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블룸 남작에게는 신망이 전혀 없었다. 가문의 사업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은 남작이 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마름과 재산 관리인도 정직한 사람이었다.
물론 남작 부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문이 똑똑한 아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기에 모자라다며 안타까워했다.
남작 부부가 에른스트 사교계를 드나들며 윗선에 줄을 대기 위해 노력하고, 브루노가 술에 절어 행패를 부리는 동안 실제로 영지를 보살핀 것은 요안나였다.
누가 비 오기 전에 제방을 수리하고, 제설을 지휘하고, 목장 주변의 산을 정리했는가.
누가 가난한 친척에게 먹을 것과 옷가지를 나누어 주고, 의사를 보내 주었는가.
블룸 남작 부부는 몰랐으나 가신들은 알고 있었다. 요안나는 그게 잡다한 사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영주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
블룸 남작가에서 영지와 유대 관계를 맺어 온 것은 오로지 요안나뿐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마음 써 온 만큼 정이 있겠죠. 안 그래도 불안한데, 자기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영지가 피해를 입을까 봐 걱정인 것 같아요.”
“좋은 가주가 되겠군. 혈족을 보살피고, 가신과 영지민들을 다스리는 게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됐지.”
에리히가 그렇게 말하면서 읽고 있던 한 장짜리 보고서를 클레어에게 휙 내밀었다.
클레어는 에리히의 어깨에서 팔을 떼고, 이번에는 그 앞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에리히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건너편 의자보다 테이블이 물리적으로 가까운 게 당연했다. 어차피 단둘이 있는 공간이다.
허공에 뜬 클레어의 보드라운 발이 달랑달랑 흔들리면서 에리히의 종아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걸 의식하고 하는 일인지 아닌지, 클레어는 태연하게 보고서를 읽어 내리며 말했다.
“아, 용기가 모자란 것 같아서 좀 걱정했는데, 단호하게 잘 해냈군요. 인장 반지를 강탈하고 서명을 시키다니, 속 시원하네.”
“끝까지 지켜보고 오지 그랬나?”
“거기까지 끼어들면, 너무 클라우제너가 개입하는 것 같잖아요.”
클레어가 보고서를 내리고 몸을 구부려 에리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남작가 하나가 없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그 자체보다, 공작님이 화나서 뱉은 말 한마디에 가문 하나가 공중 분해되는 쪽이 훨씬 사회적으로 문제가 크죠.”
“…….”
“지금 삼킨 말 뭐예요?”
에리히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네가 그럴 때마다, 내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하지.”
“무슨. 정정당당하고 착하게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에리히는 대답하는 대신에 결혼반지 위에 키스했다. 클레어가 떨떠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좀 잘해 주든가.”
“내가 못 한 게 뭐가 있어서?”
“뚫린 입으로 하는 말이죠, 그게 지금?”
클레어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꼬집었다. 그리고 그에게 손끝을 빨리고 후회했다.
에리히가 웃음을 머금었다. 피가 몰려 발갛게 된 입술에서 의식적으로 눈을 떼면서 클레어는 말했다.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요안나 양이 아주 잘 해냈으면 좋겠어요. 여자라서 가문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도 열 받을 거 같으니까.”
요안나에게 좀 더 충고할 만한 것이 없을까? 단순히 지키기만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에른스트 공업 도시와 가까우면서 루덴도르프 평야의 혜택을 받았다는 지리적 관계를 생각하면, 전통적인 산업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대담한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에리히는 클레어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도로록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또 뭔가 계획이 생긴 건가?”
“으음, 내가 블룸 남작가의 경영에 너무 개입하는 건 좀 그렇죠? 사실 잘 아는 분야도 아니고.”
“크로지크는 거뒀잖나.”
“그건 원래 하려고 했던 사업에 끼워 준 거고요. 동업과 간섭은 다르잖아요. 요한 경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과 별개로, 크로지크 백작가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했죠.”
“이해관계라는 게 꼭 경제적 문제로만 겹치는 건 아니지.”
클레어는 눈을 깜박거렸다. 에리히는 자신의 자제력을 믿는 대신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대며 거리를 벌렸다.
“여자라서 가문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며. 그러면 네가 거둬서 가르치면 돼.”
“시녀로 삼으라는 뜻인가요? 하지만 그러면 클라우제너의 후광을 입는 게 돼요. 그것도 요안나 양 입장에서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긴 하겠지만, 결국 여자라서 공작 부인의 시녀 자리에 들어갔다는 게 되어 버리는데.”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공적을 만들어야지. 그것도 할 수 없나?”
“아, 이거 내 자존심을 건드리시네.”
에리히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일 믿고 맡길 사람 없어서 힘들다면서. 진짜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것저것 가리느라 놓칠 때인가?”
“음……. 하긴. 요안나 양이 날 도와준다고 하면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죠.”
“네가 몇 년이라도 더 먼저 작위를 계승했으니까, 선배로서 후배에게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면 좋겠지.”
클레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당신, 요안나 양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뭐?”
“진짜 명예가 무엇인지 안다니, 그거, 당신이 하는 칭찬 중에 최고 등급 아니에요?”
별달리 의식하고 있지 않았기에 에리히는 오히려 조금 놀랐다.
“그렇게 들리나?”
“아니, 당신이 여자를 그렇게 칭찬하는 거 진짜로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권유하는 것도 그렇고.”
“당연히 여자를 평가하진 않아. 이건 요안나 블룸이 남작이 될 자격이 있는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였어.”
“음, 그랬죠.”
클레어가 미묘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하고 테이블에서 내려섰다. 보드라운 발바닥이 실수로 에리히의 발가락을 밟았다.
슬리퍼 위로 밟혔으니 감촉을 모르는 게 당연한데, 에리히는 그녀의 무게와 촉감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아까부터 참으며 아랫배 안쪽까지 눌러 넣어 놨던 초조감을 밟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클레어의 허리를 끌어당겨 다시 자신의 앞 테이블에 앉혔다.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종아리와 발을 쓰다듬으며 제 의자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클레어가 고개를 숙였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이 에리히의 어깨와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촉촉한 피부에서는 꽃향기와 섞인 비누 냄새가 났다.
“진짜로 없어요? 여자를 평가한 적?”
“능력 평가라면 하고 있지만, 눈에 차는 사람이 좀처럼 없군.”
그녀의 머리칼 사이에 파묻힌 채 에리히가 대꾸했다.
하긴, 맞는 말이긴 했다. 클레어는 여태까지 자신이 물어보기 전에 그가 다른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쁘다, 아니다를 포함해서.
그걸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끌로 깎아 놓은 것 같은 뺨을 뭉개자 기분이 조금 더 나아졌다.
그녀가 팔걸이에 얹혔던 발을 움직여 옆구리를 건드리자 에리히가 흠칫했다.
쿵.
그가 초조감을 참지 못하고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기분이 더욱 나아져서 클레어는 생긋 웃었다.
“질투 났으니까, 내 마음 풀어지게 칭찬이나 좀 해 봐요. 요안나 양한테 한 것보다 좀 더 갸륵하게.”
“하.”
에리히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넌 내가 여태 본 것 중에 제일 이상한 여자야.”
“그거, 칭찬이에요?”
“설마, 기품 넘치고 정숙하며 귀족적인 숙녀라는 평가를 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 말에 클레어는 솔직한 얼굴로 웃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리히는 좀 더 가볍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가 별종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하지만 목구멍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이 세상에 너 같은 여자는 하나뿐이겠지.”
“좋아요. 그 말은 마음에 드네요.”
클레어가 그의 다급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로소 만족한 듯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에리히는 그녀를 밀어 눕히고, 물통 없이 길을 헤매다가 샘을 만난 사람처럼 엎드려 그녀의 입술을 빨아 마셨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을 미치게 하던 발을 만지려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아.”
처리해야 할 서류가 생각났다.
에리히는 몸을 일으켰다. 클레어는 인상을 쓰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대충 밀어 놓은 서류 사이에서 몇 장을 뒤져 냈다.
“뭐예요?”
“서명해야 해.”
에리히는 클레어 위에 몸을 구부린 채 머리 위에서 대충 서명하고, 펜과 서류를 쭉 밀어 의자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다시 클레어의 몸을 제 몸으로 덮었다.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클레어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여 뭔가를 속삭였지만, 들어 주지 못할 날도 있는 법이다.
29. 경계해야 마땅할 사람
블룸 남작가의 소식이 퍼지는 데는 채 사흘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남작 부부가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 사정 이야기를 한 덕분이었다.
“남작 부부는 아예 남작령을 떠났다면서요. 하긴, 브루노 경이 저지른 짓이 어지간했어야지요.”
공식적으로는 건강 문제로 은퇴하여 남방의 어떤 별장에서 휴양하기로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진짜 상황을 깨달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
“장녀에게 물려주게 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를 베푸신 것이지요.”
“요안나 영애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지요? 부모가 지참금이 아까워서 이제까지 억지로 잡아 뒀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제는 단숨에 작위와 영지를 가진 상속녀가 되었군요.”
아직 그녀가 외가와 교섭한 이야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기에, 다음 사교 시즌 결혼 시장에 나올 이 대형 매물에 대해 모두가 눈에 불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