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하녀가 테이블에 워머를 내려놓고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 위에 이미 데워 놓은 보울을 올리고, 길쭉한 쟁반을 차렸다.
여러 종류의 빵, 마른 과일과 치즈, 이 계절에는 흔하지 않은 채소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식탁이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봐도 간식이 아니다. 역시 어이가 없었지만, 하녀들은 익숙해 보였다.
“지금 이게 간식인가?”
“딱 출출해질 시간인데?”
애프터눈 티타임 시간이긴 했다. 허기진다면, 간단히 샌드위치나 쿠키 한두 조각으로 충분하다.
마치 리누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클레어는 태연하게 말했다.
“애프터눈 티타임도 좋지만, 아이랑 환자가 있는데 그렇게 허술하게 넘어갈 수는 없지.”
아이 간식이야말로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따뜻한 게 좋아. 날도 춥고. 요즘 바닷바람이 세서 그런지 한기가 잘 들더라.”
리누스는 엘리엇이 자기 손에 초콜릿을 쥐여 준 것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 것 같았다.
“나, 마시멜로!”
“이게 더 맛있을걸?”
보울 뚜껑이 열렸다. 달달한 고구마 냄새와 치즈 냄새가 확 올라왔다.
클레어가 포크에 찍은 빵 조각을 보울에 담갔다 뺀 뒤 엘리엇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이번에도 리누스는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왜?”
“이상한 걸 만들었군. 그것도 아렌식인가?”
“뭐가 이상해? 치즈 퐁뒤에 고구마를 넣었을 뿐이잖아. 고탄수……. 아니, 정제된 곡류는 인간의 축복이야.”
“이건 곡물이 아닌데.”
“평생 소파에 드러누워 있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우선 감자와 고구마를 먹어 보는 게 어떨까? 기분이 바뀔 수도 있어.”
클레어는 그게 곡물이냐는 리누스의 비꼼을 아예 무시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탄수화물이라는 것이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엘리엇.”
“웅……. 후아!”
충분히 식혀서 줬는데도 엘리엇이 뜨거운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내쉬었다.
“나도, 나도!”
“뜨거워.”
클레어는 이번에는 마른 무화과를 적셔서 엘리엇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그것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가 테이블을 빙 돌았다.
그때까지 리누스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그럴 때마다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으나, 그는 그것을 배고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어서지 않은 것은 오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별것도 아닌데, 이 여자에게 지는 게 싫었다. 클레어가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클레어를 노려보고 있는데, 눈앞에 불쑥 포크가 디밀어졌다.
“아저씨, 아픈 사람은 잘 먹어야 해요!”
리누스는 당황하여 고개를 홱 뒤로 젖혔다.
이걸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엘리엇이 아예 까치발을 들고 입 앞까지 포크를 내밀었다.
리누스는 아예 몸까지 뒤로 물렸다. 클레어가 웃는 낯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또다시 하지가 불편해졌다.
“…….”
평소 같으면 치우라고 했을 텐데,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엘리엇에게서 빼앗듯이 그 포크를 낚아채는 무화과 조각을 입에 넣었다.
보드라운 손가락이 그의 무릎을 두드렸다. 그리고 헤집어진 리누스의 기분을 알지도 못한 채 뜀뛰듯 테이블을 다시 빙 돌아 제 엄마 곁으로 돌아갔다.
리누스는 크림과 치즈와 고구마와 말린 무화과가 뒤섞인 단맛을 천천히 입 안에서 굴렸다.
클레어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황자였고, 그 어머니의 왕관이었다.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깨지면 돌이킬 수 없는 보물처럼 소중히 취급했다.
혹은 약점이나 구멍이기도 했다. 공격할 수 있는지 가늠하고, 가치를 확인하며, 그를 잃었을 때 어머니가 받을 타격을 계산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견주었다. 그가 다섯 살 위의 형보다 얼마나 부족할지, 그의 배경은 그것을 보충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의 은발 머리 위는 과연 왕관에 어울리는 자리인지.
하지만 이 여자의 관찰하고 판단하려는 시선은 다른 사람의 것과 달랐다.
아예 관찰 자체를 하지 않는, 그가 무엇이든 상관없어하는 에리히나 진짜 어린 동생처럼 쳐다보는 속없는 제러드와도 달랐다.
짧은 적의와 호의에 가까운 동정, 그 밖에 리누스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동정은 바다에서 건진 것 때문일 테고, 적의는 그녀가 황위 계승권자의 아내이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그 이외의 감정들은 불가해였다.
그리고, 그러면서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건지.
마음이 약해 도로 바다에 던질 수는 없었어도, 그냥 하녀에게 맡겨 두고 얼굴을 내밀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먹을 것을 챙기고, 아이가 있는 식탁에 앉히며 편안하게 말을 거는 대신에.
그렇게 생각하자 또다시 속 어딘가를 들쑤신 듯 불편해졌다.
“아저씨, 그거 맛없어요?”
제가 건네준 것이 하필 맛없는 것이었을까 봐 엘리엇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치만 그게 제일 달콤한데.”
“그것 봐. 엄마가 빵이 제일 맛있댔지?”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엇의 손에 포크 두 개를 쥐여 주었다.
엘리엇이 신나서 다시 리누스에게 달려와 해맑은 얼굴로 다시 포크를 내밀었다.
리누스는 클레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순순히 포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일부러 아이를 헤프게 키우는 건가?”
“뭐?”
“이렇게 아무한테나 웃고, 아무한테나 먹을 걸 건네고. 아까 보니 울기도 잘 우는 것 같더군.”
리누스는 내뱉듯이 말했다.
“아니면, 그렇게 가르친 게 아니라, 원래 아렌인이라는 게 그런가?”
같은 얼굴이라도 이 아이가 에리히보다 제러드를 닮았다고 느껴지는 게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게 신경 쓰이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아이에게 쉽게 거절의 말을 뱉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그의 말에 클레어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포크를 내려놓고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역시, 도로 바다에 던져?’
그러는 로멜인이야말로, 싹퉁머리 없이 말하는 법을 어린 시절부터 가르치느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까부터 계속 ‘아무리 황후가 한 짓이 있더라도 연좌제는 안 돼!’라는 측은지심과 ‘역사 발전에는 단두대가 필요하지!’라는 의식 사이에서 마음이 오락가락했는데, 이 순간 감성 모두가 힘을 합쳐 단두대의 손을 들었다.
‘아픈 애야. 참아야지.’
클레어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이성으로 꾹꾹 억눌렀다.
자신이 스무 살짜리와 싸울 짬이던가. 게다가 며칠 전에 죽으려고 바다에 뛰어든 애다.
그녀는 후, 아, 후, 하고 몇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찌그러진 미간을 펴려고 애쓰며 침착하게 말했다.
“헤픈 게 아니라 감정에 솔직한 거야. 그리고 이 나이대 아이에게는 원래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
“에리히가 그러라고 그냥 내버려 뒀다니, 놀랍군.”
“에리히는 어린아이 상대로 헤프다는 말 같은 건 안 해. 아렌인의 피가 문제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
“대하는 게 서툰 것과 멸시하는 건 달라. 그리고 우리 아이 교육은 우리가 정할 일이야.”
리누스는 그 대답에서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 이유가 이 여자가 자신에게 말대꾸했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아이’라는 그 단어가 거슬렸다. 자신과 에리히를 당연히 하나로 묶어 아이의 보호자로 지칭하는 그 단어가.
장난감 칼을 들고 있던 에리히가 생각났다. 그런 건 별게 아니라고 말했던 것도.
이 찜찜하고 불쾌한 기분의 시작은 분명히 그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에리히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깨달았다.
비슷한 것을 기대받았고, 아마도 거의 같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자신은 죽음을 생각하는 껍데기 쓰레기이고, 그는 이런 여자와 아이를 얻어서 보다 더 완전해졌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그에게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아니면, 그는 정당하게 태어났으므로 본래부터 그럴 자격이 있었고, 자신에게는 없었다는 건가?
리누스는 웃었다. 오랜만에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갖고 싶다.
이 여자도, 이 아이도.
에리히가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이 갖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증오와 욕망이 뒤섞인 채 순식간에 한쪽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듯 움직였다. 리누스는 자신이 오랫동안 갈망한 것이 이것이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내내 몸을 괴롭히던 갈증과 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도.
그는 입술을 비틀어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그의 속내를 짐작하지도 못한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름을 불러왔다.
리누스는 포크를 들고 엘리엇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장된 표정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할 줄 몰라서 안 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엘리엇 상대로는 더욱 쉽게 나왔다.
“뭐가 맛있다고?”
엘리엇의 얼굴이 활짝 폈다.
“이거요!”
그는 기꺼이 엘리엇이 권하는 호박치즈 조각을 받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클레어는 다소 불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리누스는 그냥 대화를 포기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집사가 거실 문을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루덴도르프 후작가의 레이디 아우구스타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클레어는 포크를 내려놓았다.