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블룸 남작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뭐, 라고?”
“인장 반지를 내놓으세요. 이 이상 아버지에게 블룸 남작가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저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결정입니다.”
“감히, 너희가, 감히! 이런 하극상을!”
남작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물드는 것을 보면서도 요안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미움받는 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남작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소리 지르는 것 말고는 아무 힘도 없다.
그 권위를 쥐여 준 사회가 등을 돌리자 눈앞에 남은 것은 시시비비를 가릴 줄 모르는 못난 사람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 없고, 이대로 있으면 블룸 남작가는 멸문할 뿐이에요.”
요안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브루노, 저, 이렇게 네 사람은 작위와 가문을 잃어도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겠죠. 가문의 귀속 재산 이외에도 재산이 있고, 수도에도 저택이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가문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걸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너 지금 농노 따위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냐?”
“이제 농노는 없어요, 아버지. 저는 농노가 아니라 우리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들, 우리 가문의 땅을 고향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블룸 남작가가 비록 델포드나 크로지크, 하다못해 루덴도르프처럼 적극적으로 사업을 일으켜 흥성하지는 못했지만, 장원과 작은 사업들이 몇 가지 있었다.
작위가 박탈되면 그것이 모두 공중분해 된다. 땅에는 새로운 주인이 생기겠지만, 지금처럼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 영지민을 그대로 소작시키거나 일꾼으로 고용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버지가 어리석은 후계자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작가의 모든 사람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요.”
“하, 네가 그 작은 동정심 때문에 멍청한 짓을 할 줄 내가 이미 알고 있었지.”
“이미 가문은 무너지기 직전이에요.”
“누구 마음대로 가문이 무너진다는 거야? 클라우제너 공작이 네게 가문을 지참금으로 가져가라고 했다고, 그게 무슨 네게 주는 선물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거 우리 가문의 대를 끊으라는 말이다!”
“아주 자비로운 말씀이셨죠. 지금 당장 저희 가문을 끝장낼 수 있으실 텐데도 그러지 않고, 가문 구성원들이 생활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차근차근 정리할 시간을 주신 거니까요. 부모님 두 분의 권위도 어느 정도 유지한 채로요.”
“뭐! 너 감히 지금 이 아비가 아니라 공작 편을 드는 것이냐? 오호라, 보아하니 공작의 잘난 얼굴에 홀려서 제정신이 아닌 게로군.”
“아버지야말로 미치셨어요? 지금 그 말씀, 저만 욕한 게 아니라 공작 각하까지 모욕한 거예요.”
요안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명예를 모르는 분이었군요. 이런 분이신 줄 몰랐는데……. 아버지가 이런 분이니, 브루노도 그런 애로 자란 거군요.”
“요안나!”
블룸 남작 부인까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두통이 일어서 요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가신들이 있는 앞에서 머리를 싸맬 수는 없었다.
상대할 필요 없다는 클레어의 말을 그녀는 다시 되새겼다.
중요한 것은 가문을 다스리는 일이지, 가족이 아니다. 블룸 남작이 자신에게 차가웠기에 지금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페터 경, 플로린 씨, 인장 반지를 가져와요.”
요안나의 명령에 젊은 가신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블룸 남작은 그들이 뭘 하려는지를 깨닫고 황급히 물러섰다.
“그만둬라, 무엄한 것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남작은 재빨리 돌아서서 달아나려고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철컥! 철컥!
만찬장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는데, 아무리 당겨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빗장을 지른 것 같았다.
남작은 새파랗게 질려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요안나가 말했다.
“제가 두 분을 존중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젊은 플로린이 남작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는 가신이긴 했으나 주군에 대한 충성심 따위, 없어진 지 오래였다.
블룸 남작도, 후계자도, 존경할 만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니까.
다만, 지금까지 일가가 살아온 땅이기에 애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가 남작을 존중하지 않고, 남작에게 처벌할 힘이 없다면, 남작이 가진 권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피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플로린은 그 사실을 기묘한 쾌감과 함께 깨달으며, 남작의 손을 잡아 비틀었다.
“이, 이, 괘씸한 놈! 무엄한 것! 살려 두지 않겠다!”
남작은 발광했으나 플로린은 손쉽게 살찐 손가락에서 인장 반지를 빼냈다.
그것을 페터가 요안나에게 공손히 바쳤다. 요안나는 인장 반지를 받았다가, 안쪽에 축축한 땀이 묻어 있는 것을 깨닫고는 손수건을 꺼내 반지를 닦았다.
블룸 남작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던 법률 고문이 준비된 서류를 내놓았다. 남작은 플로린의 손에 질질 끌려 그 앞에 앉혀졌다.
“안 해! 이건 패륜이다! 하극상이야! 신께서 내게 주신 지엄한 권리를 이렇게 강도질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발광하며 펜을 집어 던졌다. 플로린이 그의 어깨와 가슴을 눌러 고정시키자, 다른 가신이 남작의 손에 다시 펜을 쥐여 주었다.
“천벌을 받을 것들! 이건 반역이다! 귀족원에서 이걸 두고 볼 것 같으냐!”
“서명하세요, 아버지. 브루노는 죽을 때까지 요양 병원에서 보살핌을 받을 테고, 두 분도 제가 편안한 은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시겠어요.”
남작 부인이 흠칫 당황하며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요안나는 그녀가 궁금해할 만한 것을 일러 주었다.
“서명하지 않으신다면, 두 분을 유폐할 거예요. 아니, 그럴 기회라도 있길 빌고 있어요.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께서는 자격 없는 귀족에게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실 테니.”
백 개 가까운 눈동자가 남작의 몸에 박혔다. 그는 그 모두가 요안나에게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블룸 남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가주의 권위는 이미 아무 힘도 없었다.
떨리는 손에 법률 고문이 다시 펜을 쥐여 주었다. 남작은 문서 윗부분만 훑어보았다. 요안나에게 모든 권리를 생전 상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거기에 서명했다.
법률 고문은 이번에는 요안나에게 잉크 패드를 내밀었다. 그녀는 남작의 인장 반지를 든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서류에 눌러 찍었다.
“이것으로 서류는 완비되었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귀족원으로 보내어 승인받도록 하겠습니다.”
“하,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으냐?”
남작이 증오에 찬 눈으로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멀쩡한 후계자가 있는 가문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계집년에게 작위를 물려주었다는 걸 귀족원이 믿을 것 같아?”
“제 생각에는, 클라우제너의 노화를 사서 가문이 망하는 것보다 인연을 맺을 기회를 붙잡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 아버지.”
요안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인장 반지를 쥐고 돌아섰다. 가신들이 모두 그녀를 뒤따랐다.
클레어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에리히는 가스등을 켜 놓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가스등 냄새가 침실에 나는 것 같아 클레어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블룸 남작가에서 온 연락인가요?”
“그래. 네가 신경 쓰고 있는 일이니, 시간에 상관없이 들이라고 했지.”
에리히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눈으로 쓰윽 문서를 훑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블룸 남작이 장녀에게 모든 권리를 상속한다는 문서와 작위 계승에 관한 서류들, 이에 대해 방계 혈족을 포함하여 가문 구성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한 연명 서약이 있었다.
클레어는 에리히의 목을 감듯이 하고 기댄 채 뒤에서 그 서류를 같이 눈으로 훑었다.
“생각보다 더 수월했네요.”
“어제 다녀왔잖아. 문제가 있을 것 같던가?”
“아뇨. 그래도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어요. 블룸 남작 부인의 친정 쪽은 여계 상속을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조건이 있더군.”
에리히는 서류 한 장을 따로 빼어 클레어에게 넘겨주었다. 클레어는 몸을 일으켜서 그것을 읽어 보았다.
“성사됐군요.”
“외가의 방계 쪽에서 남편을 고르기로 한 건 네 생각이 아니었던 건가?”
“아니에요. 난 그냥 결혼은 넓은 마음으로 상황을 열어 두라고 했어요. 정 곤란하면, 방계 혈족 중에서 양자를 들여도 되는 거고.”
하지만, 요안나가 이렇게 결정했다면 그것도 괜찮다.
블룸 가문은 존속될 테고, 인척 관계도 선대와 똑같이 유지됨으로써 블룸 남작령은 안정된 상태가 될 것이다.
“보수적인 선택이지만, 이해는 해요. 요안나 양은 처음부터 가문을 지키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한 거니까.”
사실 상황은 우스울 정도로 쉬웠다.
만일에 블룸 남작이 요안나에게만 나쁜 부친이고, 가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면 성사되지 않았으리라.
요안나가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반역을 꾀하며 사람을 포섭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자가 가문을 상속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어는 이 일이 시작된 첫날 블룸 남작가를 방문해 보고, 그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