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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24/263)

125화

마사는 눈을 도로로로 굴렸다.

손님이 오신다고 하더니, 갑자기 2황자가 시종 하나 없이 혼자 몸으로 나타났다.

물론 마사는 그 상대가 3층 손님임을 바로 알아챘다. 하녀들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이 오가는 것을 금지했던 3층의 길이 열린 것도 그렇지만, 황자는 쉬이 잊힐 만한 외모도 아니었다.

맑은 은발에 붉은색 눈동자만 해도 흔하지 않은데,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키는 컸다. 너무 마른 탓인지, 아니면 얼굴에 그늘이 있는 탓인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와.”

엘리엇이 눈을 반짝거렸다.

“토끼 같아.”

“도련님!”

마사는 황급히 엘리엇의 입을 막았지만, 클레어가 킥 웃었다. 솔직히 그녀도 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달려가려는 엘리엇의 어깨를 마사가 눌렀다.

“도련님, 인사하셔야죠, 인사.”

마사가 소곤소곤 말했다. 엘리엇이 ‘아!’ 하고 깨달은 듯이 소리쳤다.

그리고 배꼽에 손을 올리고 인사했다.

“클, 클라우제너의 엘리엇 경입니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리누스를 올려다보았다. 리누스가 ‘엘리엇 경’이라고 불러 주거나, 신사 대 신사로 인사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리누스는 헤르만이나 요안나처럼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이렇게 어린아이 자체를 가까이에서 본 일이 없었던 데다가…….

“…….”

멍하게 벌어진 입으로 어떤 이름을 뱉기 전에, 에리히가 싸늘한 말투로 막았다.

“내가 불쾌해질 말은 하지 마라, 리누스.”

“하.”

리누스가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헛웃음과 한숨이 뒤섞인 소리를 토해 냈다.

먼발치에서 며칠간 지켜보았지만, 역시 아이의 얼굴을 직접 보자 느낌이 달랐다.

생각보다 더 닮았고, 그리고 더 안 닮았다.

리누스는 에리히가 이 나이였을 때 이런 얼굴을 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새파란 하늘이 어울리는 햇살 같은 소년을 하나 알고 있었다. 꼭 제가 머리 위에 얹은 하늘 같은 눈빛을 한.

이 아이는 그쪽을 더 닮았다. 색 자체는 같은 것일지 몰라도, 심해처럼 깊은 에리히의 눈동자와는 다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지난 5년 동안 줄곧 그 모습을 떠올리고 있기에 하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천진난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엘리엇.”

에리히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끊었다.

실망한 엘리엇이 클레어에게 달려가 등을 기대며 칭얼거렸다. 리누스는 또다시 불편한 기분이 되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리히가 말했다.

“엘리엇, 앞으로 예의 없는 사람이 인사하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도 돼.”

“웅…….”

“그리고 인사하지 않은 사람과는 같이 놀지 마.”

엘리엇이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은 또 그것대로 똑 닮은 부자지간이라, 리누스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클레어가 에리히에게 눈을 흘겼다.

“사심 가지고 말하지 말아요. 당신, 질투 나서 그러잖아.”

“내 말이 옳아. 네 살짜리보다도 예의 없는 놈은 손님이라고 할 수 없지.”

에리히의 말에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 아니야? 진짜 인사 안 해도 돼요?”

거기까지 오자, 리누스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리누스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껄끄러운 기분으로 말했다. 자기소개라기에는 너무 간략한 내용이고, 만나서 반갑다 같은 인사말도 덧붙어 있지 않아서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엇, 리누스는 당숙이야.”

“당슉?”

“풋.”

별것도 아닌데 리누스는 문득 웃음이 터졌다.

클레어는 웃지 말라고 그를 쏘아보았다. 에리히는 입꼬리만 미미하게 끌어 올린 채 잘 참고 있었다.

비웃음을 샀다고 생각한 엘리엇이 토라진 얼굴을 했다. 클레어는 엘리엇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면 돼. 엄마의 사촌은 찰스 아저씨고, 아빠의 사촌은 리누스 아저씨고.”

“아!”

거리감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생각한 엘리엇이 반짝, 환한 얼굴을 했다가 또다시 망설였다.

“근데에…….”

“왜?”

“찰스 아저씨는 나 좋아하는데……. 내가 말해도 안 웃는데.”

부끄럼을 타듯 엘리엇이 클레어의 손 뒤로 숨었다.

리누스는 굳이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딱히 아이를 귀여워할 작정은 없었다.

그저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다. 이 여자와 아이가 에리히 클라우제너를 어떻게 변질시켰는지. 그가 자신과 다른 게, 그 고귀함 외에 무엇인지.

이곳에서 제러드와 같은 눈동자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결국 에리히가 거기에 넘어간 거라고 생각하면 좀 시시하게까지 느껴졌다.

당슉은 좀 웃겼지만.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지.”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며 엘리엇의 손을 가볍게 잡아 흔들었다. 그리고 마사에게 다시 엘리엇을 맡겼다.

마사가 엘리엇을 끙차, 안아 올렸다.

“도련님은 이제 코오 주무실 시간이에요.”

“웅…….”

엘리엇은 조금 궁금증이 남은 얼굴로 리누스를 보았으나, 금세 미련을 떨쳤다.

톡.

살짝 거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에리히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른답게 굴어라, 리누스. 나는 사실 널 내쫓아도 돼.”

“모후와 전쟁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야?”

“황후 폐하가 그런 일로 나와 전쟁을 할 정도라면.”

“에리히.”

그가 리누스를 상처 입힐 만한 말을 할 것 같아 클레어가 끼어들어 막았다.

에리히가 그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무덤덤한 얼굴을 보니, 보나 마나 자신은 사실 관계를 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레어는 에리히의 손바닥 안쪽을 한번 가볍게 간질여 경고를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잘 결정했어. 어차피 당장 떠날 게 아니라면, 우리 입장에서도 널 더 숨겨 주기 난처해졌거든.”

“숨겨 주기 난처해졌다는 게 무슨 뜻이지?”

“아우구스타 시녀장이 수도에서 기차를 탔다는 소식이 왔다.”

에리히가 대신 대답했다.

그건 어제 오후에 클라우제너에 전신으로 도착해서, 전령이 다급히 들고 달려온 것이었다.

“행선지는 에른스트 공작가라고 하더군. 아마 네가 사라진 일 때문이겠지.”

“젠장.”

“미리 경고하는데, 행여 엘리엇 앞에서 그딴 말 쓰면 진짜로 쫓아낼 거다.”

리누스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클레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실질적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에른스트와 루덴도르프는 가까운 데다가, 루덴도르프는 아우구스타 시녀장의 본가야. 당연히 여기에 들르겠지.”

리누스의 얼굴에 금세 그늘이 졌다. 황후궁의 손아귀가 순식간에 조여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얼굴을 보고 클레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며칠 있어. 아우구스타 시녀장이 여기 온다고 해도 당장 널 찾아낸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 되겠죠, 에리히?”

“그래.”

에리히는 그리 내키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긍정의 대답을 했다.

“엘리엇에게 나쁜 말과 버릇만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조건에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리누스는 또다시 가슴 언저리에 불편감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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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각에, 아우구스타는 이미 루덴도르프 후작가에 도착해 있었다.

마지막 기차를 타고 도착했기에, 마차가 루덴도르프 후작가에 닿았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아니, 누님!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집무실에 있던 루덴도르프 후작이 굴러떨어질 기세로 달려 나왔다.

하인에게 짐 가방을 내리게 하고 있던 아우구스타가 그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구나, 클로트비히.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누님께서 급히 오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몰락해 가던 가문을 살려 낸 것은 아우구스타이다. 나이 차도 꽤 있어, 어린 시절에 가정교사 대신 후작을 교육한 것도 아우구스타였다.

황후의 시녀장이라서만이 아니라 그는 이 유능하고 엄격한 큰누이가 어려웠다.

아우구스타가 평연하게 말했다.

“호르스트에게 편지를 받았다.”

“예?”

“클라우제너 공작 부부가 여기 머무르고 있다고 말이다.”

“아, 예. 맞습니다. 신혼여행 중에 바다를 보고 싶다며 별장을 따로 사서 잠시 여기에 머무른다고 하더군요.”

루덴도르프 후작은 겉으로는 평온하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블룸 남작가 일 때문이구나! 호르스트 이놈은 왜 그런 사소한 일을 다 누이에게 전달하는 거지.’

가문의 체면이 클라우제너 앞에서 손상된 일이 문제인 거라고 루덴도르프 후작은 확신했다.

아우구스타는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었다. 결혼이라고 하는 여자의 행복조차 포기한 것이라고 후작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희생에 부응해야 한다. 불편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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