좋아하겠지.’
아내를 납득시키는 건 조금 더 힘든 일이겠지만 말이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공작은 곧 다른 곳으로 떠날 테고, 이런 일에 오래 신경 쓸 리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블룸 남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집사가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로비에 도열해서 그를 마중해야 할 급사와 접객 하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 마님은 어디 계시느냐? 집사는?”
남작은 혼자서 꾸물거리며 나온 급사에게 물었다. 급사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만찬장에 모여 계십니다. 주인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일가친척분들도 모이셨습니다.”
“알았다.”
남작은 불쾌한 기분으로 대꾸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이쪽에서 발로 뛸 땐 나 몰라라 손을 끊으려 하더니, 이제 와서 더럭 겁이라도 난 건가.
끼익.
오래된 만찬장의 문이 열면서 소리를 냈다.
긴장한 얼굴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긴 테이블에는 차 한 잔 나와 있지 않았다.
남작 부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오셨어요, 아버지?”
요안나가 대표로 일어서서 인사했다. 남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온한 분위기의 만찬장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냐? 브루노는?”
“브루노는 병원으로 보냈어요. 니베르크에 있는 요양 병원이에요.”
“네가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네 멋대로!”
블룸 남작이 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요안나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가신과 방계 혈족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부친이 아랫사람에게 소리 지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나 눈에 잘 들어왔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알코올 중독자를 보살피는 일에 익숙한 곳이라고 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으시니, 누나인 저라도 할 수밖에요.”
“요안나! 아니, 여보! 이 애가 이러도록 가만히 내버려 뒀어?!”
블룸 남작은 이번에는 남작 부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남작 부인은 창백해진 채 대답이 없었다.
이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브루노가 끌려간 것은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네놈들 따위가 감히! 천한 하인 놈들 따위가 내 명령을 거역해?]
[이거 놔라! 이거 놔!]
[네놈들,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악! 악! 이 개 같은 년!!]
브루노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드러누워 온갖 추악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요안나의 명령을 들은 집사와 하인들은 그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남작 부인은 그걸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인들이 브루노를 마차 안에 던져 넣자, 요안나가 손수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마차 문을 긁으며 발광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 요안나의 심장은 그런 일에 쿵쾅거리지 않았다.
[병원에 확실히 인도하세요. 브루노가 제멋대로 나온다면, 기부금을 도로 회수할 거라는 것도 확실히 해 두시고요.]
[알겠습니다, 요안나 양.]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요안나는 브루노를 병원까지 호송하는 일을 가신에게 맡겼다. 이 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해 준 사람이었다.
아마 브루노는 다시는 병원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공작 부인의 일도 일이었으나, 벌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죄를 따지기 시작하니 저지른 일이 너무 많았다.
브루노에게 폭행당한 가신의 자녀들이나 괴롭힘 당한 하녀도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너 미쳤니? 네가 뭔데 이렇게 겁도 없이 나대?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우리 가문을 네 지참금으로 주라고 했다는 걸 믿고 이러는 거니?]
블룸 남작 부인은 미친 사람처럼 발작하며 소리를 질렀다.
[공작이 진짜로 네 뒷배라도 되어 준 것 같아서 그래? 네가 어떻게 브루노한테 이러니? 우리 집안 후계자에게!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요안나는 그녀에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 들을 때마다 가슴을 긴 칼로 저미는 듯 고통이 치솟았지만, 시선도 주지 않았다.
클레어가 미리 충고했다.
[영애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설득되지 않아요. 애초부터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남동생 편을 들진 않았겠죠.]
[네…….]
[어머니 말을 무시하는 게 힘들 테니, 그냥 듣지 말고 대답도 하지 마세요. 중요하고 확실한 건, 가문의 권리와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지요. 영애가 설득할 상대는 부모님이 아니라 가신들이고요.]
아무도 따르게 할 수 없다면, 주인이 될 수 없다. 고용인이 돈을 따르지 않고, 가신이 주종 계약을 포기하고, 방계가 본가를 무시한다면, 귀족원 명부에 가주로 등록되어 있는 이름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요안나가 침묵하자 블룸 남작 부인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을 기세로 달려들었으나, 집사가 가로막았다.
모두가 가문을 살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앞에 나섰을 때 새로운 주인이 될 자격을 가진 자가 없었을 뿐이다.
요안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들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도.
그러니,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
요안나는 침착하게 블룸 남작을 불렀다. 블룸 남작은 제 딸이 그렇게 당당하고 침착한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만만한 딸이 아니라, 낯선 귀족이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인장 반지를 내놓으세요.”
요안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