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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126/263)

127화

그는 다섯 살 무렵까지도 또래 아이를 한 번도 가까이에서 본 일이 없었다.

황궁에서는 그가 가장 어린 나이였고, 그가 에른스트 공작가에 머무는 동안 소공작 내외의 자녀는 수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기른 유모와 가정 교사는 황후의 측근이자 로멜인다운 로멜인이었기에, 아이를 놀게 하기 위해 또래 친구를 따로 데려와 붙인다거나 하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사실 리누스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로멜의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개가 그랬다.

그래도 보통은 형제자매나 사촌이 있어, 또래와의 교류는 거기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리누스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제러드 로멜? 그는 형제라고 말할 수 없었다.

때때로 가까운 친척 모임이 열리긴 했다.

이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어린 리누스로서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빅토리아 대공이 조카들을 보고 싶다며 방문했으리라.

그가 제러드를 보게 되는 날은 대개가 그런 날이었으니까.

맨프레드 대공이 베티나 공녀를 데려왔고, 제러드를 방문 중이었던 에리히가 따라와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위한 작은 티파티가 열렸다.

리누스는 수풀에 숨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가정 교사의 엄한 눈길을 피하고 싶었든지, 아니면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제러드와 그때까지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아마 없었으리라. 그 이전의 기억은 없지만, 그가 숨어 있던 수풀을 젖히며 제러드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녕, 리누스. 나는 제러드야. 네 형이야.]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남과 잘 이야기할 줄을 몰랐다.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눠 본 것 자체가 거의 없었고, 아이와는 더더욱 그랬으니까.

[내 이름, 들어 본 적 없어?]

[있어……. 형이야.]

그때 리누스가 다섯 살이었으니, 제러드는 열 살이었을 것이다.

‘형’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알고 있었으나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건 몰랐다. 자신에게 ‘형’이 있다는 것은 ‘황태자’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비현실적이었다.

[리누스는 꼭 토끼같이 생겼네. 귀여워. 숨바꼭질하고 있었어?]

[숨바꼭질?]

[숨어 있었던 거 아니야? 아, 숨바꼭질한 적 없어? 진짜?]

활달한 소년은 깜짝 놀라 그렇게 말하고는, 티 테이블을 향해 소리쳤다.

[베티나! 우리 숨바꼭질하자! 에리히 형도 이리 좀 와 봐!]

[너희들끼리 해.]

이미 열네 살이었던 에리히는 귀찮아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제러드가 재차 조르자 번거로워하면서도 일어서서 다가왔다.

[술래는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거야. 리누스, 가위바위보 할 줄 알지?]

리누스가 지금 그때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날의 놀이가 진짜로 성사되었는지 아닌지조차 확실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의 기억을 후일에도 떠올리고, 또 울적한 날에는 그런 것을 떠올린 날의 기분을 또다시 곱씹어, 마침내는 그것이 어제 일인지, 몇 년 전의 일인지조차 모르게 되곤 했으니까.

제러드와 같이 논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리누스는 알고 있었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는 정치적인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리누스는 그때도 자신이 제러드와 결코 교차할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해한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뒤늦게 덧붙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몰랐어도, 제러드는 알고 있었으리라. 황후가 그때라고 열 살의 황태자를 그냥 놓아두었을 리 없다.

그는 제러드를 싫어했다.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싫었다. 책임지지 못할 감정과 헤픈 웃음이 싫었고,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미웠다.

어머니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된 뒤로는 더더욱.

‘배알도 없는 인간이.’

하지만 좋았든 싫었든, 자신이 가진 기억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지만, 제러드 자체를 잊을 리는 없었다.

죽은 황태자를 영원히 잊지 못할 이는 황제만이 아니다. 리누스 자신만이 아니라, 아마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다.

[리누스?]

“리누스 아저씨, 진짜 자요?”

그 순간 리누스의 의식이 훌쩍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제러드의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리누스는 깜짝 놀라 상대를 세차게 밀었다.

그러나 뒤로 넘어간 것은 제러드가 아니라 어린아이였다.

“으악!”

소파에서 밀쳐져 떨어진 엘리엇이 비명을 질렀다. 마사와 보모, 호위가 경악하여 동시에 달려왔다.

그리고 그보다 빨리 리누스가 다시 팔을 뻗어, 아이 머리가 땅바닥에 닿기 전에 낚아채는 것에 성공했다.

“악!”

힘으로 잡아당겨진 통증에 엘리엇이 비명을 질렀다. 리누스는 당황하여 아이 머리를 받쳤다.

“하.”

리누스는 엘리엇을 안아 내려놓고, 기가 막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잘못했어요.”

엘리엇이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아저씨가,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뭐?”

“깨우려고 그랬어요.”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아이 방에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느냐고 묻는 거다!”

“여긴 거실인데요?”

엘리엇이 그렇게 되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리엇은 여태까지 아플 때나 특별히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말고는 아이 방에만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리누스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내가 싫어요?”

“뭐?”

“저번엔 내가 말했다고 웃고, 이번엔 화내고. 난 그냥 아저씨 깨워 주고 싶었는데.”

엘리엇은 리누스가 궁금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비웃음을 산 것 같아 서러웠지만, 엘리엇은 원래 오래 토라지는 성격이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좋아했고, 사랑받는 것을 좋아했다. 생전 처음 보는 반짝거리는 은발이 너무 예뻐서 만져 보고 싶기도 했다.

리누스가 찰스 아저씨와 같은 입장이라면, 친해지면 당연히 자기를 귀여워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진짜로 싫은가 보다. 엘리엇은 시무룩하게 리누스의 무릎 언저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리누스는 입을 벌렸다. 내가 널 좋아할 리가 있느냐고 말해야 되는데, 그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는 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엘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금빛 속눈썹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여전히 시무룩했지만, 이 자리에서 울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거, 아저씨 줄게요.”

엘리엇이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서 리누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빠 주려고 내가 엄청 아껴 놨던 건데. 그치만 아저씨는 아프니까.”

엘리엇이 말했다. 리누스는 포장지 안에서 반쯤 녹은 그 초콜릿을 기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때 복도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엇, 어디 있니?”

“앗, 엄마다!”

엘리엇이 잽싸게 움직여 거실 문이 열리자마자 클레어의 무릎에 뛰어들었다.

“억!”

클레어가 신음하며 무릎을 꺾었다.

갈수록 받아 내기 어려웠다. 한창 자랄 나이이니 아마 그사이에 몸무게도 훌쩍 늘었을 테지만, 에리히가 놀아 주기 시작한 뒤로 전보다 더 활달해진 탓도 있을 것 같다.

아니, 몸으로 남한테 뛰어드는 버릇이 생긴 건 확실히 그 때문인 것 같았다.

‘남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지.’

아니다. 자신의 다리도 아작 날 것 같으니, 에리히한테만 하라고 해야겠다.

에리히는? 오히려 기뻐할 텐데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클레어는 리누스가 희한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안 그래도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잘됐다. 간식 먹어.”

“간식?”

“응.”

대답하는 클레어의 뒤를 따라 하녀가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간단히 차와 쿠키 정도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커다란 보울과 쟁반이 가득했다. 리누스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그걸 여기서 먹을 작정인가?”

“식당은 어둡잖아. 여기가 바다가 제일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고.”

리누스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램프 냄새가 난다며 클레어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엘리엇이 제 손으로 끌고 오기라도 하려는 듯 아이용 소파 쪽으로 달려가 힘껏 그것을 당겼다.

리누스는 문득 자신의 손에 아직도 반쯤 녹은 초콜릿이 남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눈에 띄게 내려놓았다가는 아이를 울릴 것 같고, 진짜로 까서 입에 넣을 마음은 아예 없었다. 그는 그것을 소파 한쪽에 버리듯이 굴려 놓았다.

나중에 청소하는 하녀가 치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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