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환생하고 나서 곧바로 기억을 찾은 것도 아니고, 아렌인으로 살아온 시간도 길었다.
딱히 국을 찾자는 건 아니지만, 몸이 안 좋을 때는 따끈따끈하고 맑은 국물이 최고였다. 평민이나 먹는 것이라고 요리사가 당황하긴 했지만 말이다.
클레어는 손수 볼에 수프 국물을 한 국자 떠 담아 위장을 달랜 다음 리소토를 펐다.
남방에는 쌀 요리가 발달한 곳이 많았다. 로멜에서는 흔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바덴 성에서부터 데려온 요리사는 여주인 될 사람이 아렌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남방의 요리들을 연습한 모양이었다.
말린 전복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조개류를 넣은 리소토는 풍미가 넘쳤다.
‘호화롭네.’
클레어는 한 입 먹고 리누스를 잊어버릴 만큼 행복해졌다.
냉장고가 초기 단계인 지금, 수도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델포드에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돈을 벌었어도 쉽게 먹지 못했다. 식사 한 끼에 쓸 수 있는 금액에 심리적 한계선도 있지만, 사실 큰맘 먹고 주문한다 해도 신선도가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와 접해 있는 이곳 루덴도르프령은 해산물이 싼 데다가, 심지어 남편이 부자다. 전복 반 쌀 반인 전복죽이라니, 최고였다.
‘다음에는 밥을 해 봐야겠다.’
화력 조절이 어려워서 좀처럼 냄비 밥에 도전하지 않지만, 일단 한번 요리사와 함께 시도해 보고, 성공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부탁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에리히에게 국밥을 먹여 봐야지.
클레어가 개의치 않고 혼자서 식사에 탐닉하자 리누스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여자가 제 관심을 끌려고 하는 건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리누스는 천천히 일어나 클레어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예의 지킬 생각이 들었어?”
“이렇게 해서까지 나한테 뭘 먹이려고 하는 게 어이없군.”
“내가 뭘?”
클레어는 뒤늦게 좀 부끄러워졌다. 지금 설마 먹방이라도 실연한 걸로 받아들인 건가.
남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먹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그걸 노린 건 아니었다. 진짜로 그냥 요리가 훌륭했을 뿐이다.
“한 모금만 마셔 봐. 의외로 잘 받을지도 모르잖아.”
“딱히 일부러 안 먹는 건 아니야. 그냥 식욕이 없을 뿐이지.”
“그러면 더더욱 먹어 봐야지. 새로운 음식이면 혹시 먹을 만할지도 모르는데.”
“…….”
리누스가 침묵하든가 말든가, 클레어는 혼자서 리소토를 맛있게 비우고 수프 국물도 한 그릇 훌훌 들이켰다.
뭐가 들어갈 때까지는 몰랐지만, 배가 몹시 고팠다. 소모당하는 체력을 생각하면, 전복만이 아니라 삼시 세끼 장어를 고아 먹어야 할 판이었다.
어릴 때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운동하는 게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데, 에리히는 언제 운동해서 그 몸을 유지하는 건지. 역시 운동은 10년 전에 하는 게 진리인 건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클레어가 그릇을 비우는 걸 보면서 리누스는 숟가락을 딸각딸각 건드렸다.
이게 자신의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라면, 굳이 거기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에게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바랄 만한 것은, 죽거나, 아니면 그러지 않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으니까.
“먹기 싫어?”
“…….”
“그래, 그럼 먹지 마. 죽어도 먹기 싫다는 사람한테 강요할 정도는 아니니까.”
클레어가 산뜻하게 대답하고 제 몫의 그릇을 치우게 했다. 집사가 그녀의 앞에 따뜻한 물을 내려놓았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여기 와서 먹은 거지?”
“매일 혼자서 식탁에 앉는 게 얼마나 우울한 일인지 아니까. 하지만 내가 있어 봐야 별로 보탬은 안 되긴 하겠다.”
리누스는 숟가락을 몇 번 더 딸각거렸다. 어쩐지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 그는 발을 까닥거렸다.
클레어가 물었다.
“에리히라면 어떨까? 사촌이잖아.”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군.”
오찬이나 만찬도 아니고, 이유도 없이 에리히와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한다고?
리누스는 진심으로 불쾌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가 그게 낫겠다고 하면, 에리히를 그 식탁에 앉힐 수는 있고?”
“밥 한 끼 먹고 오라고 말하는 게 뭐 어려워서. 아, 저녁은 곤란해. 무조건 가족이 함께 먹어야 해서.”
“…….”
리누스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불편감과 불쾌감, 이유는 모르겠으나 가슴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들뜬 듯한 느낌이 뒤섞여 거북해졌다.
클레어에게서 시선을 돌려 눈을 내리깔자 맑은 국물이 담긴 수프 볼이 시선에 들어왔다.
“이렇게 하는 게 너한테 대체 무슨 이득이 있지?”
“이득 같은 건 없지. 너도 알겠지만. 나는 그냥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싶은 것뿐이야.”
“손님을 배불리 먹여 보낸다는 전통적인 선행 말인가?”
“밥은 밥이야. 식탁에 앉는 일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클레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리누스는 역시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굶을 필요도 없어. 죽고 싶어도 배는 고플 수 있지.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 말에 리누스는 자기가 반항심 때문에 먹지 않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숟가락을 들어 조금 식은 국물을 한 입 떠 넣었다.
생각보다 목구멍으로 잘 넘어갔다. 아마 액체니까 그럴 것이다.
“짜군.”
“까다롭네. 그냥 먹어. 어차피 먹지도 않을 사람한테 맞춰서 간을 할 수는 없잖아.”
리누스는 불평하긴 했지만, 일단 위장이 풀어지자 생각보다 쑥쑥 넘어갔다.
그가 적은 양의 국물을 다 마시자마자 집사가 리소토를 담아주었다. 작은 수프 볼이 금세 비었다.
입 안에 짜고 뜨거운 맛이 남았다.
클레어는 한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누스 본인은 자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표정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원래 배가 고프면 사람은 더욱 예민해지는 법이다.
에리히는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했지만, 그러기에는 리누스가 너무 어렸다.
스무 살이면 성인이고, 자기 일 자기가 책임져야 할 나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바로 하루 사이에 탈피하듯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갓 스물에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걸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 대화가 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도망칠 생각은 이제 없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너, 화법이 에리히랑 비슷하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질문에는 그냥 대답 좀 해. 자꾸 탐색하는 것처럼 질문을 질문으로 맞받지 말고.”
리누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에리히를 닮았다는 말이 듣기 싫었고, 그를 떠올리는 것조차 불쾌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닮았을 리 없다는 반박은 부질없었다. 이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에리히가 신원을 숨긴 채 떠나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들었어. 아직까지 결정하지 않았다는 건, 그럴 마음이 없다는 뜻이니까.”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나.”
“그렇다고 황궁으로 돌아가자니, 널 바다로 뛰어들게 만든 그 원인에게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
“너는 내가 죽는 게 낫지 않나?”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누스는 그녀의 눈동자가 단순한 노란색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색채가 섞인 빛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 버렸다.
“왜? 네가 죽으면 에리히의 황위 계승권이 올라가니까?”
“…….”
비웃음을 당한 기분이라 리누스는 불쾌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생각은 없어. 우리는 지금도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확신이, 대단하군. 살다 보면 탐날지도 모르는데.”
“나는 돈을 좋아하거든. 제국 제일의 부자 공작님을 남편으로 두고 뭘 더 탐내겠어.”
클레어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네가 죽는다고 해서 뭐가 변할 것 같지도 않고.”
“…….”
“그럼, 더 방해 안 하고 이만 가 볼게. 혹시 밥 같이 먹어 줄 사람이 필요하면, 호위한테 얘기해. 말을 전해 줄 거야.”
그리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리누스는 멀거니 그 자리에 더 오래 앉아 있었다. 따뜻한 것을 먹은 탓인지, 손가락 끝이 오랜만에 따뜻했다.
오후에는 방문객이 있었다. 요안나였다.
클레어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요안나 양. 아니, 이제 블룸 남작님이죠?”
“아직 승인되려면 멀었습니다. 그리고 부디 요안나라고 불러 주세요.”
“레이디 요안나.”
대답한 것은 클레어가 아니라 엘리엇이었다. 몇 번 만나 낯을 익혔다고, 벌써 친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엘리엇이 점잔 뺀 모습으로 한쪽 손을 등 뒤로 돌리고, 다른 손으로 요안나의 손끝을 쥐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엘리엇의 키로는 허리를 굽혀 요안나의 손등에 키스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