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요안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자기 쪽에서 아예 바닥에 앉아 손의 높이를 낮추었다.
여러 가지 일이 무사히 정리되었음에도, 형식적인 미소 이외에는 도무지 지을 수 없을 만큼 근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가슴에는 웃음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엇 경. 절 기억하시나요?”
요안나가 호응해 주자 엘리엇이 신나서, 세상에서 제일 정중한 꼬마 신사가 되어 마주 인사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요안나. 어…… 어…….”
물론 그 이상 말을 매끄럽게 잇진 못했다. 클레어는 이 작은 소꿉놀이가 이어지도록 대사를 대신 쳐 주려 했다.
“며칠 전에 엄마의 티타임에서 뵈었으니까요.”
“며칠 전에! 엄마의 티타임에서…… 어……?”
엘리엇은 확 밝아진 얼굴로 그 말을 따라 했다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웅.”
“왜?”
“아빠는 이렇게 말 안 해!”
“그야…….”
에리히면 이것보다 네 가지쯤 예의가 모자라게 말하겠지. 예법이 완벽해도 언행이 거만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엘리엇은 착한 아이니까, 그를 좀 따라 한다고 존중을 모르는 어린 대귀족으로 자라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클레어는 웃으면서 엘리엇을 치맛자락에 싸안았다.
“요즘 에리히가 하는 거면 뭐든지 따라 하려고 해요.”
“워낙 멋진 분이니, 엘리엇 경도 본받고 싶은 거겠지요. 따로 예법 교사를 둘 필요도 없으실 것 같은데요?”
“절도 있게 인사하는 법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죠.”
클레어는 지루해진 듯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버둥대는 엘리엇의 어깨를 껴안아 가두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엄마, 나 모래!”
엘리엇이 두 팔을 휘저었다. 클레어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사나 시키려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아이는 총알처럼 뛰쳐나가려다가 보모에게 붙들려 안겼다. 계단이 있으니 혼자 바닷가로 내려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엘리엇이 나가자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클레어는 요안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편히 앉으세요. 엘리엇을 상대해 주어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엘리엇 경 덕분에 저야말로 오랜만에 웃었어요.”
엘리엇 경이라고 말하는 요안나의 입가에 여전히 터질 것 같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많이 바빴지요?”
“네. 만나 봐야 할 친척도 모두 만났고, 가신들의 충성 서약도 끝마쳤어요. 솔직히 쉽진 않았지만요.”
실무를 맡은 가신과 고용인들이 그대로 남았고, 또 요안나 자신도 오랫동안 영지 일에 관여했다지만, 가주로서 시작하는 것과는 또 달랐다.
각종 법적 문제를 정리하고, 장부와 업무에 체계를 새로 만들고, 엉망진창이었던 서재를 전부 뒤집어엎어야 했던 것이다.
“고생했어요. 이제 귀족원 명부를 바꿔 쓰는 일만 남았군요.”
“공작 각하께서 증인으로 서명해 주셨으니 별문제 없이 처리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연락을 기다리는 것만 남았어요. 오늘은 꼭,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아, 에리히가 증인으로 서명한 것도 굳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요안나 양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한 거죠.”
그러고 클레어는 흉을 보듯 소곤거렸다.
“올바른 귀족을 제자리에 앉히는 게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거든요.”
“공작 각하께서 그리 저를 높이 평가해 주셨다니, 그것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게 에리히를 험담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요안나의 대답에 클레어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대체로는 이게 정상이었다. 클레어는 유능한 평민을 많이 알지만, 그중에서도 이런 말을 험담이나 농담으로 받아 주는 사람은 로저 정도밖에 없었다.
곧 다과가 나왔다. 클레어는 손수 요안나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혹시 소문 이야기는 들었어요?”
“무슨 소문 말씀이신가요? 요 며칠 너무 정신이 없어서 바깥소식은 거의 모르지만…….”
“요안나 양이 다음 사교 시즌의 가장 핫한 결혼 매물이라는 것 같더군요.”
“실망할 사람이 많겠군요. 이미 정혼서를 주고받았거든요.”
요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약혼은 상대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다음에 할 예정이라 아직 멀었지만, 가문 간의 결혼 계약서 조항이 이미 결정된 터라서요.”
“정혼 상대가 아카데미에 다녀요?”
클레어는 깜짝 놀라 물었다.
“네. 저쪽에는 가까운 혈족 중에 미혼인 게 막내아들뿐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시간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동의했어요.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요.”
요안나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미리 여지는 두었어요. 그 애가 3년 후에 결혼을 거부한다면, 방계 혈족 중 한 명을 양자로 삼아 보내겠다더군요. 제 나이를 생각하면 빨리 후사를 가지는 게 맞겠지만, 그 전에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요.”
“아니, 저한테 그걸 변명할 필요는 없어요. 당연한 일이죠. 후계자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요안나 양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하지요.”
클레어의 말에 요안나는 조금 안심한 듯했다.
“3년 후라도 서른셋이에요. 요안나 양, 절대 많은 나이가 아니에요.”
그러자 요안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걸 진심으로 말씀해 주시는 건 공작 부인뿐일 거예요.”
“말하는 사람이 많든 적든, 무조건 내 말이 옳아요.”
“네. 어쨌든 제 일을 먼저 해 보고, 후계자는 그다음에 생각하려고 해요. 설령 시기를 놓친다 해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질 있는 양자를 들이면 될 일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래서 제가 공작 부인께…… 아니, 델포드 남작님께 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요안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클레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줄곧 손안에 쥐고 있던 것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
에리히가 귀가했을 때, 엘리엇은 해변에 둥글게 친 바람막이 천막 안의 방석에서 양털 모포를 덮은 채 모래투성이 맨발로 잠들어 있었다.
클레어도 안락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조그만 모닥불이 안을 따뜻하게 데웠다. 하지만 연기를 빼내기 위해 천막 한쪽을 열어 두었으므로, 충분히 따뜻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으음, 왔어요?”
클레어가 손을 뻗었다. 에리히는 고개를 숙여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낮잠 자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엘리엇이 모래성을 당신한테 보여 줘야 된다고 난리를 쳐서요. 그냥 두고 들어가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면서 천막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지만 훌륭한 모래성이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었다.
“네가 만들었나?”
“난 저런 손재주 없어요. 막시밀리안 경이 만들어 줬어요.”
클레어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막시밀리안이 에리히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막시밀리안 경은 요리도 잘하죠? 손재주가 이렇게 좋으면.”
“……별로 궁금하진 않군.”
그러자 클레어가 웃었다.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대로 왔어요?”
에리히는 나갈 때 걸친 모닝코트와 케이프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구김은 좀 갔지만, 여전히 말끔한 모양새였다.
“굳이 들어갔다가 다시 데리러 나올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
에리히가 케이프를 벗어 클레어의 몸을 감싸며 말했다.
그러다가 그는 그녀의 검지 중간에 금색으로 반짝이는 반지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게 뭐지?”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청혼받았어요.”
“…….”
“무릎 꿇고 인장 반지 주면서 운명을 맡기겠다고 하면, 그게 청혼이지 뭐. 누구보다 낫던데.”
에리히가 침묵했다. 그게 블룸 남작가의 인장 반지라는 것은 눈치챘으나, 그렇다고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별일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클레어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내일 비서에게 맡기도록 하겠어. 어차피 새로 만들어서 블룸 남작에게 줄 예정이지?”
“서임식 대신이니까요. 이리 줘요.”
에리히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잠투정하는 엘리엇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해가 졌어. 이대로 있기는 너무 추우니, 들어가지.”
“에리히, 내 기념비적인 첫 봉작을 무시하려는 거예요?”
“구습을 지키는 귀족이 되고 싶어 하는 줄 몰랐군.”
에리히가 야유하듯 말했다. 이번에는 클레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물론, 형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클레어가 아니라 요안나 쪽이라는 것은 에리히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잠결에도 엘리엇이 웅얼거렸다.
“웅, 아빠. 내 모래성.”
“내일 다시 만들어 주마.”
“우우웅.”
엘리엇은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에리히의 품 안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천막을 거둬.”
막시밀리안을 향해 그렇게 명령한 에리히가 한 팔로 엘리엇을 어깨에 기대게 한 뒤, 클레어에게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피식 웃고 그 팔에 손을 얹었다.
리누스는 테라스에서 그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온종일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도, 그걸 내버려 두는 붉은색의 여자도.
마치 평민이나 되는 것처럼 잠든 아이를 손수 보듬어 안아 옮기고, 에스코트해야 할 순간도 아닌데 아내와 팔짱을 끼고 걷는 에리히도.
리누스는 3층 끝줄에 앉은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불쾌했다.
기침은 이미 멈추었는데, 불편감이 폐부를 쑤셨다. 오늘 온종일 하지를 가만두기 어렵게 만들었던 들뜬 감각은 이제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방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