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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1/263)

122화

작위 없는 청년들과 그 부모들은 모두 설레어 했다. 가문을 지참금으로 가진 상속녀가 루덴도르프에 나타난 게 얼마 만의 일인가.

“수도로 가지 않을까요? 그쪽에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인재도 많이 있을 터인데.”

“아무래도 이곳보다는 수도에 신랑감이 많겠지. 요즘 같은 세상, 신분보다 재력과 능력이 있는 데릴사위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블룸 남작 영애 정도의 조건이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샤프롱이 되어 줄 거예요.”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향 사람이 제일 나아. 사정 모르는 사람에게 어쩌다 상속녀가 되었는지 설명을 어떻게 해? 그거야말로 부끄러움도 모르는 일이지.”

“수도에 사는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블룸 남작 영애가 스스로 샤프롱을 찾는다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우리 지역에도 훌륭한 청년들이 많이 있지.”

이런 사람들은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 곁으로 모여들었다. 요안나가 후작 부인을 모신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요안나의 보호자가 되리라고 믿은 것이다.

진짜 현명한 사람들은 그 두 가지 가능성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주선하겠지. 애당초 가문을 영애 몫의 지참금으로 하라고 요구한 것이 공작 각하이신데.”

“샤프롱 역할을 하기에는 공작 부인께서 좀 젊으시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신데.”

그러나 작위 계승 관련 서류가 이미 수도를 향해 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클레어는 헤르만의 편지로 이 같은 사정을 전해 들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네.’

아마 요안나는 사교계의 이런 설레발은 알지도 못할 것이다. 전임 남작의 꼬라지를 생각해 보면, 장부고 뭐고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동안 요안나가 영지를 보살펴 왔다고 해도, 대부분 그때그때 일이 생기면 처리한 것이다. 제대로 기록으로 남겨 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딸이 하는 일의 비중이 크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부디 금고에만은 문제가 없길 빈다. 지금 블룸 남작가 상황에서 혹시 예산 구멍까지 있으면.

“음, 음…….”

“뭐 좋은 일 있으세요?”

마사가 물었다. 클레어는 입을 다물고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편지를 가져온 집사는 점잖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도.

클레어는 헛기침을 했다. 블룸 남작가에 어려운 점이 있으면 헤드헌팅이 더 쉽지 않겠느냐는 사악한 생각을 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쪽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새 사업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만 되면 딱 좋겠는데.’

요안나는 보수적이고 꼼꼼한 성품인 것 같고, 그런 사람에게 새로운 업종을 제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더 꼬시고 싶은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클레어 자신은 그렇게 꼼꼼한 성격이 아니었고, 남들의 생각과 너무 어긋나는 사고방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공작님께서는 늦잠을 주무시나요?”

마사가 물었다. 보통 이 시간에는 클레어와 함께 나와 각자 편지를 읽곤 했는데 말이다.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밀리안이 대신 대답했다.

“일 때문에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가셨습니다.”

“사무실이요?”

“샀대. 역 앞에.”

클레어는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합리적인 선택이긴 했다. 기차역 코앞의 건물은 알짜배기 재산이고, 이 집에 사람을 많이 오가게 하는 건 곤란한 사정이 있기도 했으니까.

알사탕 사듯 건물 세 채를 사서 주머니에 넣은 게 어이가 없었을 뿐이다. 두 채는 보안용이라고 했다.

이러다가 50년 후에는 오일 머니가 아니라 부동산 재벌이 될 것 같았다.

아니, 남편이 자신의 꿈을 이뤄 주고 있는 거긴 한데, 기분이 미묘한 이유가 뭘까.

마사는 물론 그녀와 전혀 다른 이유로 어두운 얼굴을 했다.

“신혼여행 중이신데.”

“하하.”

클레어는 웃어 버렸다.

“신혼은 무슨. 이제 포기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클라우제너에서 굴려지다 죽은 귀신이 에리히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게 틀림없어요.”

자신은 마치 일 없는 사람인 양 클레어는 대꾸했다. 물론, 수도에서 지금쯤 로저가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대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달도 넘게 클라우제너를 팽개쳐 놓을 수는 없잖아. 솔직히 그런 남자는 더 싫고.”

“각하께서 정말로 행운아이십니다. 클레어 님처럼 너그러운 분과 함께하시니까요.”

막시밀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클레어는 두 팔을 들어 쭉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여행도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괜찮아요. 에리히가 노력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휴양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3층 하녀가 거실 문을 두드렸다.

“마사, 잠깐 물러가 있어.”

“아, 네.”

마사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물러났다. 아마 3층 손님의 일일 것이다.

바다에서 구해 낸 그 3층 손님이 이제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마사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온 날 이후로 소식을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회복했는지, 누구인지, 언제 돌아갈지에 대해서도.

고용인들은 마치 3층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사실 마사가 클레어의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면, 이 집에 아직까지 그 사람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마사가 나가고 나자 하녀가 들어와 공손히 클레어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하녀이지만, 동시에 보안팀 소속이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

클레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황자 전하께서 밥상을 물리셨습니다.”

“하아.”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3일째였다. 아침을 안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먹는 게 없었다. 오히려 더 아파서 정신이 없을 때는 환자식을 먹여 주는 대로 먹었는데.

‘밥을 먹어야 낫지.’

에리히는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클레어는 그럴 수 없었다.

황자를 굶겼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대로 놔뒀다가 다시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누스는 새벽부터 테라스 문을 열어 놓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출을 보았다. 며칠 내내 귀에 쟁쟁했던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푸른 새벽 속에 백사장이 죽음 같은 빛깔을 머금어 타올랐다.

그는 붉은색에서 불길한 것을 연상했지만, 곧 바다는 다시 푸른색으로 변했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파도가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그것을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잘도 지나가, 이대로 10년쯤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지면 모래사장에 떨어질 것이다. 호위가 쫓아오기 전에 다시 바다에 빠질 수 있을까 아닐까를 가늠하고 있던 참이었다.

쾅.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호위가 서 있었으므로, 이것은 들으라고 일부러 거칠게 연 것이다.

리누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꽃무릇이 손뼉을 쳤다.

딱히 신사다운 예의를 지킬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그냥 다시 바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시위하니?”

클레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리누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누구에게?”

“밥을 왜 안 먹어? 3일 동안 빵 몇 쪼가리랑 우유 먹은 게 다라면서.”

“딱히.”

일부러 안 먹는 것은 아니었다. 리누스는 원래 먹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냥 관심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질 않았다.

이번에 아파서가 아니라, 그렇게 된 지 좀 되었다. 억지로 넘기면 구토감이 올라왔고, 안 먹어서 속이 허전한 게 먹은 뒤에 울렁거리는 것보다 컨디션이 나았다.

뭐, 먹든 말든 그의 식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의사밖엔.

의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꽤 즐거웠다. 그런다고 특별히 건강이 나쁜 상태도 아니었다.

지금 아픈 것은 식사와는 관계없다.

그러나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내저었다.

집사가 트롤리를 밀고 들어와 방 안에 있는 테이블에 큼직한 도자기 보울과 워머를 두 개 내려놓았다.

리누스는 조금 황당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만찬장에서나 쓸 보울을 아침부터 가져온 것은 둘째 치고, 두 개나 뭘 어쩌려는 걸까.

클레어는 리누스가 쳐다보고만 있거나 말거나 테이블 한쪽에 앉았다.

집사가 그녀의 앞에 개인용 수프 보울을 두 개 놓고, 그 건너편 자리에도 두 개를 세팅했다.

“와서 한 입만 먹어. 맛없어도 먹는 시늉을 해.”

“내가 왜?”

“그게 예의니까. 네가 안 먹어도, 나 혼자 먹을 거지만.”

집사가 워머 위에 얹은 큼직한 도자기 보울의 뚜껑을 열었다.

소고기를 넣어 끓인 맑은 스튜였다. 아니, 수프라기에는 국물이 너무 많고 든 게 없었지만.

두 번째 보울에 들어 있는 것은 쌀알이 살아 있는 전복 크림 리소토였다.

아마 남부 아렌의 향토 음식인 모양이라고 리누스는 생각했다.

“내 흥미를 끌어 보려고 별짓을 다 하는군.”

“난 원래 아침을 이렇게 먹어.”

리누스는 그게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클레어는 진심 중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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